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길들이기 - 전예원세계문학선 310 셰익스피어 전집 1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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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전예원
154p


4.책담화: 진짜 웃음과 헛 웃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웃은 건 처음있는 일이다.  영국의 대문호의 작품을 읽고
웃음이 나올 줄이야.
예상치 못한 웃음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웃어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이 머리 속에서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이 참을 수 없는 욕구에 굴복한 어리석은 동물인 나는 결국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미흡하지만 작은 분량이나마 이렇게 글을 남긴다.
주체할 수 없는 어리석음의 욕구가 빚은 이 작은 결과물이 내 머리 속을 조급이나마 가볍게 하리라는 기대를 품은 채.

먼저 독자적으로 내가 어떻게 웃었는지 분석을 해 보았다.
그러니 내가 크게 두 가지의 웃음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두 가지 웃음을 여기에 따로따로 적어보겠다.

첫번째 웃음-진짜 웃음

첫번째 웃음은 말 그대로 진짜 웃겨서 나오는 웃음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지금까지 내가 읽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머러스하고,가장 황당한 사건들이 많이 나오는 희곡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어딘가 과장된 모습으로 희화화되어 있고,
그걸 바탕으로 엉뚱하고 과장된 행동을 저지르며, 읽는 독자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부분은 캐더리더와 페트루치오가 처음으로 만나 대화하는 장면.
말괄량이라기 보다는 왈패에 가까운 캐더리더는 페트루치오를 보자마자 줄기줄기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다.
보통 남자같았으면 기가 죽어 같이 욕하거나 버럭 화를 낼 만한 상황에서
페트루치오는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그녀가 욕설을 할때마다 칭찬을 한다.
그녀가 욕설을 내뱉으면 칭찬을 하고, 또 저주를 퍼부으면 마찬가지로 칭찬을 하는 것이다.
욕과 칭찬의 등가교환.  이 능글맞음을 통해 캐더리더의 아버지에게 결혼 승낙을 받아낸  페트루치오는 그렇게 오직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자신의 목적을 훌륭히 이뤄낸다.

그 외에도 이 희곡은 중간중간 유머러스한 상황을 계속 만들어낸다.
아름답고 조신한 동생 비앵커가 마음에 안 들어 캐더리더가 그녀를 의자에 묶어놓고 때리는 장면이나, 비앵커와 결혼하기 위해 루첸티오가 자신의 가짜 아버지를 만들었는데,
갑자기 진짜 아버지가 등장해 당황한 가짜 아버지와 루첸티오의 하인들이
진짜 아버지를 비난하고,고발하는 장면등은 그 자체로서 재미있고,
우스운 장면으로서 셰익스피어의 유머스런 이야기 구성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 없다고 여겼다.
오히려 여기까지는 셰익스피어의 색다른 면에 이끌려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작품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진짜 우스워서 웃는 장면에서 더 멀리 나가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오는 지점까지 내용을 끌고 가 버린다.

여기서 두번째 웃음인 헛웃음이 나온다.

두번째 웃음-헛 웃음

두번째 웃음은 상황과 인물들의 행동이 너무 황당해서 나오는 헛웃음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희화화의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당대의 가치관과 고정관념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서 핵심적인 사항은 여성을 비하하고,
순종을 강요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성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페트루치오에게 캐더리더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게 아니라 돈을 가진 여성으로서 중요한 존재였다. 그에게 캐더리더는 얻어야만 하는 하나의 재산이었고,
그러기에 온갖 모욕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능글맞음을 발휘해 그녀를 획득한다.   

그녀를 얻는 순간 페트루치오는 그녀가 자신의 물건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신부는 내 소유물이니, 나의 동산이요 나의 집이요 나의 가구요 나의 밭이고 나의 외양간이요. 또 나의 말 나의 소 나의 당나귀요. 나의 이것도 저것도 다 되는 거요.'

하나의 물건으로서 페트루치오의 소유가 된 캐더리더.
하지만 페트루치오는 그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의 물건인 캐더리더가 순종하는 여자가 되길 원했다.
그는 캐더리더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반항하고,자유롭게 행동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듣는, 어떤 터무니 없는 일이라도 시키면 듣는 존재가 되길 원했다.
그는 물건으로서 그녀를 얻고 나서 그녀가 노예를 되기를 원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페트루치오는 그녀를 순종적으로 만들기 위해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나선다.
헌데, 그 과정이 지금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이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페트루치오는 그녀를 순종적인 여자로 만들기 위해,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잠도 거의 재우지 않으며,하는 일마다 못 하게 하고. 그녀 앞에서 하인들을 의도적으로 엄청나게 핍박하는 행위 등으로 그녀를 압박하고,그녀의 기세를 짓누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야만적이었던 여성을 변화시키기 위해
지극히 비인간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페트루치오.
그의 다방면에 걸친 마초적 압박에 결국, 캐더리더는 두 손을 들고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듣고 보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당신이 태양이 아니라고 하면 태양이 아니랍니다. ...
당신이 이름이 붙이면 뭐든 그대로 돼요. 캐더린에게는 늘 그렇게 됩니다.'

그녀를 순종적인 여인으로 만든 건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녀는 극의 마지막에 가서 모든 여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편들은 우리들의 주인이요 생명이며 보호자며 머리요 군주이십니다. ...
그러니 오만함을 버리세요. ... 그리고 남편의 발밑에 손을 놓고 엎드려요.'

이렇게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막을 내린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내 얼굴에서는 참을 수 없이 허한 헛웃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토록 황당할 수가 있나?
어떻게 여성을 이렇게 비인간적이고,야만적인 존재로 비하하고,그것을 웃음의 소재로 삼을 수 있나?
어떻게 이토록 가부장적이고,권위적이며,오만할 수 있을까?
역시 그 당시에 여성은 2등인간에 불과했던 것이었나?

대문호인 셰익스피어도 당대 가치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나는 황당함에 사로잡혀, 계속 실소를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희곡은 평론가들의 가혹한 혹평에 난도질당한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으로 군데군데 불완전하고 거친 면이 보인다는 점,
시작할 때 보인 서극이 중간에 사라져 버린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을 야만적.비인간적인 취급을 한 점에서
평론가들과 전문가들은 가혹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서극:취객 슬라이는 술집 여주인과 술값 때문에 싸우다 지쳐 길거리에서 잠든다.
그걸 무심코 보던 지방 영주는 슬라이를 골탕먹일 계획을 세운다.
그를 자기 성에 데려가, 그가 눈을 뜨면 그를 영주로 떠받들고, 그의 자신의 기억을 말하면
그건 그가 미쳐서 환상을 본 것으로 우기기로 한 것이다.
계획은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자신을 영주라 착각하기 시작한 슬라이는 한 연극을 본다.
그가 보는 연극이 바로 <말괄량이 길들이기>이다.
한마디로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극중극인 셈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유머러스함과 황당한 상황 설정이 어우러진 스피디한 극의 구성상의 특성으로,
공연적으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이 극의 성공은 1980년대까지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읽기는 불편하지만,극으로 보는 것은 즐거운 작품이라 평한다.

사실 나도 이 희곡을 읽으며 재미를 느꼈지만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재미 때문에 생긴 웃음과 황당함과 불편함 때문에 생긴 헛웃음지 공존한 독특한 읽기의 체험.
내게 있어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두 가지 웃음이 공존한 기억으로 뇌리에 남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한 최후의 의문을 말하고자 한다.
진짜 셰익스피어는 단지 재미라는 요소를 위해 당대의 가치관을 답습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당대의 가치관을 답습하면서도 동시에 당대의 가치관을 비웃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것일까?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동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공감하면서도,
웃는 사람들과 웃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마저 비웃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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