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모임에서 제가 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른 이야기를 덧붙여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에우티프론> 번역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문학 번역이 아닌 비문학 번역에 있어서 가장 중점적으로 들여다보는 것 중의 하나가 '대명사'나 대명사에 준하는 말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썼냐 하는 점입니다. 대명사나 대명사에 준하는 말들을 보고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나마 괜찮은 번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명사를 보고 그 대명사가 가리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면 저는 기본적으로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뭐 어떤 분은 원어에 가깝게 써서 그렇다는 말들을 하시던데, 제 개인적으로는 번역서를 읽는 이유가 '언어학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단 글을 읽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면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책을 읽는 이유는 언어학 공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책을 읽는 이유는 그 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번역을 어떻게 좋은 번역이라고 하겠습니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긴 하지만, 알 수 없는 번역을 해놓고 원어에 가까운 번역을 했다고 하는 건 그 번역의 의미를 떠나서 제 귀에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독서를 한다는 것이 언어학 공부나 언어학 세미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이런 독자의 태도를 보고 게으르다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뭐 게으른 독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게으른 독자를 논하기 이전에, 일단 책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독자에게 알려주는 건 번역자의 최소한의 의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에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는 건 알고 있습니다.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가 철학적, 사상적, 학문적 행위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번역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말을 알 수 있게 알려주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기본적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알 수 없게 알려줘놓고 여기에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언어를 알 수 없게 번역해놓고 여기에 무슨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건, 저에게 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의 자체에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이런 논의에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논의의 사상적 의미는 인정하지만, 저를 포함한 번역서를 읽는 다수의 평범한 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딱히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번역서를 읽는 소수의 독자들에게는 무언가 의미가 있겠죠.^^;;)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에우티프론> 번역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고전 모임에서 읽어온 책들은 천병희 씨가 번역한 책들이었습니다. 제가 천병희 씨 번역을 읽자고 한 이유는, 고전에 관심없는 이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게 번역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대로 고대 그리스 대화편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충분히 재미있게 잘 읽었다고 하더군요. 만약에 고전 모임을 천병희 씨의 번역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번역서들을 읽었다면, 그분들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재밌게 잘 읽을 수 있을까요? 언어학적인 의미는 제가 하고 있는 고전모임에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하는 고전모임에서 필요한 책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책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 책입니다. <에우티프론>은 천병희 씨의 번역이 없어서 서광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읽고나서 깨달은 건데, 책을 읽기가 쉽지 않더군요. 예상대로 모임에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거나 어렵다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그나마 그분들이 <에우티프론>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모임에서 고대 그리스 대화편을 계속 읽어왔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이런 식의 번역을 읽었다면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몇 년 전에 <향연> 모임을 했다 피를 본 경험이 저의 그런 생각을 보증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읽을 수 있게 번역해달라는 것, 그거 하나입니다. 그것 하나가 어렵고 부당한 요구인가요? 그것 하나를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번역을 원하는 이들이 게으른 독자 취급을 당해야 하나요? 사상적이고, 학문적인 의미로서의 번역논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논쟁을 하시는 분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번역서를 읽는 다수의 평범한 독자들이 그 논쟁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그 독자들에게 그 논쟁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리건대, 이 사실을 자각하시고 논쟁을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