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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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헤르만 헤세

 

 

책을 읽으면서 내면에 쌓인 것들은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속에 어떤 개념틀을 쌓아올립니다. 여러 가지 개념틀이 저의 의도와 상관없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총체성'이라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되기' 혹은 '~기계'라는 개념입니다. 총체성은 흔히 헤겔이나 니체 같은 독일철학자들의 개념에서 받아들여진 개념이고, '~되기''~기계'는 들뢰즈의 노마디즘(정확히는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해석한 일군의 한국과 일본 철학자들의 개념틀)에서 받아들여진 개념입니다. 이 개념들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쌓아올렸느냐 혹은 어떻게 그 해석틀을 이용하고 있느냐는 길고도 지난한 이야기이기에 자세하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확실한 건, 제가 요새 이 두 가지 개념을 때로는 따로, 때로는 섞으면서 책에 나오는 주장이나 서평의 의견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겁니다.

 

 

저에게 이 두 개념이 문제가 되는 건, 저의 북플 친구가 쓴 몇 가지 서평 때문입니다. 저는 그 친구가 쓴 서평을 보고 즉각적으로 반박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반박으로 댓글을 달려고 보니 말이 너무 길어지고, 말이 길어지면 댓글로서의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반박의 여운이 짙게 남아 반박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해서 저는 반박 댓글이 아니라 반박 서평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가장 큰 문제인 귀차니즘이 발동해서 생각만 하고 글은 쓰지 않았습니다. 오늘 조증의 기운이 찾아 오기 전까지는. 조증이 찾아오자 저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제 반박 서평을 쓰자'고 달려들려고 했으나... 했으나... 반박 서평을 쓰기 전에 이 반박 서평을 위한 일종의 밑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왜 반박 서평을 쓰게 됐느냐'는 그 과정을 하나의 서사로서 이어보고 싶어졌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서평들을 쓰면서.

 

 

반박 서평을 위한 대장정의 첫 단계로서 저는 <데미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책 중 하나, 저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인생책 중 하나, 그리고 제가 총체성이라는 개념을 마음 속에 쌓게 되는 가장 시발점이 되는 책. 저는 <데미안>을 통해 22살의 가을에, 총체성이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처음 맞딱뜨리게 됩니다. 총체성이라는 개념을 그 전에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총체성'이라는 개념의 틀을 <데미안>에서 명확하게 처음 보게 된 거죠. 그 전에는 악이면 악이고, 선이면 선이었습니다.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 속에서 살아온 제게 <데미안>은 선과 악이 뒤섞이는 인간과 세상을 보여줬습니다. 선과 악이 하나의 인간 속에서 하나가 되는 총체성, 총체적인 인간으로서의 막스 데미안과 막스 데미안을 따라가는 싱클레어의 모습에 저는 매혹이 되었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저 자신의 알을 깨지 못했던 그 당시의 제게, 자신의 알을 깨고 새가 되어 날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마법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데미안>을 사랑했고, <데미안>을 평생 잊지 못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데미안>을 읽으면 그 때의 '저 자신의 틀'이라는 알을 깨지 못한 채 있던 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너는 얼마나 너 자신의 알을 깼느냐고 묻는. 어떻게 보면 제 독서의 경력은 저 자신의 알을 깨기 위한 무수한 몸부림에 다름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무수한 저 자신의 알을 깨기 위한 몸부림 와중에 얻게 된 것이 총체성에 대한 개념이니, 제가 이 총체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반박 댓글이나 반박 서평을 쓸 수밖에 없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말을 하고 싶네요. 북플 친구여, 그대의 서평에는 총체성이 부족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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