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캐너 다클리 필립 K. 딕 걸작선 13
필립 K.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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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6.스캐너 다클리-필립 K. 딕

"아직 당신 친구야."

도나는 격하게 대꾸했다. "부서진 잔해일 뿐이야."(411)

필립 K. 딕 하면 우선 떠오르는 건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입니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저도 영화를 생각하면서 그의 소설들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뭔가 다른데'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느낌이랑 너무 다른 면이 있어서요. 각 영화마다 분위기가 다른 점이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일반화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 동안에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영화의 특성상, 영화들이 SF적인 스토리텔링이나 시각효과에 중점을 두는 것에 비해, 필립 K. 딕의 소설들은 스토리텔링 보다 작가의 스타일에 더 집중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대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에다, 대화 속에 묵직하고 의미있는 철학적인 주제들이 들어가 있고, 환상과 현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그만의 스타일.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 게 약물입니다. 약물 중독에 시달린 삶을 살았던 저자답게 그의 소설은 약물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실제적으로 약물이 책 속에 등장할 때도 있고, 약물이 나오지 않아도 약물의 느낌이 나는 식으로. 다른 말로 딕의 SF는 '사이키델릭'한 느낌이 강합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스캐너 다클리>는 딕의 소설 중에서 가장 약물에 천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책을 펼치면 처음에 나오는 '등장 약물 소개'부터 이미 이 책의 약물 포스는 장난이 아닙니다. 약물을 다루는 단어들을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책에서 약물은 알파이자 오메가일 수밖에 없죠. 하지만 약물 못지않게 책을 강하게 뒤덮고 있는 건 딕의 스타일입니다. 인물 간의 대화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철학적이고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와 어구들, 이게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불안과 불확실함의 반영 같은 딕의 스타일은 이 소설을 딕만이 쓸 수 있는 소설로 만듭니다. 실제 약물 중독과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재활 치료의 경험을 반영한 이 소설은, 그렇게 약물 소설이자 딕의 소설이 됩니다.

제가 이 소설에 흥미롭게 본 부분은 이 소설이 성장소설의이 '거울상' 같다는 점입니다. 성장소설이 뒤집힌 형태라고 할까. 일반적으로 성장소설은 주인공이 어떤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원래 상태에서 어떤 식으로든 성장해서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지만 이 소설은 그것의 반대입니다. 소설의 처음에, 주인공인 비밀 요원 프레드는 소설에서 가장 멀쩡한 상태로 등장합니다. 그는 경찰이지만, 밥 아크터라는 가명으로 마약상을 하며 신종 마약 'D물질'의 공급원을 뒤쫓고 있습니다. 일종의 잠입요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죠. 약물중독이 일상화되어 있고, 약을 공급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만의 최선을 다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D물질'을 수시로 접하며 약물중독자가 됩니다. 상부의 명령으로 그는 상부가 주목하는 이의 삶을 상부가 몰래 설치한 홀로스캐너로 관찰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상부에서 그에게 관찰하라고 명령한 이가 바로 '밥 아크터'라는 점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홀로스캐너로 관찰하고 보고해야 합니다.자신을 관찰하면서 그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상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진짜 자신은 약물중독으로 삶이 파괴되어가고 있었던 것이죠. 이 소설은 그 과정을 통해 멀쩡한 인물이 약물 중독으로 인해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가장 정상적이고 멀쩡한 상태에서 시작한 그의 모습은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파괴되어 갑니다. 인지 능력이 약화되는 것부터 해서 뇌가 서서히 무너져가다가 자기 자신을 잃는 식으로. 가장 좋은 상태에서 가장 최악의 상태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소설의 형식은 '성장소설'의 반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락의 소설이자 약물 중독으로 인한 자아상실을 보여주는 소설.

약물 중독을 통한 몰락의 과정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 소설이 오직 약물중독에 매달린 약물 소설인 것만은 아닙니다. 소설은 프레드의 경찰 동료로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프레드의 약물 중독을 방관한 이가 프레드의 몰락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를 돕기 위해 나서는 것도 보여줍니다. 그 사람을 통해 프레드가 있는 치료소에 가서 프레드를 돕는 다른 요원의 모습도 있죠. 대화 중간중간에 나오는 묵직하고 철학적인 고찰이나 무게감 있는 문장들은 이 소설을 오직 약물의 굴레에만 매이지 않게 해줍니다. 약물을 떠나서, 저는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면 이 소설에 존재하는 이상한 따스함을 감지해냅니다. 비록 약물로 인해 파괴됐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꿈꾸는 따스함. 아마도 그건, 약물중독으로 인한 고생하던 작가 자신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의 반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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