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사랑 이탈로 칼비노 전집 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814.힘겨운 사랑-이탈로 칼비노

군복의 천가 실크를 사이에 두고 마치 상어들끼리 가볍게 스치듯이 군인의 다리가 부드럽게 찰나적으로 움직여 여인의 다리에 닿았고, 그는 자신의 혈관의 파동을 그녀의 혈관으로 보내듯 움직였다.(10~11)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발코니들이 많은 높은 건물에 에워싸인 넓은 뜰이 보였다. 하지만 뜰은 사막처럼 황량했다. 지붕들 위로 보이는 하늘은 이제 맑지 않고 희끄무레했으며 불투명한 녹청색 서서히 하늘을 뒤덮었다. 그처럼 녜이의 기억 속에서도 불투명한 흰빛이 감각의 기억들을 하나씩 지워가고 있었다. 태양은 무딘 통증처럼 선명하지 않았으며 정지된 작은 빛의 자국 같았다.(57)

생생함을 자연스레 포착한다는 스냅 사진을 좋아하는 취향이 자연스러움을 죽이고 현재에서 멀어지게 만들어. 사진에 찍힌 현실이 곧 시간의 날개 위로 달아난 기쁨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지. 그제 찍은 사진일지라도 기념의 성격을 띠게 된다고.(64)

페이지 표면 그 너머에서는 이쪽 세계의 삶보다 훨씬 더 삶다운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고운 모래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반은 동물이고 반은 식물인 존재들이 사는 초록빛이 감도는 푸른 바다 세계와 우리를 갈라놓는 수면처럼.(98)

어둠이 바닥이 없는 땅이어서 그는 아무리 땅을 파도 지칠 줄 몰랐다. 거리에서 마침내 노란 불빛이 켜진 네모난 창문들이 여기저기 난 집들 위로 눈을 들어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별들이 깨진 달걀처럼 으스러져 하늘에 흩어져 있는 게 아니라 날카로운 빛으로 꽂혀 그 주위에 무한한 공간을 열어 놓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17)

사실 모든 침묵은 그 침묵을 에워싼 미세한 소음들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다.(142)

중요한 것은 여타의 것들을 모두 사라지게 내버려 둔 채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실만 전달하고 우리 자신을 본질적인 의사소통으로,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는 반짝이는 신호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복잡한 우리 개성과 상황과 얼굴 표정을 지워 버리고 전조등들에 의해 모습을 감추는 어둠 속에 남겨 두어야 한다.(166)

칼비노의 소설은 환상과 비현실, 실험들로 가득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세계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칼비노의 소설을 볼 때면 그가 어떤 독특하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지 기대합니다. 그런데 <힘겨운 사랑>은 느낌이 달랐습니다. <힘겨운 사랑>에 펼쳐진 칼비노의 소설 세계는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였습니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당혹스러울 정도로.

<힘겨운 사랑>에서 칼비노는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 찾아온 새로운 변화의 경험을 디테일하고 촘촘하게 묘사합니다. 너무 디테일하게 묘사해서 마치 의사의 손에 인간의 정신이 해부되어 거린 것처럼. 기차에서 미망인과의 사소한 피부 접촉에 망상을 품은 군인, 바닷가에서 헤엄치다 속옷을 잃어버린 부인, 낯선 여인과의 하룻밤의 경험 때문에 설레어하는 회사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가는 기나긴 기차여행을 견디는 남자... 이들 모두는 칼비노의 손 끝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세밀하게 드러내며 도시인들의 사랑이 얼마나 힘겨운지, 원자화되고 파펴환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갑자기 찾아온 낭만적이고 새로운 경험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지를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삶에 빠져서, 자신만의 개인적인 원안에 틀어박혀서 자신에게 찾아온 새로운 경험을, 사랑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삶의 일반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에게 사랑은 힘겨운 일입니다. 적고 나니 서글퍼지네요. 사랑이 힘겹다니. 그래도 부정하지는 않으렵니다. 힘겨운 것을 힘겹지 않다고 속이는 것은 공허한 일일 테니까요. 날카로운 관찰자의 시선으로 일상을 헤부하며 그 안의 세세한 디테일을 잡아내는 칼비노의 현실적인 소설이 빚어내낸 쓸쓸한 감성 앞에서 다짐을 해봅니다. 그것이 힘겹더라도 포기하지는 않겠다고요. 내게 찾아온 사랑을 힘겹더라도 놓치지 않겠다고요. 그게 칼비노가 바라는 것일 테고, 저 자신도 거기에 동의하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