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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 2022년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대상
김준녕 지음 / 허블 / 2022년 8월
평점 :
5.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김준녕
하루하루 글 쓴다는 핑계로 비슷비슷한 글을 쓰는 게 지겨웠다. 지겹고 쓰기 싫어서 하루하루 글 쓴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안 썼다. 하지만 써야 하는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쓰려고 앉았다.
조금 다른 글, 지금까지 써오지 않은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장 쉬운 건 오독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진실이 아니라도 내 마음대로 해석해서 쓰는 글.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의 서평을 예로 든다면 이 책을 내 마음대로 오독하고 왜곡해서 쓰면 된다. 아, 떠오른다. 어떻게 써야 할지가.
일단 작가의 나이를 본다. 96년생. 아주 좋다. 지금 담론계에서 대히트 치고 있는 세대론적인 분석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밀레니엘 세대에 속해있기 때문에. 작가가 태어나고 몇 년 뒤에 한국은 IMF 사태를 맞게 된다. IMF 사태 이후의 한국은 그 이전과는 다른 세계라는 걸 나는 안다. 그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본격적인 향연이 펼쳐지는 시대를 한국인들은 IMF 이후로 살아가게 된다. 작가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태어나서 신자유주의로 숨을 쉬고 살아갔을 것이다. 작가의 10대 초반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덮친다. 역사상 최악의 불황 중 하나였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한국 사회에 또다른 충격파로 다가온다. IMF 사태로 시작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겪은 청소년기를 보낸 삶을 상상해보려 노력한다. 내가 그걸 상상할 수 있을까. 상상력의 부족으로 그 삶의 재현은 힘들다. 하지만 작가가 쓴 소설에서 약간의 추측을 해본다.
<막 너머에 신 있다면>은 참혹한 소설이다. 소설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걸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온난화를 겪고 몰락한 소설 속 지구는 대기근이 덮친 뒤에 최후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사실에 더해서 지구인들은 우주 탐사를 통해 태양계를 감싼 막을 알고 있다. 인간들은 막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없다. 우주로 더 나아갈 수도 없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구는 몰락해가고 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독재자 B는 이런 상황 속에서 우주선 무궁화 호를 띄우고 막에 가닿으려고 한다. 마치 그것만이 희망이라는 듯. 미래를 기대할 수도 없고, 굶주림 속에서 괴로워하던 첫 번째 주인공 ‘나’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서 우주선 승선을 선택한다. 140년이 넘게 걸릴 우주 항해이기에 아이들을 뽑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아이로서 나에게 새로운 희망은 우주선 탑승 밖에 없다고 여기며. 나는 굶주림 속에서 자신을 잡아먹으려던 부모를 죽인 냉혹한 형섭의 도움을 받아가며 온갖 참혹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우주로 나아간다. 우주선에서 형섭이 냉정한 독재자가 되었다가 살해되었음을 알리며 일종의 1부격인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시간이 흐른 뒤에 우주선의 현실을 바탕으로 2부격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새로운 ‘나’가 등장한다. 1부의 주인공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들이 주인공이 된 우주선 무궁화는 철저한 계급제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이다. 이들은 철저한 효율을 추구하며, 비효율적인 건 최선을 다해 처리한다. 인간의 죽은 몸은 비료로서 우주선 속 사람들을 위해 이용된다. 비효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규율을 지키지 않은 이들은 철저하게 죽음을 내리는 식으로. 나는 우주선의 이발사로 죽을 이들의 머리를 깎고, 죽은 이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스팀기를 작동시키는 인물이다. 철저한 계급화와 효율성 속에서 살아온 나는 이 삶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우주선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아내와 아내가 임신한 배 속 아이에 작은 희망을 거는 나에게 우주선의 현실을 뒤바꾸려는 반란군이 접촉해오고, 동료의 잔혹한 죽음 앞에서 나는 우연히 그들과 함께 반란에 나서서, 막 너머로 향하는 발걸음을 향하게 된다.
위에 적은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소설에 희망이나 이상이 들여설 여지는 거의 없다. 대기근을 겪은 지구에서부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혹은 막으로 가려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서로 죽고 죽이고 이용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고, 내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남을 죽이고 짓밟고 이용하는 게 일반화된 현실의 모습. 어쩌민 이 비정하고 잔혹한 현실은 신자유주의의 삶을 숨쉬듯 살아온 밀레니얼 세대에게 내면화된 삶의 또다른 문학적 형상화가 아닐까. 이것이 오독이고 왜곡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드리운 신자유주의적 삶의 모습들이 이런 식으로 형상화되는 게 일말의 삶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느낀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자신이 쓴 글에 반영될 수 밖에 없는 게 진실이기에.
일전에 나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일본 만화 <원피스>와 <진격의 거인>을 쓴 작가는 전혀 다른 삶을 그리고 있다고. <원피스> 속 세계는 꿈과 희망, 동료애, 우정이 넘쳐흐른다. 넘쳐 흐르다 못해 폭발할 정도로. 그에 비해 <원피스>보다 후대에 나온 <진격의 거인>에는 냉혹하고 잔혹한 현실이 담겨 있다. <진격의 거인>에서 중요한 건, 꿈과 희망, 우정이 아니라 ‘생존’이다. 이 두 만화의 차이는 그 만화가 시작된 일본 삶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이 말을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에도 쓰고 싶다. 이 소설에 담긴 현실은 작가가 살아온 삶을 반영한다고. 물론 소설에 절망만 있는 건 아니다. 2부의 주인공인 나와 지구인으로 우주선에 건너온 이아의 우정, 나를 돕는 유전자 인간 백팔의 행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을 절멸 시킬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막으로 향하는 나의 행동과 사고 속에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 담겨 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비정하고 냉정하고 참혹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추구할 수밖에 없고, 그런 추구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는 진실, 그 의미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여 희망을 걸 수도 있고, 믿음을 가질 수도 있는 게 인간이라는 진실. 거기에 인간 삶과 문학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포기할 수도, 폭주할 수도 없는 삶 앞에서 인간은 살아갈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