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언론,방송,학계를 넘나들며 전방위적 활약을 펼치고 있는 대만의 지식인 양자오는 10년는 시간동안 동서양 인문고전 강의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1년 이후로 중국 고전에 관련된 강의를 하는 와중에 <논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읽어내고, 그 강의의 흔적을 책으로 펴낸 <논어를 읽다>를 읽다보면, 정확한 연관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양자오의 <논어> 독법이 <집 잃은 개> 이후로 새롭게 불어닥친 공자와 논어 해석의 흐름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신성한 공자, 진리의 확성기로서의 공자, 진리를 담은 책으로서의 <논어>를 거부한다. 그에게, 공자는 우리처럼 울고 웃고 화내는 존재로서 제자들과 인간적 관계를 형성하고, 차별 없이 제자들을 대하고 가르쳤으며, 온갖 실패와 좌절에도 자신만의 복고적 이상을 죽을 때까지 추구한 매력적인 인간이다. 논어는 그 인간적인 매력을 잘 찾아낼 수 있는 텍스트일 뿐이다.
<논어>는 글자 수가 많은 책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많지 않은 내용 안에 뜻밖에도 완전히 똑같은 구절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아마도 처음에 자료를 수집할 때 실수로 똑같은 내용을 중복해 기록하여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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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논어>는 오랜 세월에 걸친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어떤 통일된 기준에 따라 장이 배열되었는지 믿을 만한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겉모양으로 보아 <논어>는 제자들이 각자 갖고 있던 기록을 모은 것으로서, 그중 누구도 편집의 권한을 독점하지 못하여 그렇게 무질서한 형태로 배열된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더 안심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논어>를 의도적으로 고치고 날조했다면 가장 혼란스러워 보이는 배열부터 손을 대어 더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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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경전입니다. 다른 상고 시대 경전을 읽을 때처럼 후대에 날조되고 삽입된 내용이 혹시 없는지 경계하며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며 읽을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편찬자가 명확한 순서와 체계를 표시해 두지 않았으므로 그 혼란한 문구들이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 스스로 가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p.36~38)
전통적으로 <논어>를 숭배해온 탓에 이 책의 내용을 공자가 심사숙고하여 표현한 보편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텍스트를 꼼꼼히 따져 보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책은 긴 시간에 걸쳐 공자의 주변 사람들이 한 자 한 줄 빠르게 기록한 게 분명합니다. 공자가 그들에게 기록하도록 한 다음 말하거나 행동하고 제자들이 그때그때 기록한 것도 아닙니다. '후대의 법도'나 '천하의 법도'로 삼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 말들을 완벽하게 정리된 진리로 받아들여 줄줄이 외우고 실행하기보다는 그 말들의 진면모를 복원함으로서 단편적이지만 진실하고, 또 단편적이어서 오히려 진실한 이 기록에서 2천 년 전에 살았던 한 훌륭한 인물을 관찰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어떤 삶이 훌륭한 삶인가에 대한 그의 의견은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 힘든 것이어서 여전히 우리의 사상과 감성에 자극을 줍니다.
이런 방식으로 <논어>를 읽는 것은 전통적인 독법보다 힘들지만 재미있습니다. 힘든 이유는 독서 과정에서 공자를 한 인간으로서 복원하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수동적으로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관련 자료를 모아 공자의 말과 행동을 최대한 역사의 맥락 속에 돌려놓는 한편, 심리적, 감성적, 논리적 지식을 다 동원해 공자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서 우리는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는 추상적 이론 따위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고셍서 고뇌와 인격과 시련을 통해 만들어진 다층적이고 변화무쌍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p.100~101)
공자 또한 진실하고 다면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진실한 인간은 다면적일 수밖에 없으며 오직 다면적 자료만이 우리 앞에 진실한 인간을 복원시켜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어>의 형식과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p.102)
5.
롤랑 바르트의 '수용자 이론', 데리다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로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원전의 권위에 기대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원전의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의 독서법이란 주관에 크게 기댈 수밖에 없다. 보들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처럼, 더 이상 원전은 과거의 원전이 아니고, 복제품도 과거의 복제품이 아니다. 원전 같은 복제품들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하나의 진리로서 존재하는 책, 하나의 완벽한 독서법을 기대하면 안된다. 우리는 자신의 주관속에 재해석된, 재창조된 고전 읽기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주관적인 고전독서가 가능한 것일까? 객관적인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주관적인 독서란 있을 수 없는 허구의 개념일 뿐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주관성을 견지하면서도 '나'의 주관성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고전'의 객관성을 받아들여 나아가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헤매이는 독서'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길이고, 가야할 길일 수밖에 없다. <논어를 읽다>가 보여주는 양자오식 '논어 독법'도 거기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할 이 시대의 고전독서의 한 모습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