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내일 - 듀나의 아득한 내일 다시 쓰기 FoP Classic
리 브래킷 지음, 이수현 옮김 / 알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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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9.아득한 내일-리 브래킷

 

N에게 보내는 편지

 

N, 오랜만이야, 잘 지내고 있지?^^;; 오랜만에 예전처럼 책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너에게 보내려고 해. <아득한 내일>을 읽고 나니까 너에게 편지를 다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이 이렇게 하라고 하네. 내 마음이 시키니까 나도 따라야지 어쩌겠어. 어쨌든 이제 시작해볼게.

 

<아득한 내일>은 핵 전쟁 이후의 몰락한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야. 인류 명말 이후를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답게 아주아주 암울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야. 사람들이 평범하게 삶을 이어가기는 해.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은 없지.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겠지만 정도를 따지자면 아주 약한 정도의 몰락한 세상을 그리고 있어. 대규모 도시가 없고, 고도의 문명이 없고,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과 도시의 성장을 두려워하고, 두려움 때문에 기술을 발전시키고 도시를 성장시키려는 이들은 사람들을 쫓아내거나 없애려 하지.

 

큰 틀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두 개의 대립되는 믿음이 양 축을 형성하고 있어. 하나의 축은 세상 사람들의 믿음이야. 이 믿음은 핵 전쟁을 문명과 기술과 대규모 도시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 이 믿음을 가진 세상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과 문명의 성장, 대규모 도시의 형성을 두려워하고 그것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그들에게는 문명,기술,대규모 도시=핵전쟁=멸망이지.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성경과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정당화하고, 그에 반대되는 이들은 악으로 몰아 죽이지. 초반 부분에 한 남자를 광신도들이 돌로 쳐 죽이는 장면이 그것을 증명해. 그들은 영원히 문명 없이, 기술의 발달 없이, 자신들의 안락함 속에서 살아가고 싶어해. 발전없는 퇴보만의 자신의 삶이라고 여기며.

 

반대편에는 이들과 대립되는 바토스타운의 믿음이 있지. 핵 전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기술자들이 만든 이 도시는 과거의 발달된 기술 문명을 간직하고 있어. 이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믿어. 단지 이들은 자신들이 간직한 기술을 안전하게 만들고 싶어해.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원자력 기술을 최대한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연구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가며 계속해서 해나가지. 바토스타운의 믿음은 기술의 안전에 대한 믿음이자 기술을 안전하게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

 

주인공인 렌 콜터는 이 두 믿음 사이를 왔다갔다해. 처음에 렌은 과거의 화려한 문명을 경험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사촌인 에서의 자극까지 받아서 기술 없이 멈춰 있고 퇴보를 유지하려는 마을에서 벗어나게 돼. 그는 에서와 함께 전설의 바토스타운을 찾아 떠나지. 상인인 호스테터의 도움으로 바토스타운에 간 그는 그곳의 삶이 자신의 이상과 다르자 실망을 하게 되지. 같이 이곳에 온 에서는 기술의 힘을 보고 동화되어 살아가는 데 반해서. 그래서 그는 바토스타운을 떠나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하지만 그 길에서 그는 깨닫게 되지. 고향도, 바토스타운도, 자신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없으며, 그 누구의 고정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나는 렌을 이해해. 자신이 사는 곳의 삶에 만족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곳에 가서도 실망하게 되지. 그곳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니까. 그는 광신도가 될 수 없는 사람인거야. 완벽하게 한 쪽의 편을 들 수 없는 사람인거지. 그는 불확실한 믿음의 사람인거야.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렇기 때문이야. 예를 들어볼게. 나는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야. 내 삶의 방식과 살아온 나날들이 유신론과 친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유신론자가 되기 힘들어. 반대로 생각하면 무신론자가 가까울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어. 그런데 나는 리처드 도킨스나 대니얼 데닛 같은 서양의 무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면 강렬한 신의 그림자를 느껴. 그들에게서 나는 일신교적 믿음의 문화권에서 태어나 마치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종의 반발심이 보여. 사실 그들과 달리 나는 반박할 필요가 없어. 왜냐고? 내 삶에 기독교의 유일신이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그림자를 느낄 필요도 없고, 그림자를 느끼지 않으니까 반발심을 가질 필요도 없어. 존재한 적이 없는데 왜 반발해야 하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신이 있다는 믿음과 신이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성립하는 건데, 나는 아예 그런 믿음 자체가 없다보니까 둘 사이의 불확실한 영역에 서서 둘의 믿음을 어렴풋하게 추축하고 있다는 말이야.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두 축 사이에 서 있는 나는 이 소설 속의 렌처럼 불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일 수밖에 없지. 대신에 나는 나 자신의 믿음을 끊임없이 바꾸어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지. 과거에 유신론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유신론자들의 책을 읽으며 그들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어. 물론 이해한다고 그들의 말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왔다갔다하며 내 삶의 믿음을 조금씩 바꾸어나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어. 완벽한 믿음을 가질 수 없으니까. N, 그래도 내가 안심하는 건, 내가 믿음 때문에 누군가를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직은 안 된다는 거야. 그것만은 믿고 있어. 나는 앞으로도 렌처럼 불확실한 믿음의 삶을 이어나갈 거 같아.

 

N,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기회 되면 또 이런 식의 책 편지를 너에게 쓰도록 할게.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있어.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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