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너마이트 니체 -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다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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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찾아가며, 나는 나를 기다린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나가 되어가고 있다.(28)
사랑하는 대상 안에 숨은 위대함을 알아보고, 그것을 꺼내기 위해 망치까지 쳐들 수 있다면 당신은 위대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앎이라고 다를까.(174)
지혜란 율법에 대한 의구심에서 시작하고, 성숙은 떠남으로써만 가능하다(177)
철학자라고 하는 것은 삶의 문제, 생활 방식의 문제, 실존 방식의 문제이다.(223)

<다이너마이트 니체>는 니체 전체의 사상을 살펴보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니체 스스로가 자신의 철학에 입문하려는 초심자에게 가장 먼저 읽으라고 권한 <선악의 저편>을 저자인 고병권이 읽고 강독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한 권의 책을 바탕으로 살펴보는 니체의 어떤 특정한 시점의 사상을 파악하는 책인 것이죠. 어떤 특정한 시점이라고 해서 지엽적인 것이라고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니체 사상의 모습들은 이미 앞으로 태어날 니체 사상들을 품고 있습니다. 이미 태어날 사상들을 기다리는, 기다리면서 그 사상들이 되어가는 과정을 책은 담고 있습니다.

저자의 니체 강독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 니체>가 '언더그라운드'에 서서 자신만의 서광(=아침놀)을 맞이하기 전 홀로 지나와야 했던 깊은 밤들에 관한 철학적 성찰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다이너마이트 니체>는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부푼 마음으로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위한 깊은 응축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부푼 마음으로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위한 깊은 응축의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말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별로 어려운 얘기는 아니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보겠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을 통해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이 믿음을 동반하는 것은 맞지만, 종교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무력하고 수동적인 기다림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 기다림은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이가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가가 되어가는 기다림입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자신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기다림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미래에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다림이 니체가 말하는 '기다림'입니다. 나 자신의 내면에서 변화의 강력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변화하여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어가는 기다림. 여기에서 미래는 현재와 교차합니다.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이는, 미래를 기다리지만, 그 미래를 이루어가기 위해 현재를 미래의 가능성으로 가득 채웁니다.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이의 삶 속에서 현재는 끊임없이 미래와 교차하면서 미래가 되어가는 것이죠.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는 했으니 뒷부분 이야기를 해볼께요.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위한 깊은 응축이란,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한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유의 폭발이 필요한데, 사유의 폭발이 강력한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깊은 응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깊고 깊은 응축을 통해서 폭발이 일어날 때 진정 강력한 변화, 진정한 자기극복이나 자기초월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때 등장하는 것이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더욱 더 강력한 변화를 위한 깊은 응축을 가리키는 말로서.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일으키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철학자로서의 니체가 '다이너마이트 니체'인 것이죠.

위의 문장을 읽다보면 궁금증이 또 생길 겁니다. 도래하는 철학자가 뭐지? 이 질문에도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니체에게 철학자란, 단순한 학자가 아닙니다. 단순히 자신이 아는 것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자신의 지식을 전해는 인물은 니체에게 학자이지 철학자가 아닙니다. 니체에게 철학자란, 하나의 삶의 방식이자 실천을 행하는 자입니다. 삶과 분리된 철학, 삶과 괴리되어 자신만의 세계관에 침잠하는 인물을 니체는 철학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삶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철학을 삶으로서 살아나가며 삶과 철학이 하나가 되게 만드는 인물을 니체는 철학자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도래하는'을 붙이면 도래하는 철학자가 됩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 나타날 철학자. 그런데 왜 니체는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린다고 했을까요?

이 이야기를 하려면 니체가 자기가 살아가던 현대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이야기해야합니다. 니체가 <선악의 저편>을 '현대성에 대한 비평'이라고도 했던 것처럼, 니체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현대는 긍정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니체에게 자신이 살아가던 동시대의 유럽, 동시대의 독일은 현실을 부정,억압하며 죽음 이후의 내세나 초월적 가치를 현실보다 우선시하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이 너무 강한 세상이었습니다. 유럽의 근대가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고 해도 그것의 잔재는 곳곳에 남아 현실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근대 유럽이 내세우는 가치들이 다양한 것들을 평범하게 만들고, 특이성이나 차별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일원화하는 것에서 니체는 다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의 인간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일반화한 인간이 득세하는 세상. 무언가 다르고 뛰어난 존재가 되기보다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이나 체제에 순응하는 선한 인간이 되기를 강요하는 게 니체가 바라본 동시대 유럽과 독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니체에게 도래하는 철학자, 미래에 나타날 철학자는, 동시대 유럽과 독일의 모습을 극복하는 인간형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도래하는 철학자는, 니체 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가 강요하는 가치의 억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동시대의 가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새로운 가치의 전도를 이루고 그 전도된 가치에 따라 좋은 평가를 얻은 고귀한 덕을 따르며 나쁜 평가를 얻은 부정적인 덕과는 거리를 두는 게 니체가 말하는 도래하는 철학자입니다. 윗부분에서도 말했지만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깊은 응축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우리 내면의 야수성을 바라보는 것들이 필요하고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한 니체. 이 말로 무수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지만(^^;;)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신 중심의 사회가 무너지고 인간 중심의 사회가 되었다는 현실인식이겠죠. 거기서 더 나아가 니체는 사람들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믿고 자기자신을 극복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 듯 합니다. 자기 내면의 가능성을 믿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디라면서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어가는 인간들을. 니체는 자신의 바람을 위해 자신의 책을 읽는 이에게 오늘도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 다이너마이트에 당해 새로운 사유의 변화를 겪은 책의 저자 고병권이 자신이 겪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새로운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게 <다이너마이트 니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을 쓰면서 니체식 다이너마이트 던지기에 일조하게 됐고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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