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59.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제임스 설터
나의 내면에는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440)
'제임스 설터'하면 떠오르는 건, '작가들의 작가'나 '스타일리스트'라는 단어들입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딘가에서 들은 저 단어들로만 유추해보면 '제임스 설터'는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지만 작가들에게 인정받는 작가이자 유행에 휩쓸리지 자신만의 특정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작가처럼 보입니다. 글이 쉽게 읽히지 않을 거라는 예측도 가능하고요. 그런데 실제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글이 어렵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글이 쉽게 읽히고, 어려운 부분은 별로 없습니다. 토니 모리슨이나 살만 루슈디 같은 작가들처럼 혼란스럽고 뒤섞인 글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존 밴빌처럼 문장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채우는 것도 아니고, 조르주 페렉처럼 실험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무엘 베케트처럼 부조리함 가득한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지도 않습니다. 제임스 설터는 묵묵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써내려갑니다. 자신만의 문학적인 방식으로요.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은 작가 사후에, 작가의 아내가 발견한 상자에서 발견한 글들을 기반으로, 그 중에서 '최고의 것들'을 모아서 출판한 책이라고 합니다. 형식은 인터뷰나 칼럼 같이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섞여 있고, 소재도 문학,군대,영화,스키,등반 같이 다양한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강하게 느낀 건, 이 책의 글들이 20세기를 담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향수를 간직한 채 잊혀지고 스러져간 그 20세기의 삶의풍경들. 작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낸 20세기의 풍경들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제목처럼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의 풍경, 체취, 실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키로 유명한 마을인 아스펜의 풍경, 20세기를 풍미했던 스키선수들의 모습과 그들의 열정,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노력으로 위험을 무릎쓰고 산을 오르는 20세기 등반가들, 작가가 사랑한 이사크 바벨 같은 20세기 문인들, 작가가 겪은 군대 시절의 모습, 프랑스에서의 경험들 까지, 이 책은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며 책을 읽는 독자들을 20세기의 향수에 취하게 만듭니다.
1925년에 태어나 2015년에 세상을 떠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20세기에서 보낸 작가는 '20세기의 인간'일 수밖에 없고, 20세기의 인간이 20세기의 삶의 모습을 실감나게 되살려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저한테 20세기의 풍경은 너무 인상적입니다. SNS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휴대폰도 없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특정한 도구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야 했던 시대의 풍경은 21세기 보다 더 인간 냄새를 강하게 풍기면서 제 안에 간직하고 있었던 20세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니까요. 어쩌면 제임스 설터는 사라진 것들, 스러져간 것들을 글로 써서 남김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 또한 되살려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게 글이 가진 강력한 힘이자 작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