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세상의 끝,혹은 시작-우타노 쇼고
'아내와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운명에게 볼모를 바치는 일이다.'
책 첫장에 나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 문장을 보면서 떠오르는 건, 이 문장에서
흘러넘치는 남성적인 자신감과 남성 우월주의가 당대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이컨과 동시대를 살았던 셰익스피어가 쓴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보
면 알 수 있듯이, 그 시대에는 사회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무력한 존재였고, 가정의 지배권은 남성이 잡고 있었다. 가정이라는 배의 선장으로
서 거침없이 항해를 이끌어나가는 강력한 힘의 소유자인 남성. 바로 그런 당대의 사
회상이 있었기에, 베이컨은 자신감 있게 이 문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우리 사회나 옆 나라인 일본 사회에서도 베이컨의 시대와 같은 강력한 남성상이 가
정에 서도 지배적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화면서 가정에
서 남성들의 위치는 과거와 같이 강하지는 않다. 지금 우리 시대의 남성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할지는 몰라도, 가정의 강력한 지배자로 군림하기는 어려운
것이다.(물론 모든 가정이 동일한지는 나 스스로도 장담할 수는 없다.^^;;)
<세상의 끝,혹은 시작>은 그렇게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남자의 이야
기이다. 아니, 이 남자에게 고군분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남자는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버렸고, 그 절망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건 고
군분투라기 보다는 살기 위한 발악에 가까워 보인다. 이 남자의 발악은 숨겨져 있던
자식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식의 비밀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이 행복하
다고 여겼고, 남의 일에는 무관심하기 그지없던 평범한 이기주의자였다.
그러나 자식의 비밀을 알고 나서는 그는 더 이상 자기삶이 평온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삶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자신이 행복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진실이 아닌, 기만과 허위로 가
득했기에 행복했던 그의 삶. 하지만 이 남자의 삶은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자 순식간
에 절망으로 치닫게 된다. 진실이라는 태풍은 기만과 허위가 만든 행복을 용납하지
않고 날려버리고 앙상한 실제 삶을 드러내 보여준다. 삶의 앙상한 모습이 실제의 모
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이제 앙상한 삶이나마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며 발
악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아마 궁금할 것이다. 남자에게 삶의 진실을 깨닫
게 해준 자식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자의 자식이 초등학생 연쇄유괴살
인 사건의 범인이였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끔직한 진실 앞에서 남자는 절망했고, 기만과 허위에 가득찬 자신의 이기적
삶을 되돌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행동은 이미 때늦은 행동이고, 과거를
어떤 식으로든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남자는 어떻게 이 사태에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그에게 어떤 결말이 기다릴 것인가? 그는 자식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세상의 끝에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아직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한 가정을 꾸려 나가지 못한
나는 감히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그저, 이런 끔찍한 일이 내 미래에 일어나
지 않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다만, 나는 이 책의 처음에 나온 베이컨의 말을 소설 속
의 현실과 지금의 상황에 맞춰서 바꿀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가상의 이야기가 던진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기기에. 마지막
으로 이렇게 내가 바꾼 문장을 남기며 이제 이 부족한 글을 끝맺고자 한다.
'아내와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새로운 운명적 삶을 시작하는 일이다. 이 삶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당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해야 한다.
만약에 그런 각오가 없다면, 당신은 아내와 자식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내와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해야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