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이처 소나타 똘스또이 클래식
레프 톨스토이 지음, 김경준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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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2.크로이처 소나타-톨스토이

평생을 한 남자 또는 한 여자만 사랑한다는 건,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마치 양초 한 대가 영원히 꺼지지 않고 불을 밝혀 줄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겁니다.(27)

남편과 아내는 겉으로는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무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두 달 째부터 이미 서로를 증오하게 되고 헤어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도 그냥 사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끔찍한 지옥이 사직되는 거지요.(29)

진정한 타락이라는 건 말입니다, 육체적 관계를 맺은 여자에게는 윤리적인 처우를 해 줄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짓입니다.(34)

여자들은 남자들이 숭고한 감정에 대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는 걸, 남자들이 필요로 하는 건 몸뚱이 하나뿐이라는 걸,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은 온갖 추잡한 짓을 일삼고 여자는 용서해도 꼴사납고 촌스럽고 추한 옷을 입은 여자는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겁니다.(49)

우리는 같은 쇠사슬에 묶여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서로를 독으로 중독시키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애써 보지 않으려 하는 두 명의 죄수였습니다.(107)

원래 음악이란 거 자체가 끔찍한 거지요. 그게 뭡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음악이 뭡니까? 음악이 뭘 만들어 낼 수 있죠? 음악이 뭔가를 만들어 낸다면 도대체 왜 그런 걸 만들어 내려는 거죠? 흔히들 음악은 정신을 고양시켜 준다고들 합니다만 다 헛소리고 거짓말입니다! 음악이 하는 거라곤 끔찍함을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음악은 저의 정신을 조금도 고양시켜 주지 않죠. 정신을 고양시켜 주지도, 그렇다고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흥분만 돋을 뿐이죠.(149~150)

정말로 끔찍한 게 뭔지 아십니까? 제가 하등의 의심도 없이 아내의 몸에 대한 소유권이 오롯이 저에게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제 몸도 아닌데 말이죠. 게다가 아내의 몸을 소유할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아내의 몸은 제가 소유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아내는 본인 마음대로 자기 몸을 쓸 수 있는 거 아닙니까?(168)

저번에 <신채호&함석헌> 서평을 쓰면서, 저는 비록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도 해도 현재에 충분히 도움이 된다면 그 유효성이 있고 그것을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맞는 말이죠. 철지난 과거의 것이라도 해도 현재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여 쓸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해보면 철지난 '시대착오적'인 것으로서 현재의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되는 과거의 것을 굳이 지금 이 시대에 받아들여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도 맞죠. 괜히 과거의 잘못된 것들을 받아들여 현재의 잘되고 있는 점을 버리면서까지 과거로 돌아가는 퇴행적 행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의 것으로서 현재에 쓰이기 어려운 시대착오적인 것은 과거라는 시대의 틀속에 묻어버리고 놔두면 됩니다. 그게 가장 좋은 행동일 겁니다.

<크로이처 소나타>는 지금 다시 쓸 수 없는 과거의 유산 같은 소설입니다. 이 책에는 톨스토이 말년의 기독교적 금욕주의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성욕을 적대시하고, 섹스를 경계하며, 피임과 그에 관련된 근대과학을 불신하고, 낭만적 연애를 싫어하고, 성과 성관계와 그것을 둘러산 그 시대 러시아의 가치관을 맹렬히 비판하는. '성욕'이라는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을 불신하고, 그것 때문에 남녀관계의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하며 사랑과 결혼과 섹스와 성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 소설을 표현하는데 '시대착오적'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말이 어디 있을까요? 저자인 톨스토이는 소설로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다 못해 '에필로그'를 덧붙이며 자신이 생각하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는 일단 먼저 '금욕'을 주장하고(^^;;) 그 다음으로는 기독교에 기반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농민상이 할만한 순수하고 서민적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아니, 성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그것을 강제로 억제한다고 해서 남녀 사이의 문제가 다 해결됩니까? 사랑을 오직 정신으로만 해야하는 겁니까? 육체를 통한 사랑도 남녀간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나온다면 그것 또한 사랑인데 부정할 이유는 뭡니까? 도대체 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악마화해서 없애버려려는 겁니까? 주류적인 역사 해석에 따르면 1990년대에 공산권이 붕괴한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인위적으로 제어하려고 해서라는데, 그렇다면 이 책에서 톨스토이가 주장하는 금욕주의도 몰락한 공산권 국가들이 행한 것처럼 너무 억압적인 것이 아닐까요? 소설을 읽다가 온갖 반론이 떠올라서 힘들었습니다. 역시 지나가버린 낡은 것은 낡은 것으로 봐야겠습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 황당한 면이 많아서요.

그런데, 이런 낡은 생각으로 가득찬 이 소설이 그냥 '낡은 것'으로만 치부되는 의미 없는 책일까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책에서 말하는 저자의 주장에 있지 않고, 문학적인 섬세한 심리 묘사에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한 인간의 내면의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그려내고 있습니다. 읽은 것만으로도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다 파악할 수있고, 내면의 심리적 변화과정을 세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질투심에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의 몰락해가는 내면 풍경을 섬세하고 꼼꼼하게 그려내면서, 톨스토이는 인간이 어떻게 파멸하고 몰락해가는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마치 오셀로가 질투심에 서서히 사로잡혀 데스데모나를 죽이는 과정의 심리적 변화과정을 톨스토이식으로 풀어낸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문제는 오셀로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의 결정적인 원인이 이아고라는 외부의 악한 인물에 있다고 한다면, <크로이처 소나타>의 주인공 뽀즈드느이셰프에게는 내면의 '성욕'이 '악'에 해당한다는 점입니다. 성욕의 악마화와 금욕의 강요만 아니라면, 이 소설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걸 견디는 게 쉽지는 않겠죠. 앞으로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읽으려면 그걸 잘 견뎌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의 '낡음'을 더욱 더 잘 견디는 미래를 그리며 이제 이 글과 이 책의 독서과정 자체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뵙도록 할께요. 그럼 이만.

*참, 톨스토이의 이 소설과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복잡한 면이 있어서 이 글에서는 하지 않겠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하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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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4 08: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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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5 2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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