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마스다 타다노리 지음, 김은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7996.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그럼 당신은 뭘 했는데? 그 사람을 말리려고 했나?"

"아니요, 저는 참견 안 했습니다. 자살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요."(28)

반드시 써야 할 서평

글을 쓰지 않는 동안, 머릿속으로 계속 어떤 글들을 써야할지 생각했습니다.(저는 책을 읽고 나면 자연적으로 머릿속으로 서평이 떠오릅니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서평을 머리속으로 계속 써왔다고 해야 하나. 그 중에서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서평은 반드시 적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으로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를 쓰면서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됐는데, 이 책의 서평을 어떻게 안 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 마음 속 강박이 떠미는 대로, 제 머릿 속에 들어 있는 가상의 서평을 현실화시켜 보겠습니다.

원피스와 진격의 거인


어린 시절에 저는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드래곤볼>,<슬램덩크>부터 시작한 제 일본 만화 유랑은 <원피스>,<헌터헌터>,<나루토> 같은 책을 거치며 절정에 달했죠. 나이 들어 일본 만화를 예전만큼 보지 않게 되면서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왜 저는 그때 그 만화들에 빠져 살았을까요?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 만화들을 즐겁게 보게 했을까요? 곰곰히 여러모로 생각해봤습니다. <원피스>로 대변되는 그 만화들이 가진 매력을. 생각 끝에 어떤 것이 떠오르더군요. 일단 기본적으로 그 만화들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재미에는 꿈과 희망, 사랑, 우정, 연대, 모험심, 용기 같이 저를 불타오르게 하고 긍정적인 힘으로 인도하는 감정들이 섞여있었습니다. 그 감정들이 만화의 재미와 더불어 저를 만화 속으로 빠져들게 한 게 아닐까요? 힘없는 한 십대 소년이 다른 세상을 꿈꾸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그 만화들이 저를 이끈 게 아닐까요? 여기서 제 생각은 한 단계 더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일본 만화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모든 걸 시대와 상황 탓으로 돌릴 수 없다고 해도, 저는 그때의 일본 만화는 그 시대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후 고도 성장으로 선진국이 된 일본은 1980년대에 버블 경제로 성장의 끝을 찍습니다. <드래곤볼> 같은 1980년대 만화들은 그 성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마찬가지로 버블이 꺼지며 '잃어버린 경제'의 기원이 됐던 1990년대에 시작된 만화들도, 성장이 꺼졌지만 과거의 영향에서 벋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일본인들은 노력하면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중산층 신화'에 빠져 있었습니다. 노력하면 안정적인 직장도 얻고, 결혼도 하고, 집도 가지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노년에는 연금 받고 산다는 그 신화. 1990년대 초반이나 중반까지는 그 신화가 아직 신화가 아니었죠. 어느 정도는 가능했으니까요. 저는 <원피스> 같은 모험 만화가 일본 전후의 고도 성장과 1990년대까지 남아 있었던 고도 성장의 영향에서 태어난 만화처럼 보여집니다. 노력하면 가능했던 시대의 영향, 꿈과 희망을 품으면 어느 정도 그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던 시대의 영향.

시간이 흘러 저는 만화에 관심없이 2010년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친구의 추천으로 만화 <진격의 거인>을 보게 됐죠.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동시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이 만화를 읽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거인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한 인간들의 사투를 그린 <진격의 거인>은 제가 생각하는 일본 만화와 너무 달랐습니다. 꿈과 희망은 없고, 오직 생존 또 생존밖에 없는 만화의 분위기에 놀란 것이죠. 어떻게 이런 만화가 인기를 얻을 수 있지? 저는 다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생각 끝에 <원피스> 때와 똑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죠. 이 만화의 탄생과 인기도 그 시대의 영향일 수밖에 없다는. 2010년대는,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 경제의 불황이 만성화되어 잃어버린 20년을 넘어 30년으로 간다는 소리가 일본내에서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2010년도 초반의 일본 경제는, 제로 금리에 가까운 초저금리에 정부가 돈을 쏟아부어도, 경제 자체에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상태에서 저성장이 지속되는 불황의 늪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지속되는 저성장, 무너져가는 중산층, 심각해지는 양극화, 사라져가는 평생 고용의 신화, 늘어만가는 임시직, 청년 취업의 어려움... 이런 일본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중산층 신화가 사라질 수밖에 없었죠. 당연하게도 그 시대의 일본인들이 과거와 같은 꿈과 희망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테고요. 당시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건 꿈과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현실에서의 생존이었습니다. <진격의 거인>과 시대의 연결점이 보이지 않나요?^^ 결국 그 시대에 인기 있는 문화 컨텐츠는 필연적으로 그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피스>와 <진격의 거인>만 봐도 그게 증명이 됩니다. <진격의 거인>을 읽고 떠올린 이 생각은 다른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진격의 거인>처럼 그 시대의 삶이 반영된 문학은 없는가?'라는.


고성장 신화가 무너진 시대의 불안을 먹고 자란, 추리 소설 작가 소네 게이스케

당연히 그 시대의 삶을 반영한 작가들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작가는 '소네 게이스케' 였습니다. 제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과 불안의 심리' 였습니다. 2000년도 후반에 출현한 이 작가는, 만성화된 저성장과,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 과거의 고성장 신화가 파괴된 시대상을 작품에 강력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저성장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저성장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사회도 그에 따라 변화해갑니다. 자산 규모는 줄어들고, 고용의 안정성은 떨어지고, 미래의 모습을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 거기에 꿈과 희망이 있을까요? 꿈과 희망이 없어진 자리는, 순간순간의 생존에 대한 욕망이 차지합니다.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남을 신경쓸 필요가 있나요? 이타적 행위, 이상, 공공선에 대한 믿음이 뭐가 중요한가요? 내가 제일 중요한데. 당연히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불신은 당연한 게 되고, 불신 때문에 불안은 가중됩니다. 소네 게이스케가 그리는 소설 속 세계가 그렇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기에, 누구도 안심할 수 없기에, 누구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사건들의 세계. 그 어두움에서 생겨나는 '즐거움'이 이 작가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는 이야기의 힘의 근원입니다. 그게 즐거울까 싶기도 하겠지만, 읽다보면 그 어두움에서 생겨나는 이야기의 힘과 나름의 즐거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을 읽다보니, 소네 게이스케 소설들이 떠오르더군요. 비슷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세계',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세계'의 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물론 이 소설은 소네 게이스케의 소설과 다릅니다. 소네 게이스케 만큼의 극단성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 소설은 차근차근 상황을 전개시키는 방식으로 충격의 강도를 더해나갑니다. 근데 그게 소네 게이스케 만큼의 극단성은 아닐지라도 충분치 충격적이고 놀랍습니다. 친구들과 술마시고 나와 홧김에 외친 발언으로 자살자의 죽음을 초래한 한 평범한 가장의 비극, 대입에 실패하고 파트 타임 공장일을 하다 묻지마 범죄의 범인으로 억울하게 몰린 청년의 비극, 과거의 범죄가 저지른 삶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남자의 파멸,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연의 우연 때문에 범죄에 연관되는 여인의 이야기가 그려진 이 소설집은 충격의 연속입니다. 마치 작은 충격들을 쌓고 쌓아 하나의 미스터리한 삶을 구성하는 느낌이랄까. 이 충격의 근원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같은 세상의 악몽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사회에 대한 이상이 살아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짜증이 났다고 해도 '떨어지라'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인간간의 신뢰가 살아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파트 타임 일을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쓰레기, 버러지 취급을 하며 증거도 없는데 범죄자로 몰아갈 수 있겠습니까? 물론 어떤 사회라도 예외적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세계에서는 그게 예외가 아닙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소설 속 세계의 사건이 벌어지고 비극이 벌어집니다. 예외가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기에 벌어지는 범죄와 비극이 이 소설의 메인테마입니다. 근데 이게 소설 속 세계만의 일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런 일들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금의 우연성과 극단성을 뺀다면.

조금 다른 상상, 신이 있었다면...,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이 현실로 일어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다, 갑자기 다른 상상으로 넘어갑니다. 제가 의도한 건 아니고(^^;;), 머릿속에서 불현듯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한다는 건, 사람들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일 수도 있잖아? 사회에 대한 믿음의 부족, 미래의 꿈과 희망에 대한 믿음의 부족... 그런 믿을을 채워주는데 신만큼 강력한 존재가 없잖아? 기독교도도 아닌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긴데 ㅋㅋㅋ 웃긴만큼이나 뭔가 말도 안되는 설득력이 저한테 느껴졌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은 신을 믿지도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신의 영향력이 1도 없는 세계의 소설입니다. 그건 구원 없는 삶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기에 '구원에 대한 믿음'을 집어넣어 버리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저는 다른 책을 집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추신.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

이 서평을 씀으로서 속이 뻥 뚫린 기분입니다. 무언가 막힌 부분이 뚫린 느낌. 보르헤스의 단편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이 생각납니다. 이 서평을 쓴 게 저 단편 제목에 나오는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연 것처럼 느껴지네요. 끝없이 이어지는 책의 미로 속에서 헤매는 무한한 서평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해야할까요? 그래서 추신 제목에 원래 단편 제목에는 없던 '끝없이'라는 말을 덧붙여 봤습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불가능하더라도 한 번 꿈은 꿔보겠습니다. 무한 서평의 꿈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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