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21.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오가와 요코

 

체스는 우주였다. 이 우주의 무한한 어둠을 빛내는 성좌를 만드는 건 체스판에서

체스말을 움직이는 기사들의 손놀림에 달려 있었다. 체스라는 우주에 어떤 성좌가

새겨지는 가는 체스 기사들의 정신과 체스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과 태도, 그들의

분위기와 체스와 그들이 체스라는 게임과 호응해서 빚어지는 호흡에 달려 있었다.

체스판에 새겨진 성좌는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을 넘나들며

자신의 모습을 아로새기고 있었다. 물론 항상 성좌가 빛만을 내뿜는건 아니었다. 때로는

이 성좌들은 빛무리를 넘어서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우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시가 되기도 했다.

 

아니, 체스는 바다였다. 체스라는 대양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그 무한의 바다에서

체스 기사들은 저마다의 영법으로 헤엄치며 자신만의 몸놀림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몸놀림은 싱크로나이즈 선수들의 점수를 따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만의 가치를 표출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아름답기도 했고, 아름답지 않기도

했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의 틀 알레힌은 8X8의 체스판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그 우주를 탐사한 우주비행사이자, 무한의 대양을 헤엄쳐다닌 탐험가였다.

그의 탐사와 수영은 오직 체스 자체를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그의 숭고한 미학적

이상에 따라 이루어진 행위였는데, 숭고한 미학적 이상을 추구함에도 계속해서 그의

체스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목표 자체를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라,체스 그 자체를

사랑하고, 체스를 두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그의 습성 때문이었다. 목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과정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흠뻑 빠져들었기에 그의 체스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이다. '반하의 시인' 리틀 알레힌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그와 체스를 함께 하고,

그의 체스를 들여다보고, 체스의 기보를 바라본 책 속 등장인물들에게 전해져 그들의

삶을 풍족하고 아름답게 해준다.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책을 바라보는 독자인 나에게까지 리틀 알레힌의 체스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데, 종이에 새겨진 글자들이 모여들어서 형성한 이 아름다움은

체스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리틀 알레힌의 특별한 삶의 아름다움도 함께 전해준다.

외롭고 쓸쓸하며 매우 독특한 리틀 알레힌 삶의 아름다움이 체스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체스의 아름다움이 삶의 아름다움을 완성시켜나가는 삶과 체스의 아름다운

이중주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나도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함께 체스의 바다를

헤엄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무척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수영을

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오가와 요코의 유물론적이며 몽환적인 체스

동화의 힘은 얼마나 놀라운가.

 

현실 그 어딘가에 위치한 듯 보이지만 결코 현실은 아닌 것을 그리는, 오가와 요코의

작은 것의 무한성을 보여주는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해본다. 작은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큰 것인지. 외관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품 속에 무한을 품을 수 있는

작은 것의 커다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무한의 씨앗을

품은 작은 것의 거대성을 우리가 감히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외면의 크기와

규모에만 집착하지 않고 작은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 잘 들여다보면

작은 씨앗 하나에도 우주와 세상의 모든 것이 담겨 있으니.

 

사족. 기보 하나만 남긴 리틀 알레힌의 삶을 읽다보니 망상이 생겨난다. 분명히 세상

어디에선가 내가 리틀 알레힌과 체스를 두고 있는 영상이 보이는 것이다. 뚱뚱한 고양이를

안고 그와 체스를 두는 영상 말이다. 어쩌면 그건 평형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사족 두번째. 위의 글을 보니 내가 점점 이상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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