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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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7.파쇄-구병모

 

저는 얇은 책을 읽을 때마다 종종 한 가지 큰 독서 병폐를 겪습니다. 책이 얇다보니 저도 모르게 빨리 읽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 마음에 따라 책을 읽다보니 얇은 책을 읽을 때의 마음은 초조해집니다. 초조해지다보니 책이 내 마음대로 빨리 읽히지 않으면 다급해집니다. 다급해지다보니 마음은 괴로워지요. ‘왜 빨리 읽히지 않는 거야하면서,

 

두꺼운 책을 읽을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차피 책이 두껍다 보니 빨리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시간과 속도에 대한 강박관념을 포기하고 읽으니 마음은 여유롭고 편안합니다. 마치 느긋하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두꺼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사이에 저는 두꺼운 책을 다 독파해냅니다.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저는 책이 얇으면 초조해지고, 두꺼우면 편안해집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저는 종종 이런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96페이지의 구병모 작가의 <파쇄>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파쇄>2013년에 구병모 작가가 발표한 <파과>라는 소설의 전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 병모 작가는 이 소설을 <파과>의 외전이라고 하는데, 저는 <파과> 앞 부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에 이 소설을 파과의 전사이자 프리퀄로서 생각합니다. 어쨌든 너무 얇아서 읽기에 도전했는데 아이고 아뿔사(^^;;), 이 책은 제 생각과 너무 달랐습니다.

 

일단 문장이 잘 읽히지가 않습니다. 구병모 작가가 갈고닦아 정련한 문장들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문장이 아니고,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적인 표현으로 책에 알알이 박혀있기에 저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치 서걱서걱거리는 밥알을 삼키는 것처럼, 문장과 단어들이 잘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문장의 소화가 잘 되지 않다보니 저의 초조함은 극에 달합니다. , 왜 이렇게 페이지가 안 넘어가지... 극에 달한 초조함은 저에게 괴로움을 불러일으킵니다. , 이거 괜히 읽었나... 하지만 역시 포기는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초조해하는 제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빨리 읽기를 포기하고 천천히 읽자고 하는 순간 책에 대한 지평이 달라집니다. 이제 이 책은 빨리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다가옵니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어떻게보면 단순합니다. <파과>에서 65세의 여성 킬러였던 조각이 십대 소녀로 나오는 <파쇄>산장에서의 혹독한 훈련을 통해 킬러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적고보면 너무나 단순한 내용이지만 책 속의 내용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서걱서걱거리는 문장들 속에서 조각은 킬러가 되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일종의 스승 격의 킬러와의 혹독한 훈련을 겪습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폭력의 위기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혹사시키는 킬러되기 훈련은 지속적으로 긴장과 불안을 불어일으킵니다. 이 불안과 긴장, 위기감이 불러 일으키는 소설의 분위기가 책을 읽는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읽다보니 저는 깨닫게 됩니다. 제가 문학적인 범죄소설을 읽고 있다는. 보통 장르문학으로 분류되는 범죄소설은 추리소설의 연장선상에서 문학성보다는 스토리텔링에 힘을 줍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위시한 소수의 범죄소설은 스토리텔링보다는 문학성에 힘을 쏟습니다. 잘 읽히지 않는 문학적인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문학성을 통해 구현된 범죄의 그림자는 저를 문학적인 범죄의 장으로 이끕니다. 그 문학적인 범죄의 장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면, 이제 문학적인 범죄 소설를 읽을 준비를 다 마친 셈입니다. <파쇄>는 너무 얇아서 만족이 안 됩니다. 다시 또다른 문학적인 범죄소설을 읽으러 떠나봐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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