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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이면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평점 :
13.그림의 이면-쓰부라미
‘사랑은 아름답다’는 말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아름다운 건 아니죠. ‘사랑이 아름답다’는 말이 맞으려면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할 겁니다. 만약에 아름다울 수 없는 조건이라면, 그 사랑이 아름다운 게 될리는 없죠.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이라는 조건이라면 거기에 아름답다는 말을 쉽게 붙일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거부하는데 다른 한 사람이 미친 듯이 사랑한다면 그것도 아름다울까요? 어쩌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스토킹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사랑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혹은 때에 따라서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를 생각해봅시다. 이 영화는 바람피는 배우자를 둔 유부남과 유부녀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그립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 영화는 단순한 불륜 영화처럼 보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불륜 영화를 벗어납니다. 왜냐구요? 이 영화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둘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미묘한 감정선과 상황들이 빚어내는 사랑의 느낌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죠.
어찌되었든 모든 사랑이 아름다울 수 없지만, 아름다울 수 없는 사랑이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고 스쳐지나간다면, 그런 모든 상황들이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으로 수렴된다면, 충분히 그런 사랑들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쓰부라미의 대표작으로 태국을 대표하는 로맨스 소설 <그림의 이면>이 가리키는 사랑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소설은 30대의 왕족 출신 유부녀와 20대의 중상층 출신 일본 유학생의 사랑에서 다룹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이 소설도 단순한 불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단순한 불륜 이야기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소설 내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은 끝없이 어긋나며, 결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결론납니다. 처음에 일본 유학생인 남자가 사랑을 고백하지만 유부녀가 진정시켜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병이 지나가고 나서 남자에게는 그 기억이 추억이 됩니다. 태국으로 돌아온 남자는, 과거의 사랑이 대상이었던 여인이 죽기 전에 한 고백으로 인해서야 그녀도 자신을 사랑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나서야 둘이 서로 사랑했음을 알게 된 것이죠. 하지만 사랑은 지나가버렸고, 다시 돌이킬 수 없죠.
돌이킬 수 없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죠. 만약에 이루어졌다면 그게 아름다웠을까요. 현실이라는 힘 앞에서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움을 잃고 현실화되어 산산히 바스라지거나 그저 그런 일상의 삶이 되었을 겁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아름다움은,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사랑의 가능성과 아직 간직되고 있는 사랑의 낭만성과 순수함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림의 이면>은 그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가능성과 낭만성 때문에 충분히 아름다운 사랑의 소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낭만주의가 이 소설을 아름답게 만든 것이죠. 저는 여기에 이 소설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