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강의 - 나를 넘어서는 학문
전호근 지음 / 동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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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5.대학강의-전호근

먼저 <대학>이란 책은 다른 사람과의 평화로운 공존에 앞서 개인의 자기 수양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자기 수양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통해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끊임없이 반성하고 촉구하는 과정을 말합니다.(14)

칸트의 그 막막하기 그지없는 어려운 세계를 떠나니 <대학>이라는 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네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대학>이라는 문에 적힌 글자들을 바라봅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음... '대학지도'는 '재명명덕'하며 '재친(신)민'하며 '재지어지선'이니라.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저를 괴롭히던 알 수 없는 세계를 벗어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학>의 첫 구절을 보니 너무 반갑습니다. 다시 익숙한 동네에 돌아온 기분이랄까. <대학> 첫문장이 익숙해지는 이런 날이 살다가 오기는 오는군요.^^ 책의 저자인 전호근 씨의 해석을 한번 따라가봅니다.

'<대학>의 도는 내 안의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온 천하의 사람들이 최고의 선에 가서 머물게 하는 데 있다.'(25)

그래도 몇번 반복해서 읽은 글이라 거부감은 없습니다. 내 안의 밝은 덕을 밝힌다는 명명덕이나 다른 백성들내면 안의 덕을 밝혀서 새롭게 한다는 친(신)민이나(원래 '친민'인데 주희 선생께서 신민으로 고쳤다고 하네요.^^;;) 그 원리를 천하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선에 머무르게 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지어지선이나. 모두 내면의 밝은 덕, 책에 따르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인간 내면의 본성에서 시작합니다. 자기 자신을 올바로 바로잡고 그걸 바탕으로 타인인 백성들을 바로잡고 더 나아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바로잡는 것. <대학>의 이 자신만만하고 가공할 정치적 비전이 가득한 프로젝트를 보니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하지만 저를 더 당황스럽게 하는 건, 이 '삼강령'이 아니라 '팔조목'의 후반부입니다. 그 유명한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는 구절.(뭐 <대학>의 원문은 저렇게 간단하게 쓰여 있지 않지만 너무 유명해서 간편하게 줄여서 한번 써봤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항상 의심스러웠습니다. '저게 가능해?'라면서. 유학 관련 책들을 처음에 읽을 때는 순진하게 저 말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고, 제가 읽은 책들이 쌓여가면서, 믿음은 사그라들고, 믿음이 사라진 차이에는 의구심이 채워졌습니다. 나를 갈고 닦으면 가족까지는 어떻게든 다스릴 수 있다고 칩시다(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국가에도 통할까요? 스케일이 너무 다른데? 사람도 많고 땅도 너무 넓고 제도랑 시스템이 너무너무 다른데, 무작정 수신의 힘으로 국가가 잘 다스려질까요? 천하로 넘어가면 더 말이 안 나옵니다. 국가도 쉽지 않은데 천하라... 사실 저는 이게 믿음에 기반한 주술이나 마법처럼 느껴집니다. 나 자신을 갈고 닦으면 그 힘이 가족과 국가와 천하에까지 퍼질거야. 될지 안될지 모르는데, 된다고 믿으면 되지 않을까. 주술처럼. 마법처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매직'이라는 단어 속에 밀어놓고 지내면서, 동양철학 관련 책들을 제 자신의 머리속에 더 쌓아놓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또다른 앎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마법이라고 생각했던 저 단어가 '주나라' 사람들한테는 특별한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주술이나 마법의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주나라 사람들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삶의 체계이자 믿음의 체계였습니다. 봉건제라는 정치 시스템을 살아가는 주나라 사람들한테는, 수신의 원리와 제가의 원리와 치국의 원리와 평천하의 원리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스케일의 차이가 있는 거죠.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자신들의 봉건제를 지탱하는 것이고요. 공자는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잊어버린 과거 주나라의 예법과 정신을 되살리려 했던 겁니다. 그걸 통해서 그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제압하고 평화의 시기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과거를 현재에 되살려, 현재를 새롭게 만드는 방식으로. 결국,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학의 정치적 비전은 특별한 게 아닙니다. 과거의 잊힌 정치적 가치를 되살려서 현재를 새롭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과거를 오래된 현재로서 되살려내기. 현재를 새로운 과거로서 되살려내기. 그리고 오래된 미래로서의 삶의 조직화. 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유학의 정치적 비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00년이 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학>에서 말하는 유학의 가르침은 통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익숙하면서 낯설고, 낯설면서도 익숙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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