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강의
가토 신로 지음, 장윤선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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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2.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강의-가토 신로

주여, 당신은 위대한 분입니다. 크게 찬미받으실 만합니다.( Magnus es, Domine, et laudabilis valde,33P)

확실한 믿음의 세계

앞에 적었던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이라는 책 속의 세계는 세상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계,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가득한 세계, 누구에게도 구원은 기대할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강의> 속 세계는 정반대입니다. 이 세계는 확실한 믿음이 가득합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 신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 기독교에 대한 확실한 믿음. <고백록>의 저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의 첫 구절부터 자신의 확실한 믿을을 과시합니다. '주여, 당신은 위대한 분입니다. 크게 찬미받으실 만합니다.' 라고 외치며 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면서. '<고백록> 강의'를 진행하는 가토 신로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분들이 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며 강의를 진행합니다. 물론 그 자신도 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죠. 저는 그게 너무 기이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너무나 확고하고 당연해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저 자신이 이상한 인물처럼 여겨졌거든요.^^;;

<고백록>, 신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신에게로 향하는 과정

'<고백록> 강의'를 통해 가토 신로 교수는, <고백론>이 신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신에게로 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책이라고 말합니다. 첫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믿음과 신앙을 열렬하게 고백합니다. 그 다음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기독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으나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 여성에 대한 애욕으로 신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신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으로서. 가토 신로 교수의 말을 따르자면, <고백록>의 구성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신에게서 멀어졌다가 다시 신에게로 돌아오는 과정 자체가 신에 의해 예정된 것이었음을 보여주려 했다는 거죠. 마치 책의 구성 자체가 '예정조화설'을 구현한 것처럼. 신이 모든 것을 예정하고, 그 조화에 맞춰서 자신의 삶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고백한 책이 <고백록>이라는 것처럼.

구원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길과 '장소론'

가토 신로 교수의 글로 쓰여 있는 강의를 읽다보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잠깐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너무 신비하고 낯설어서, 이상한 기분마저 듭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제 삶은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속 세상의 사람들과 비슷했나 봅니다.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하고, 불안에 쉽게 휩싸이고, 불신의 늪이 깊은.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강한 확신과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뭘 믿고 저렇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지? 마치 신이라는 자석에서 잠시 떨어졌나갔다 다시 끌려들어가는 것과 같은 삶을 산 저 인물은, 어떻게 저렇게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삶이 모두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지금의 저로서는 그들의 믿음과 삶의 태도를 알 수 없겠죠. 앞으로 기독교와 저의 인연이 만남으로 이어진다면 알 수 있을까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어설프게 무언가 느껴지기는 합니다. 구원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니까 저럴 수 있다는 식으로. 구원에 대한 믿음을 생각하다가 책 후반부의 '장소론' 이야기가 흥미로워집니다. 사실 기독교 신학에서 기본적으로 '장소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존재이니까요. 절대적이고 완벽한데 무슨 장소론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가토 신로 교수는 굳이 자신만의 '장소론'을 언급합니다. 신과 만나고 대화하며 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전하는 자기 내면의 장소를. 읽다 보니 이해가 됩니다. 절대적이고 완벽한 능력을 가진 건 신이고, 인간은 그런 능력이 없죠. 인간은 신이 아니고, 신과 달리 신과 만나는 저마다의 장소를 내면에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과 만나는 내면의 장소를 '장소론'이라는 학문적 틀에 집어놓고 이론화 하는 건, 중세철학 전공자로서 충분히 가능하고 의미가 있겠죠.

그런데, 다른 길은 없나...

책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너무 낯설고 다르고 이상하고 신비해서 재밌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읽다보니 이번에는 너무 확고하고 확실해서 다른 생각이 듭니다.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그들만의 세상에 있다보니 숨쉬기가 힘들다고 해야하나. 이 세계 사람들이 가진 확고한 믿음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자신들과 다른 삶의 방식이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닐까요? 자신들의 믿음과 사고방식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확고하다는 건, 그 확신과 다른 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잖아요? 저같이 낯선 세계에서 온 인간은 거기에 생각이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계의 사람들만큼의 확신도 없고, 다른 삶의 방식도 경험해봤으니까요. 자, 책을 덮고 다른 방식의 믿음과 연관된 책을 한번 살펴봅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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