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소피스트들과 나눈 대화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나는 내가 틀린 말을 하면 기꺼이 논박당하고, 남이 틀린 말을 하면 기꺼이 논박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오. 하지만 나는 논박하는 것보다 논박당하는 것이 더 좋아요. 가장 나쁜 것에서 남을 구원하는 것보다도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좋음인 한, 나는 논박당하는 것이 더 큰 좋음이라고 여긴다오.(41)
정의는 사람들을 절제 있게 해주고 더 올바르게 해주는, 나쁨을 치료해주는 의술(91)
-우리가 좋은 것은 우리 안에 어떤 미덕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 말고도 좋은 것들은 모두 그 안에 어떤 미덕이 있기 때문인가요?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네, 칼리클레스.(154)
도구든 몸이든 혼이든 살아 있는 무엇이든 각각의 미덕이 가장 훌륭해지는 것은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각에게 고유한 짜임새와 올바름과 기술에 의해서요.(155)
우리는 정의와 절제를 갖추어 행복해지는 일에 우리 자신과 우리 공동체의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하네. 우리는 그것을 행동지침으로 삼아야 하며, 우리의 욕구들이 무절제해지게 방치하거나 우리의 욕구들을 충족시키려고 해서는 안 되네.(157)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거나 겁쟁이가 아니라면 누구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행하는 것을 두려워할 걸세.(189)
우리는 불의를 당하지 않기보다는 불의를 행하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 하며, 특히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훌륭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며, 누군가 어떤 점에서 나빠진다면 처벌받아야 하며, 처벌받고 응분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올바르게 되는 것이 본래 올바른 것 다음으로 가장 좋은 것이며, 모든 아첨은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든 남들이든 소수이든 다수이든 피해야 하며, 수사학은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 말일세.(198)

저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좋아합니다. 플라톤 대화편 특유의 말을 주고받는 리듬도 그 독특함 때문에 좋고, 플라톤의 분신인 소크라테스가 상대방을 논파하는 특유의 논쟁도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대화편에 익숙하지 않거나 계속 상대방의 말을 파고드는 것에 흥미를 느낄 수 없는 사람이라면 플라톤의 대화편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네, 저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르기아스>를 가지고 고전독서모임을 할 때 걱정이 되었습니다. <고르기아스>는 플라톤 대화편의 특징이 너무 잘 드러난 작품이어서요.

그런데, 제 생각과는 달리 이번에 한 고전독서모임은 너무 좋았습니다. 독서모임이 책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책의 다양성을 드러내어 책을 생생히 살아있게 했거든요. 독서모임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고르기아스>는 제가 읽은 것보다 더 괜찮고 좋은 책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때 나눈 대화를 통해서 제가 어떻게 <고르기아스>를 새롭게 읽게 되었는지 그 일부를 적어보겠습니다.

1.책 속의 인물들은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대화편에 나오는 인물들은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에게 논파당하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화편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자인 플라톤이 자신이 원하는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평면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독서모임을 통해서 말을 주고받으며, 이들이 단순히 평면적인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불변의 확고부동한 진리를 추구하며, 정치나 철학이 그런 진리로 사람들이 나아가게 해야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도 그렇지만, 그에게 논파당하는 역할로 나오지만 현실적인 주장을 하는 등장인물들인 고르기아스,폴로스,칼리클레스도 자기들의 입장에서는 옳은 말을 하는 인물들로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현실에서의 삶이 그들에게 그런 현실적인 주장을 하게 만든 것이죠. 책을 읽은 우리들은 그들이 무조건 나쁘다거나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저마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으로 어떤 면은 옹호하고, 어떤 면은 비판하고, 또 어떤 인물에게는 호감을 느끼고, 다른 인물에게는 호감을 느낀 것입니다. 대화편을 쓴 플라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책 속 소크라테스를 무조건 옹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삶이,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삶만을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강요당해서 더 이상 이상과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동경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책을 바라보는 시선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지니까요.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책 속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다른 인물들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겁니다. 플라톤은 그런 관점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말을 가감없이 표현한 좋은 문학작품을 쓴 작가가 되고요.

2.정치와 수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고르기아스>에서는 소크라테스는, 수사학으로 무엇이든 가능하기 때문에 수사학이 가장 중요한 학문이라고 외치는 소피트스 고르기아스를 논파합니다. 그는 논파하면서, 수사학이 사람들을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닌데다 사람들의 이익이나 욕심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합니다. 그러나 저는 독서모임에서의 대화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님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정치가 정치에 참여하는 이들로 하여금 진리로 나아가게 한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정치가 진리로 반드시 나아가는 길이어야 한다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당위의 논리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정치가 진리로 나아가는 길이어야만 한다는 당위의 논리로만 채워진다면, 그건 절대적으로 옳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당위로만 채워진 정치가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오히려 이 부분에서 수사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가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사학은 굉장히 유용한 도구입니다. 당위의 목적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수사학의 결합이야말로 정치행위를 제대로 만들 것입니다. 저는 <고르기아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얽매이지 말고, 정치를 위해서나, 수사를 위해서나 둘 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3.정치에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는 상황에 따라서 적용해야 합니다. <고르기아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와 그에게 논파당하는 사람들의 말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에 상응합니다. 정치에서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소크라테스는 현실보다 이상을 내세우는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고, 진리 같은 이상보다는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르기아스,폴로스,칼리클레스는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현실주의가 대세가 된 현대의 흐름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이상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나는 현실주의자이니까 이상주의가 틀렸어'라거나 '나는 이상주의자니까 현실주의가 틀렸어'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상황과 맥락에 맞춰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때에 맞춰 적용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열변을 토하는 소크라테스나 책을 쓴 플라톤에게는 죄송하지만(^^;;).

다 써놓고 보니, 저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것과는 계속해서 멀어지는 느낌입니다. 책 속 소크라테스나, 책을 쓴 플라톤은 정치뿐만 아니라 철학도 인간을 진리로 나아가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저는 그것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저는 철학이 인간을 진리로 나아가게 하면 좋지만, 진리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의 삶이나 사상이나 생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조금 더 열린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고르기아스>를 읽고 독서토론을 통해서 <고르기아스>를 곱씹은 것이 철학적인 행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저 자신을 이전의 저보다는 더 괜찮은 인간으로 만들 확률이 높아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이란, 철학함이란, 철학적인 행위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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