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의 결혼 민음사 세계시인선 46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김종철 옮김 / 민음사 / 1990년 10월
평점 :
품절


순수의 노래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82)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들을 들여다봅니다. 도대체 몇 번이나 이 시집을 읽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나는 왜 블레이크의 시들을 계속 읽을까? 왜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무언가 떠오릅니다. 이 글은 그때 떠오른 흔적들을 짧게나마 적어본 글입니다.

첫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다라는 건 저에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현대시들은 분명 읽기는 하는데,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언어의 정련이나 조탁을 통해서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창조해내는 건 이해하겠는데, 안타깝게도 그 시 세계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저는 굳이 이런 시들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시들은 읽으면 읽는대로 이해가 잘 되는 편입니다.(물론 이해 안 되는 시들도 있기는 합니다.^^;;)

두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는 지금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열정이 스며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의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시작을 알린 인물로서 그는 자신의 시에 순수한 열정을 담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동시대 프랑스 혁명에서 사람들이 뿜어낸 열정의 영향 때문일수도 있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반동적인 경향을 보이며 자유주의 사상과 개혁적인 성향을 억압한 동시대 영국 정부에 대한 저항의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블레이크는 세상은 바꿀 수 있다는, 이상을 향해 사람들이 나아가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순수한 열정을 시에서 보여줍니다. 제가 그 열정에 끌리는 건, 제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닌가 합니다.

세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충분히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저는 기본적으로 세상의 많은 시들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 사랑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와 그 사랑을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시로 구분이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시를 읽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입니다. 블레이크는 특히 약자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습니다. 동시대에 굴뚝 청소부로 혹사당하는 아이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 런던에서 빈곤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에 대한 애정 '사람마다의 울음 속에서/ 모든 어린아이의 공포에 질린 울음 속에서/ 모든 목소리와, 모든 금지령 속에서/ 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굴레를 듣는다.'(p.38),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 대한 애정 같은 것들이 그의 시 곳곳에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블레이크는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인간을 억압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를 곳곳에서 표출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움직이는 동시대 교회에 대한 분노, 현실의 인간들을 억압하는 요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서 비판하는 것 등등.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저는 읽을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네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들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상력의 힘을 믿은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상징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시세계를 만들어 그걸 바탕으로 시를 쓰고, 자신만의 독특한 느낌의 판화와 함께 출판했습니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건 그만의 독특한, 과학이 발달한 현대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시세계로 걸어들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적이며 신비로우며 낭만적인 그의 시세계는, 읽는 독자에게 낯설지만 익숙하고 따뜻한 이상한 감흥을 선사합니다. 오직 블레이크만이 줄 수 있는 감흥을.

여기까지 적고보니 제가 사는 게 힘든가 봅니다. ㅎㅎㅎ 사는 게 복잡하고 힘드니 어렵지 않고 쉽게 이해가 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끌리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 시의 낯설지만 익숙하고 따뜻한 느낌이 좋은 거죠. 이 느낌을 읽을 때마다 받기 때문에 제가 그의 시들을 계속 읽는 것 같습니다. 몇백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생한 상상력이 빚어낸 시들을 몇번이고 계속해서 만나는 경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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