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민자들-W.G.제발트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꺼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183)

제발트의 소설 <이민자들>은, 제발트의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사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듭니다. 사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를 함에도, 분명히 허구의 이야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자신이 '사실이다'라고 버젓이 주장합니다. 다양한 사실에 기반하고, 진짜 사실인 듯한 '사진'을 내세우면서. 따라서 책을 읽는 독자는 이 소설이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책을 읽을 때에는 그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읽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들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이 책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사실인듯한 허구, 사실과 가상의 경계를 헤메다 책밖의 현실로 나온 독자들에게, 이 허구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사실보다 더 깊숙하게 몸안에 현실의 모습들을 새겨지게 만듭니다. 사실 같은 허구의 이야기로 독자의 몸안에 깊은 현실성을 새겨넣은 힘. 저는 이것이 제발트 소설의 매력이자 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민자들>도 제발트 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고향이라는 뿌리에서 벗어나 낯선 땅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서글프고 가슴 먹먹하며 고뇌가 어린 삶을, 제발트는 철저하게 사실에 기반한듯한 형식과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어조로 그리고 있습니다. 제발트에 의해 그들의 삶은 단순히 '이민자들'이라는 네 글자로 표현된 보통명사적인 삶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있는, 보통명사와 일반화로 규정된 삶이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이고 개체성을 지닌 고유명사적인 삶이 됩니다. 다른이들과 같은 삶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삶. 그 독자적이고 고유한 삶의 형상들을 읽어갈수록 독자인 우리는 그들의 삶에 공감하거나 동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민자들'에 등장한 독자적인 이민자들의 삶은 우리의 독서 체험을 통해서 다시 우리의 몸으로 들어오면서 보통명사화 됩니다. 각 개인의 삶에서 우리 모두를 포괄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고유명사화된 삶이 다시 보통명사화된 삶이 되는 과정으로서의 독서. 하지만 이 때의 과정은 앞의 과정과는 다릅니다. 책을 읽는 독자인 우리가 그들의 삶을 생생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압니다. 그들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제발트 소설이 일깨워주는 삶의 진실 앞에서 저는 그래서 제발트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게 제발트 소설의 힘이겠죠. 여기서 저는 더 파고들어가 봅니다. 제발트 소설의 힘이라는 게, 어쩌면 강력한 윤리성을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입으로만 옳고 그르니를 떠드는 형식적인 윤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한 개인의 삶의 형상을 보여주는 체험을 통해, 개인의 삶에 공감하면서 형성되는 '그 무엇'이 진짜 강력한 윤리가 아닐까? 단순히 한 문장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을 철저하게 공감하게 만드는 '공감의 윤리'야말로 진정 강력한 윤리가 아닐까? 저는 그게 소설이 할 수 있는, 문학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제발트의 소설은 소설과 문학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윤리에 가닿아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제발트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그 최대한의 윤리에 가닿으면서 생겨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민자들>을 읽다가 이 정도까지 생각이 나네요. 나중에 혹시 제발트 소설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다면 더 파고들어가서 생각을 보충하여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은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