오이디푸스 왕 지만지 고전선집 575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5.오이디푸스 왕-소포클레스

 

M에게..

 

현실

지난 주 토요일날 약속을 위해 집에서 나와서 버스 타는 곳에 갔는데, 무언가 집에 놔두고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기에,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 추운 날에 대비해서 두

꺼운 파카도 입고, 내복도 입은 상태여서 집에 들어가서 놔두고 온 물건을 가져나오는데 너무 덥

더군. 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어.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냥 더워서 약간 땀이 나는 정도였어. 진

문제는 버스 정류장에서 발생했어. 눈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데 내가 타려는 버스가 나를

나쳐서 버스 정류장 앞에 서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열심히 뛰었지. 두꺼운 파카와 내복

입은 상태로. 운좋아간신히 탈 수 있었는데, 너무 더워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거야. 하,

이 겨울에 땀이라니! 추워버스 안에는 히터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고, 남들은 모두 추워서

두꺼운 옷안에 움츠러든 상황에나는 글쎄,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여름의 풍경을 연출하

있었어. 이 모든 게 정말 싫더군. 그때 속으로 혼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사는 게 쉽지 않

군.' 물론 시간이 지나 땀이 식으며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상황이 되었지.

 

하지만 문제는 내가 한 순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야. M, 너라면 아마 이해하겠지.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이런 문제들이 우리 삶을 힘겹고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 말이야. 이번 일

같은 경우는 시간이 흐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서 별탈이 없었지만, 쉽사리 넘어갈 수 없

는 일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사소한 불운들이야 시간이 지나거나 마음 가짐을 바꿔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들, 계속해서 반복되는 문제들은 우리를 너무나 힘들게

하겠지. 사실 산다는 건, 사소한 불운과 힘겨운 일들 뿐만 아니라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계속해

서 반복되는 일들도 견뎌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

를 받고 사표를 쓸 생각을 계속 하면서도 견뎌내겠지. 수험생들도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살아나가는 것이지. 취업 준비생들도 취업이 안 되어 그것 자체가 삶의 고통이 되어도 살아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야. 아이에게도,어른에게도,노인에게도,청년에게도,중년에게도,부부에게도,연인에

게도, 자식에게도,부모에게도,학생에게도,회사원에게도,그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도

저마다 자신들의 문제가 있겠지.

 

그 문제의 순간마다 우리는 '사는 게 쉽지 않다'고 되뇌는 것 같아. 누구나 자신이 마주치는

문제가, 문제의 무게감을 떠나서 언제나 쉽지 않은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겠지.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가장 어렵게 여긴다는 말이지. 나는 가끔 그런 인식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어차피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을 내뱉고 생각하며 견뎌나가

는 것이라는 얘기야. 진짜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을 마주하거나, 감당 못할 운명 앞에 선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나올까? 그 사람에게는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버거우니까, 이런 말이

오지 않을 거야. 사는 게 쉬운가 쉽지 않은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지 한 순간 한 순간 숨

쉬는게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까, 그런 말 자체를 할 수 없는 거야.

 

M, 나는 그러니까 자책을 하고 있는 거야.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나 자신의 순간적인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는거야. 이런 식의 비판을 시도하다

보니 갑자기 한 사람이 떠올라.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운명의 비극을 경험한 한 남자. 너무나도

유명한 이 남자는 신화와 비극과 정신분석학의 이론으로 오랜 시간 우리 곁에 머물면서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와 오랜 시간에 흩뿌리고 다니며 불멸의 명성을 얻었지. 그래, 너도 짐작했겠지

만 그 남자의 이름이 바로 오이디푸스야.

 

오이디푸스왕의 비극

그는 왕이었어. 도시를 괴롭히던 괴물을 물리친 영웅이기도 했어. 아,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둔 행복한 남편이기도 했지. 자식들도 훌륭했어. 도시의 시민들은 그를 존경하고

인정했으며, 아내의 동생인 크레온과 도시의 장로들도 그를 존중하고 사랑했어. 저주니 비극이

니 운명의 화살이니 하는 말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어. 가끔씩

그도 '사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겠지.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을 때도, 그건 행복의 표시일

뿐이었을 거야. 그는 커다른 문제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삶의

급전직하는 순식간이었어. 도시에 닥친 역병과 그것을 막기 위한 그의 부단한 노력이 그 자신의

삶을 파멸로 몰고간거야. 신탁에 의해서 도시에 들이닥친 역병을 막기 위해, 그는 전왕의 살인범

을 잡으려고 노력하지. 그 자신이 탐정의 마음으로 범인을 잡기 위해 노력한거야. 그런데, 재미

있게도 그 자신이 범인이었어. 진실을 얻기 위한 그 자신의 노력은,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고가

는 노력이기도 한 거지. 이건 의도하지 않은, 자멸의 한 방식인거야. 그는 그 자신을 잡기 위해,

자신을 최악의 비극적인 인생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된 셈이야.

 

그의 노력이 그에게 준 것이라고는,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를 아내로 두었다는 사실,

자신친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서 자신의 자식이자

동시에 자신의 형제자매들인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이 통치하는

도시의 시민들을 죽만든 원인이었다는 사실이었어. 너무 비극적인 것 같지? 최선을

다한 노력으로 얻은 게 이런 말로 표현 못할 충격적인 사실이라는 사실이. 평범한 이들은

죽음을 선택할 것 같은 최악의 운명 앞에서도 이 저주받은 왕이자 저주받은 사내인 오이디푸스

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아.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닥친 운명이라면, 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아가

는 것을 선택해. 그것은 그가 자신이 죽는 날까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아들인다는

말이었어. 자신이 죽는 날까지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을 계속해서 받겠다는 의미인거야. 나는

이 마지막 부분을 보고 감탄했어. 자신이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저지른 죄이기에,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를 할 수도 있었건만, 그는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자신이 저지른 를 시인하고,

죄의 대가를 달게 받기로 하고 결정하지. 오이디푸스는 누구나 할 수 없는 숭고한 의지의 힘을

보여준거야. 나는 여기서 인간의 위대한 일면을 봤어. 그리스 최고의 비극작가 중 한명이었

소포클레스도,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운명의 불가해성과 더불어 이런 인간의 위대한 일면을 말하

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주제가 극의 역동적인 구성과 함께 전해지기에,

<오이디푸스 왕>이 2000년의 시간을 어넘어 나 같은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닐까.

시간과 상관없는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하기에, 이 비극은 과거의 작품이지만

충분히 현재적일 수 있고, 현재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거야.

 

비극, 그리고 현재

M, 내가 '사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거나 말을 하지 않게 되는 일은 없을 거야.

나의 앞에 마주친 사소한 불운과 힘겨움 앞에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이나 생각을 하게 될 거야.

그게 그것을 이겨내는 가장 사소한 방법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지. 다만, 나는 <오이디푸스 왕>

을 읽었기에 가끔씩 나보다 불행했던 오이디푸스라는 남자를 떠올리게 될 수도 있어. 그럴 때,

나는 내가 한 행동이나 말이 평온과 행복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몰라. 내가 살아가

는 일상이 얼마나 문제 없는 것인지 깨달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이것이 사치에 가까운 표현이라

는 사실도 동시에 깨닫게 되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에게

<오이디푸스 왕>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어. 그러니 기회가 되면 너도 한번

읽어봐. 어쩌면 너에게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제 이 글을 마칠 시간이야. M, 니가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니가 어떤 생각을 하든 우리는 다음에 다시 만나는

거야. 알겠지?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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