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 7년의 전쟁

1. 갑자기 나타난 손님처럼 임진왜란은 조선에 들이닥쳤다. 평화에 젖어 있던 조선은 예상할 수 없는 전쟁의 시작에, 전쟁이 일상화된 전국시대를 거친 전쟁의 베테랑들인 일본군의 거침없는 진군에 혼비백산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수도인 서울을 빼앗긴다. 겁먹은 왕 선조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고자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가려 했고, 신하들은 울면서 선조의 행동을 제지한다. 여기까지 보면 조선 조정은 혼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비규환의 현장 그 자체다. 임진왜란 시기 5년간 영의정의 자리에 올라 있으며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고자 최선을 다한 류성룡은 그 현실을 가감없이 <징비록>에 써서 남긴다. <징비록>을 쓰면서 류성룡은 실제 체험한 전쟁을 다시 추체험해야했고, 그 추체험은 그의 마음에 깊이 남아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글을 쓰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징비록>은 안타까운 전쟁사의 기록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도 <징비록>을 볼 수 있다. 이야기의 관점에서 보면, <징비록>에 쓰여진 임진왜란은 일본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욕망에서 시작하여 이순신 장군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멋진 이야기로도 보인다. 이 두 가지 관점이 서로 완벽하게 다르지는 않을 터. 안타깝고 슬프고 혼란스러운 전쟁의 기록과 멋진 이야기는 같은 물건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달리 보이는 것처럼, 다른 듯하지만 같은 하나의 사건으로 귀결된다. 임진왜란은 비극적인 이야기이지만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책을 써서 남기면 멋진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2.책은 전쟁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왕인 선조의 행동만은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었다. 적통으로서 왕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왕위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선조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시종일관 자기 권력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낸다. 공이 있어 인기 있는 신하들을 끊임없이 견제하고(그는 심지어 아들인 광해군마저 자신의 권력을 빼앗는 존재처럼 여겨 끊임없이 견제한다) 시험하고, 자신의 평판이 나빠지거나 불리해지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나쁜 평판을 피하려고 온갖 수를 부리는 임금의 모습을 어찌 좋게 볼 수 있을까? 최악의 상황에서도 신하들을 시험하려고 왕위에서 물러 나겠다는 선위 파동을 계속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정당화만 하려는 임금을 임금다운 임금으로서 바라볼 수는 없을 터. 그 이전에도 그랬지만, 책을 읽으면서 선조에 대한 내 평가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임금답지 임금을 가지지 못한 채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책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백성들은 고통받고, 나라는 망가지고, 신하들은 임금의 뒷치다꺼리를 하다 못해 책임까지 져야 하는 식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