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서노트 7640.종이 동물원-켄 리우

'(미국에서) 유색 인종 작가의 글은 오로지 자전적 고백일 때에만 가치 있는 것으로 대접받습니다. 저는 그런 분위기를 거스르고 싶어서, 처음에는 제가 물려받은 중국 문화와 관련된 것은 무조건 피하려고 했습니다. 전혀 중국적이지 않은 서양적 글쓰기를 지향했던 겁니다. 그 결과는 끔찍이도 답답했습니다. 그건 입의 절반이 테이프로 막힌 채 말하는 것, 몸의 절반이 마비된 채 춤추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p.561)

나는 내 감정을 뒤흔들고 휩쓸면서 나를 흥분시키고 내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이야기에 끌린다. 아니, 끌린다는 말은 내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홀려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홀려있다. 나는 언제라도 홀린채로 이야기 속에 빠져들에 이야기의 바다에서 헤맬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는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쓰며 평생을 보낸다. 그것은 기억의 본질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무감하고 우연적인 우주를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한 습관에 '이야기 짓기의 오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의 일면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 속에 있는 은유를 좀 더 선명하게 구현할 뿐이다.'(p.7~8)

이야기에 홀려 있는 인간인 내가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을 놓칠리가 있겠는가? 사실 이 책을 선택한 건 내가 아니다. 이 책이 나를 선택했고, 나는 책의 선택에 따라 책을 읽었을 뿐이다. 책의 선택에 따라 책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된 독자인 나는, 켄 리우가 펼쳐놓은 이야기의 흐름에 빨려 들어가서 헤맬 수밖에 없었다. 흥분과 즐거움과 슬픔과 안타까움과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지닌채로.

'오랫동안 잊으려고 애썼던 언어나 개네 돌아왔고, 그 말들이 내 안에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내 살갗을 뚫고, 내 뼈를 뚫고, 결국에는 내 심장을 꽉 움켜쥘 때까지.''(29~30)

SF적이고 판타지적인 상상력을 토대로, 미국에서 살아가는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과 그에 따라 파생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부어넣고, 작거 자신이 삶에서 길어올린 것들과 생각한 것들,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섞어서 이야기를 만들면 <종이 동물원>이 된다. 물론 말이 쉬울 뿐이다. 저것들을 다 섞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켄 리우는 해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신과 나, 우리는 서로 다르고, 우리가 지닌 의식의 특질도 우주 양 끝의 두 별만큼이나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내 사유가 문명의 미로를 지나 당신의 정신에 닿는 기나긴 여정에서 번역을 거치며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나는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리라 믿고, 당신은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우리 정신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닿는다. 비록 짧고 불완전할지라도.

사유는 우주를 조금 더 친절하게, 좀 더 밝게,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런 기적을 바라며 산다.'(p.9)

<종이 동물원>을 읽는 동안 행복했다. 이야기에 홀려 있는 인간의 쾌락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기에. 재미의 끝에서 글 한 편을 끄적이는 게 그나마 내가 느낀 행복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라고 중얼중얼 늘어놓을 수 있겠지만, 그런 건 내가 경험한 행복에 비하면 옳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저 나는 내가 느낀 행복에 따라 작은 감정의 편린들을 기록할 뿐이다. 분석이나 비평과는 거기를 두고. 난 그렇게 '감상문'으로 다시 행복하게 회귀한다. 빠져나올 수 없는 이야기이 미로 속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