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자제 지만지 고전선집 684
장 바티스트 라신 지음, 송민숙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바자제-장 라신

인간에게서 욕망이 멈춘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한은

욕망하기를 욕망하고, 욕망을 꿈꾸며,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삶을 살아갈 갈 수밖에 없는 존재

가 인간이다. 인간의 삶에서 욕망은 빠질 수 없는 것이기에 인간의 삶을 다루는 문학은 너무도

당연하게도 이 욕망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학은 인간의 욕망으로 얼룩진 삶을 언어로

구현해내어 종이 위에 새겨놓는다. 종이 위에 새겨진 욕망의 그림자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다르면서도 비슷하고, 비슷하고서도 다른 인간들의 욕망의 흔적들을 되새김질 한다.

 

장 라신의 일곱 번째 비극 <바자제>도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간 욕망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 작품에서 빛을 발하는 욕망은 '질투'다. 오셀로가 이아고의 농간에 넘어가 순결한

데스데모나를 죽이게 만든 그 무시무시한 욕망, 연애와 사랑에 빠질 수 없는 양념같지만 과하면

사랑과 연애의 파멸을 불러오기도 하는 그 욕망, '질투'. <오셀로>에서 화려하게 불꽃을 피우며

오셀로와 데스데모나를 파멸로 몰아넣은 이 욕망은 지치지도 않고, 라신의 일곱 번째 비극에

출현해 다시한번 자신의 힘으로 등장인물들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셀로>에서는 이아고라는 악한이 오셀로를 조종해서 질투라는 욕망을

피워올린 것이 비해, <바자제>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스스로가 질투의 덫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파멸을 맞는다는 점이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정치적인 함정과 덫에도 불구하고 한 남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서로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여인들의 질투의 힘이란 어마어마해서, 이 질투의

불꽃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우리네 평범한 남자들은 쉽사리 타 죽을 것처럼 보인다.

우리 보다 뛰어난 것처럼 보이는 바자제란 남정네도, 그녀들의 무시무시한 질투의 힘 앞에서

죽음을 맞는 것을 보건데, 여자들의 질투란 남성들의 왕성한 성욕을 능가할 정도의

파멸적 생명력을 간직한 것처럼 보인다.

 

프로이트가 말한 거세공포의 질투버전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우리들의 조상이 얼마나 현명한지

깨달았다. 그들이 남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말은 얼마나

옳은가! 아니 이 희곡에 따르면 '여자가 질투를 품으면 남자는 뼈도 못 추린다.'라는 말이 더

들어맞겠지. 어쨌든 여성 심리 묘사에 능한 프랑스 고전주의 극작가 라신의 희곡을 보면서

새삼 여성들과 질투의 무서움을 뼈속 깊이 새기며, 겨울의 추위를 잊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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