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저는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드래곤볼>,<슬램덩크>부터 시작한 제 일본 만화 유랑은 <원피스>,<헌터헌터>,<나루토> 같은 책을 거치며 절정에 달했죠. 나이 들어 일본 만화를 예전만큼 보지 않게 되면서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왜 저는 그때 그 만화들에 빠져 살았을까요?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 만화들을 즐겁게 보게 했을까요? 곰곰히 여러모로 생각해봤습니다. <원피스>로 대변되는 그 만화들이 가진 매력을. 생각 끝에 어떤 것이 떠오르더군요. 일단 기본적으로 그 만화들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재미에는 꿈과 희망, 사랑, 우정, 연대, 모험심, 용기 같이 저를 불타오르게 하고 긍정적인 힘으로 인도하는 감정들이 섞여있었습니다. 그 감정들이 만화의 재미와 더불어 저를 만화 속으로 빠져들게 한 게 아닐까요? 힘없는 한 십대 소년이 다른 세상을 꿈꾸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그 만화들이 저를 이끈 게 아닐까요? 여기서 제 생각은 한 단계 더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일본 만화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모든 걸 시대와 상황 탓으로 돌릴 수 없다고 해도, 저는 그때의 일본 만화는 그 시대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후 고도 성장으로 선진국이 된 일본은 1980년대에 버블 경제로 성장의 끝을 찍습니다. <드래곤볼> 같은 1980년대 만화들은 그 성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마찬가지로 버블이 꺼지며 '잃어버린 경제'의 기원이 됐던 1990년대에 시작된 만화들도, 성장이 꺼졌지만 과거의 영향에서 벋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일본인들은 노력하면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중산층 신화'에 빠져 있었습니다. 노력하면 안정적인 직장도 얻고, 결혼도 하고, 집도 가지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노년에는 연금 받고 산다는 그 신화. 1990년대 초반이나 중반까지는 그 신화가 아직 신화가 아니었죠. 어느 정도는 가능했으니까요. 저는 <원피스> 같은 모험 만화가 일본 전후의 고도 성장과 1990년대까지 남아 있었던 고도 성장의 영향에서 태어난 만화처럼 보여집니다. 노력하면 가능했던 시대의 영향, 꿈과 희망을 품으면 어느 정도 그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던 시대의 영향.
시간이 흘러 저는 만화에 관심없이 2010년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친구의 추천으로 만화 <진격의 거인>을 보게 됐죠.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동시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이 만화를 읽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거인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한 인간들의 사투를 그린 <진격의 거인>은 제가 생각하는 일본 만화와 너무 달랐습니다. 꿈과 희망은 없고, 오직 생존 또 생존밖에 없는 만화의 분위기에 놀란 것이죠. 어떻게 이런 만화가 인기를 얻을 수 있지? 저는 다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생각 끝에 <원피스> 때와 똑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죠. 이 만화의 탄생과 인기도 그 시대의 영향일 수밖에 없다는. 2010년대는,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 경제의 불황이 만성화되어 잃어버린 20년을 넘어 30년으로 간다는 소리가 일본내에서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2010년도 초반의 일본 경제는, 제로 금리에 가까운 초저금리에 정부가 돈을 쏟아부어도, 경제 자체에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상태에서 저성장이 지속되는 불황의 늪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지속되는 저성장, 무너져가는 중산층, 심각해지는 양극화, 사라져가는 평생 고용의 신화, 늘어만가는 임시직, 청년 취업의 어려움... 이런 일본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중산층 신화가 사라질 수밖에 없었죠. 당연하게도 그 시대의 일본인들이 과거와 같은 꿈과 희망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테고요. 당시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건 꿈과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현실에서의 생존이었습니다. <진격의 거인>과 시대의 연결점이 보이지 않나요?^^ 결국 그 시대에 인기 있는 문화 컨텐츠는 필연적으로 그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피스>와 <진격의 거인>만 봐도 그게 증명이 됩니다. <진격의 거인>을 읽고 떠올린 이 생각은 다른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진격의 거인>처럼 그 시대의 삶이 반영된 문학은 없는가?'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