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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2월
평점 :

8391.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히가시노 게이고
1.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영화가 시작되면, 애잔하면서도 쓸쓸하고 아름다운 '문 리버'의 선율이 흘러나오면서 택시가 달려온다. 달려온 택시는 멈추고, 택시문이 열리면서 화려한 복장을 하고 화려한 목걸이를 걸친 오드리 헵번이 걸어나온다. 오드리 헵번을 내려준 택시가 달려나가고, 오드리 헵번은 자기 앞에 보이는 문이 닫힌 티파니 보석상 주위를 걷기 시작한다. 걸으면서 그녀는 보석상 쇼윈도에 보이는 비싸고 화려한 보석들을 구경하면서 빵을 먹는다. 아침으로서. 그 장면에서 영화 제목이 자막으로 흘러나온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2.소설의 시작
교코라는 여인이 보석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녀는 쇼윈도에 비치는 비싸고 화려한 보석들을 홀린 듯이 바라보며 말한다. 가지고 싶다고. 하지만 그녀는 보석들을 살 능력이 없다. 살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살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타인에게 기대려 한다. 돈 많은 남자를 만나는 방법으로. 이 부분에서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의 교코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과 겹쳐진다. 돈 없는 여인이 값비싼 보석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진 채 남자를 통해서 그 욕망을 풀려고 한다는 측면에서.
3.돈이 흘러넘치던 시절

이 소설은 1988년에 나온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다. 그런데 1988년이라니... 1988년이면 일본 버블 경제가 한창이던 시절이 아니던가. 한국에서는 88서울 올림픽 때문에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가 출격 준비를 하고 굴렁쇠 소년이 굴렁쇠 굴리는 개막식 연습을 준비하던 시절에, 옆나라 일본은 거품으로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돈이 흘러넘쳤고, 돈이 흘러넘치다 못해 미국의 부동산을 사들이던 시절이었다.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사고, 록펠러 센터를 사들이는 식으로.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 는 농담이 유행하던 시절, 도쿄에 천황이 사는 황거 지가가 캘리포니아 주 전체 지가와 맞먹던 시절, 미국이 일본을 '라이징 선'이라 부르며 아주 경계하던 시절, 돈이 돈을 낳고 과소비가 판을 치던 시절. 교쿄가 보석상 쇼윈도에 비친 보석을 홀린 듯이 쳐다보며 갖고 싶어하던 시절은 그런 시절이었다. 누구도 돈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4.돈이 모든 것을 말한다

<다크 나이트>는 인상적인 장면이 아주 많은 영화다. 그 중에서도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와 연관하여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조커가 돈을 불태우는 장면. 세상을 떠난 히스 레저가 배역을 밭은 조커는, 수없이 많은 돈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버린다. 그 장면이 왜 인상적이냐면, 조커라는 악당에게 돈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커에게 돈은 중요치 않다. 그는 돈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원인으로 조커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일까? 이 영화를 살펴보면, 조커가 범죄를 저지르는 원인은 모호하고 불확실하며 혼돈에 휩싸여 있다. 원인이 명확하진 않지만 사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조커. 조커의 범죄를 바라보면, 사회적 욕망이나 편견과 혐오, 이득의 문제, 원한관계등으로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는 과거의 범죄 영화들과 궤를 달리하며, 개인의 욕망이라는 모호한 영역에 발을 내딛으면서 인간의 정신상태를 파고드는 식의 사이코패스들이 등장하는 현재 범죄영화들의 흐름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물론 사이코패스들의 연쇄살인의 원인도 어떻게 보면 명확하다. '죽이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서. 하지만 그냥 '죽이고 싶다'는 욕망은, 사이코패스와 일체화를 시키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욕망이다. 과거의 범죄영화처럼, 보면 누구라도 이해가 되는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와 비교해봐도 그렇다.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인사건은 다 돈과 관련이 있다. 돈이 필요해서, 돈을 얻으려고, 돈 때문에 일어난 범죄를 감추려고. 돈이 물신이 되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원인을 보는순간 바로 이해해버린다. 돈이 인간과 그 외의 모든 것을 먹어버린 시대와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5. 다시 티파니에서 아침을...
1988년은 일본에서 돈이 돈을 낳고, 돈이 인간을 먹고, 인간들이 돈을 먹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던 교쿄라는 등장인물이, 돈의 마력에 취해 값비싼 보석을 소유하기를 꿈꾸던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돈 때문에 끔찍한 범죄가 벌어지는 것도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의 특성을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오직 돈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일이던가. 아무리 돈이 넘치던 시절이라고 해도 돈만이 삶의 모든 것일까.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를 쓴 작가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결말에서 작가는 교코와 시바타 형사의 인간 관계에 돈이 아닌 다른 힘을 부여한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 인간들간의 관계에 희망과 낭만이 있다는 식으로. 이것은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겹쳐진다. <티파니에서 아침을>도 보석에 대한 욕망을 가진 오드리 헵번이 연기하는 몰리가 인간관계에 희망과 낭만을 가진채로 끝난다. 어쩌면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나보다. 그게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 가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