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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의 유산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평점 :

8190.스파이의 유산-존 르 카레
모두 제정신이 아냐. 당신들 스파이는 전부 그래. 당신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멍청한 게임을 하는 멍청이들. 자기가 존나 우주에서 제일 현명한 거물인 줄 알고. 당신들은 아무것도 아냐, 알아? 당신들이 어둠 속에 사는 건, 망할 햇빛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야.(413)
이제야 묵은 빚을 청산할 때가 되었다. 어려운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들을 때가 되었다. 조지, 나의 인간적인 면을 일부러 억압한 겁니까? 아니면 나 역시 부수적인 피해자였나요? 당신의 인간성은 어떻습니까?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이제는 뭐가 뭔지 콕 집어낼 수도 없는, 뭔가 고결하고 추상적인 대의에 밀려서 왜 인간성이 항상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겁니까?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자유의 이름으로 우리가 인간적인 감정을 얼마나 깎아 내면 스스로 인간이라거나 자유롭다는 생각을 더 이상 안 하게 되는 겁니까? 아니면 이제 세계적인 선수가 아닌데도 꼭 세계적인 게임을 하고 싶어 하는 영국병이라는 불치병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겁니까?(430~431)
존 르 카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 건 역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입니다. 제가 이 전설적인 스파이 소설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오래전에 읽은 한 서평 때문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알라딘에서 추리소설 서평으로 이름을 날린 '물만두'라는 블로거의 글을 읽다가,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스파이 소설에 대한 어떤 문장을 접하게 됩니다. 그 글에서 물만두는, 존 르 카레가 써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다보면 스파이는 존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너무 오래전에 읽은 것이라 이 말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대충 의미가 들어맞는다고 한다면, 존 르 카레라는 스파이 소설의 거장은, 스파이가 나오는 스파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글을 통해 스파이를 부정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 스파이가 활약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자 그런 현실에 대한 부정을 자신의 소설을 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너무 흥미로웠습니다. 존 르 카레가 하는 소설쓰기가 일종의 자기 소설의 핵심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의 글쓰기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설의 핵심 주제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글. 이걸 더 확장해보면 자기 소설에 대한 부정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직접 스파이기도 했던 스파이 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는 평생동안 자기가 몸담아온 스파이 세계에 대한 비판과 부정을 스파이 소설을 통해서 시도했던 겁니다. 이 끊임없는 부정을 그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전개시켜 나갑니다. 독자들이 재미에 빠져 읽다보면 어느새 스파이라는 직업이, 스파이의 삶의 현실이, 스파이가 존속되는 정치적인 구조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문제가 있는지를 깨닫는 식으로.
저는 생각해 봅니다. 스파이는 뭐가 문제인가. 스파이의 삶이 왜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스파이가 존재하는 현실은 뭐가 문제인가. 존 르 카레의 소설들을 지속적으로 읽다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떠오릅니다.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읽다보면 저 질문에 대한 답들이 어느 정도 흐릿하게나마 손에 잡힙니다. 그것들을 한 번 써볼께요. 우선 스파이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스파이가 자신의 업무와 연관된 이들을 모두 도구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국가나 한 사회의 시스템의 존속와 안녕, 평화와 질서유지를 위해서 적국이나 다른 나라의 정보를 얻거나 자신들의 정보를 지키기 위한 안보 업무를 담당하는 스파이의 특성상, 인간에 대한 믿음이나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의를 위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인간은 언제나 도구로 쓰이고 버려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대의를 지키거나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만 하면 되니까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의 진실을 50년이 지나 밝혀내는 형식의 책인 <스파이의 유산>만 봐도 이것이 너무나 잘 드러납니다. 믿고 의지하던 동료가 자신들이 계획한 일 때문에 죽어도 스파이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목적이 중요하지 동료의 죽음은 부수적인 일에 불과하니까요. 사랑하던 여인도 참혹하게 살해당해도, 그 살인범이 상관에 의해 이중간첩으로 다시 적국에 돌아가도, 사랑하던 여인의 타살이 자살로 둔갑해도, 스파이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이중간첩을 통한 적국의 정보 얻기가 더 중요하니까요. 이 세계에 인간성이나 인간에 대한 애정,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목적과 대의, 도구로서의 인간만 가득합니다. 이렇게 사는 데 어떻게 인간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을 믿을 수 없고, 인간을 모두 도구로 보는데 익숙한데 어떻게 삶이 피폐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쉽게 존중하지 못하고, 누구도 쉽게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는 삶이 힘들지 않다면 뭐가 힘들겠습니까?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인간답게 대하지 못하는 스파이의 세계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죠. 인간 삶의 측면에서.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스파이의 삶에서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구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스파이의 삶이란, 남을 속이는 삶 그 자체입니다. 남을 속이다 못해 자기 자신도 속이는 경지에 다다라야 첩보 업무를 잘 할 수 있는 법입니다. 거기에 선과 악의 윤리적이고 도더적인 기준이 뭐가 필요합니까? 거짓과 진실의 구분도 마찬가지죠. 미시마 유키오가 쓴 <가면의 고백> 속 화자의 말처럼, 가면을 쓴 삶이 일반화되어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는 삶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삶. 가면 자체가 일반적인 것이 되어버린 삶. 스파이는 가면을 가면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면이 얼굴이 되어버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스파이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으니까요. <스파이의 유산>의 주인공인 은퇴한 스파이 피터 길럼이 과거 사건의 진실을 알려는 이들을 상대로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거짓을 꾸며내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것이 스파이로서 자연스럽다 말해 일상적인 것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그들의 삶은 삶 자체가 거짓인 것처럼 보입니다.
스파이로 사는 건 힘듭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파이의 삶을 무조건 부정할 수 있을까요? <스파이이 부분에서 왜 헤겔이 떠오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전을 너무 읽어서 그런 것일까요?(^^;;) 일단 칸트 철학으로는 스파이의 세계를 표현하기가 부적절하다는 건 확실합니다.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목적으로서 대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의 태도를 꿈꾸는 칸트 철학과 존 르 카레가 그리는 스파이의 세계가 전혀 맞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자기 부정으로서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 존 르 카레의 소설 세계는, 변증법에 기반한 헤겔의 철학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변증법을, 자기정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기부정을 하고, 마지막으로 자기정립과 자기부정을 통합한 다음에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방식의 자기긍정을 행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요. 이 관점에서 보면 존 르 카레는 자기 부정을 하는 방식으로 자기긍정을 하고 있습니다. 스파이를 부정하는 방식의 스파이 소설을 쓰는 스파이 소설가. 자기 삶을 부정하는 방식의 글을 쓰는 소설가. 부정을 통한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자 자기긍정을 이룬 인물. 부정을 통한 긍정. 삶을 부정하다 다시 긍정으로 이어지는 이 지점에서 저는 오묘한 삶의 신비를 본 기분입니다. 소설 세계는 이렇게 긍정으로 분명히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삶은 어떨까요? 인간을 인간으로서 볼 수 없다면 도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자신을 도구로서 보는 삶을 일반화하게 됩니다. 도구로서의 인간 삶에 대한 긍정. 거짓과 진실에 대한 태도 또한 비슷합니다.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없다면 그대로 살면 됩니다. 거짓 자체가 삶이 되는 삶. 그것도 삶일 것이고, 살다보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행복할까요? 그게 좋은 삶일까요? 이런, 이런, 쓰다보니 다시 처음에 나온 글로 이어지네요. 스파이가 존재하지 않는 게 더 좋은 세상이라는 식의.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요? 중국의 고대에 나온 병법서 <손자병법>에도 전쟁에서 세작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스파이가 사라질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스파이가 사라지는 건 불가능할 것입니다. 대신 꿈은 꾸어볼 수 있죠. 스파이들이 존 르 카레 소설에서처럼 비참하게 죽거나 비극적인 삶을 사는 방식으로 되지 않는 것을. 조금 더 안전하고 거짓되지 않게 사는 식으로. 적고보니 이거 순환논법을 하다 이 순환논법이 다시 정-반-합의 변증법이 되는 기분이군요.^^;; 존 르 카레의 스파일 소설을 읽다 변증법으로 넘어 가는 경험은 현재 고전을 열심히 읽고 있는 저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네요. ㅎㅎㅎㅎ 어쩔 수 없으니 여기서 마쳐야겠네요. 그럼 이만.
*쓰다보니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고전을 너무 읽어서 스파이 소설도 이런 식으로 서평을 쓰게 되는 것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