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건강염려증에 관한 얘기로 시작한다. 어제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타이밍상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 책에서 우울과 불안에 대한 내용들이 나오는 부분을 읽게 되서 그 소설과 이 책을 콜라보로 이해하는 것이 뭔가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한 예로 망상과 관련된 내용에서 독자인 나는 어제 읽었던 ‘멜랑콜리아‘의 주인공 라스가 생각났다. 망상의 정의와 특징들을 보면서 라스가 망상에 빠져있었던 인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신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슬픔에 잠겨 살았던 라스의 모습을 그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볼 수 있었다.

좀 더 읽으면서 망상의 여러 종류들 중에서 라스의 망상은 과대망상 쪽에 좀 더 가까워보였다. 독일로 미술 유학을 갔을 정도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던 인물이었기에 자신의 능력을 실제보다 훨씬 더 높게 여겼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만 놓고 보면 이러한 것들이 득보다는 독이 되어 라스가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위에 언급한 망상 외에도 트라우마라든지 가스라이팅 등 최근에 비교적 이슈가 되고 있는 개념들에 대해서도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이러한 것들과 관련된 뇌과학관련 내용들이나 특정 약물 성분에 대한 지식도 함께 얻어갈 수 있어서 많은 공부가 되었던 것 같다.

건강염려증이란 사소한 신체적 증세 또는 감각을 심각하게 해석하여 스스로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고 확신하거나 두려워하고, 여기에 몰두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건강염려증 Hypochondriasis

자신이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걸릴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의 건강을 비정상적으로 염려하고 집착하는 상태

우울과 불안이 심하면 현실감이 떨어지고 불안, 초조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불안, 초조로 약해진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비과학적인 치료방법을 경계해야 합니다.

망상과 창의력은 남과 다른 독특한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망상은 있지도 않은 것을 마치 사실인 양 믿거나, 이치에 맞지 않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반해 창의력은 주어진 문제상황을 새롭고 적절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창출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망상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신념이나 웅변에 더 강합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나 직원들을 설득하고 함께할 수 있는 논리성과 유연성이 부족하다

망상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기 쉽습니다.

창의적인 사람은 머스크처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창의력을 곳곳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는 생각이 망상적인지 창의적인지 구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에게 이러한 특성이 있는지 꼭 확인해야 합니다. 조직의 리더가 망상적인 생각에 빠져 있다면 그가 운영하는 회사는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망상은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있어서 이를 조절하는 약물치료가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망상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성 안에서 갇혀 지내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 않습니다.

망상의 대표적인 예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조직적으로 괴롭힌다는 피해망상, 배우자가 부정을 한다는 부정망상, 자신이 과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과대망상 등이 있습니다. 자신이 이런 측면이 있다면 전문가의 정확한 판단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우울증이 있는 경우에도 망상이 동반될 수 있기 때문에 동반된 정신건강의학적 문제에 대해서도 정확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환청이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러 명이 서로 중얼거리거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양상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삐 소리가 나는 이명과는 다르고,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펜터민은 중추신경흥분제로 우리 뇌의 시상하부에 있는 식욕중추에 작용해서 뇌에서 배고픔을 덜 느끼게 하고 포만감을 증가시키게 됩니다. 뇌의 도파민과 노르아드레날린을 증가시키는데 도파민을 증가시키는 작용은 피해망상, 관계사고, 환청 등 정신병적 증상을 유발할 수 있고 노르아드레날린을 증가시키면 심장박동이 증가하고 각성이 되어 불면증, 긴장, 불안, 공황 증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팬터민계 마약성 식욕억제제를 주변에 나누어준다거나 판매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가수라는 직업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정 기복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하게 됩니다. 이런 분들이 소리에 대한 감각이 뛰어납니다.

감정 기복이 있는 사람이 마약성 식욕억제제를 복용하면 기복이 더 심해지고 일반인들보다도 더 정신병적 증상과 공황 증상, 불면증이 더 쉽게 생길 수 있습니다. 10대, 20대 젊은 분들은 중장년층보다도 더 쉽게 생깁니다. 약물로 발생한 증상을 조절하려다 보니 수면제 등의 다른 약물까지 함께 복용하게 됩니다.

피나스테리드 성분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모낭에서 탈모의 원인인 디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DHT 이라는 물질로 바뀌는 것을 막게 됩니다. 이러한 호르몬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에게서 우울증이 발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분리해서 자신만의 삶을 산다면 가족에게 위기가 닥칠 때 서로 돕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대응하기 어려울 수 있다

‘트라우마Trauma‘는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죽음, 심각한 질병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신체적, 물리적 통합에 위협되는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후 겪는 심리적 외상을 말합니다. 이는 스트레스와는 다르며 생존에 위협이 될 정도의 심각한 경험을 한 것을 의미합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 뇌는 긴급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다시 같은 경험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 번째는 경험을 다시 하는 경우에 대해 미리 대비를 하게 됩니다.

우리 뇌는 트라우마를 경험하면 변화가 일어나는데 특히 매우 예민한 경우에는 변화가 더 크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뇌의 변연계에 위치한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되고 뇌섬엽과 배측전대상피질이 불안정하게 됩니다.

편도체는 공포, 불안, 두려움과 같이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고 기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영역입니다. 편도체의 중심핵을 전기로 자극하면 두려움을 느끼고, 반대로 편도체를 파괴하면 공포 반응이 사라져서 두려움이 없어지게 됩니다.

매우 예민한 사람의 경우에는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도 공포를 인식하는 편도체가 자극되어 두려움을 느낄수 있습니다.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긴급상황으로 인식해 교감신경계를 활성화시키고 트라우마의 원인으로부터 도망가 다시 경험하지 않도록 대비하게 됩니다. 전두엽에 의해 뇌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편도체에 의해서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됩니다.

뇌섬엽은 우리 몸의 내부의 감각과 외부의 세계를 인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나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항상 멍하고 자신의 신체감각을 왜곡해서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피하게 됩니다.

뇌섬엽 Insula

‘인슐라‘는 ‘섬‘을 뜻하는 라틴어다. 이는 측두엽과 두정엽 아래쪽의 피질이 나뉘는 외측고랑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마치 조개처럼 생겨, 바다 위의 섬처럼 다른 부분과 구별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온도, 촉감, 통증, 가려움, 근육과 내장의 감각, 호흡 곤란 등 신체 내부에 존재하는 감각기에서 생성되는 감각인 ‘내수용성 감각‘을 처리해 몸 전체 상태를 인식하게 한다. 또한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일을 경험하기 전에 미리 예상하는 능력과도 관련된다. 내부적, 외부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뇌가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여하며, 신체를 유지하는 단순한 감각작용부터 사회적인 감정처리까지 관여한다.

배측전대상피질은 감정이나 고통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은 타인에게 거절을 당하면 힘든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도 이 영역의 활성화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배측전대상피질 dorsal anterior cingulate cortex dACC

편도체로부터 정보를 받아 필요한 반응을 지시하며, 감정이나 고통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신체적인 통증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거절을 당할 때도 이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트라우마에서 회복되면 뇌는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편도체가 만드는 공포의 자극이 감소하고 뇌섬엽과 배측전대상피질이 안정화됩니다. 트라우마를 감소시킬 수 있는 좋은 기억과 안전기지, 대인관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트라우마의 기억은 잊으려 해도 잘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좋은 기억들을 만들어서 트라우마의 기억이 줄어들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좋은 기억은 집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집 밖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고, 재미있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안전기지는 트라우마를 경험했을 때 자신을 보호하는 쉼터의 역할을 해줍니다.

대인관계는 편안하고 안정적이라면 도움이 됩니다.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때는 긍정적인 경험을 한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예민한 분들은 가스라이팅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가스라이팅 Gaslighting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자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해 심리적 지배를 하는 행위를 말한다. 《가스등Gas light》(1938)이라는 연극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가스라이팅은 가정, 학교, 연인 등 주로 밀접하거나 친밀한 관계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수평적이기보다 비대칭적 권력으로 누군가를 통제하고 억압하려 할 때 이뤄지게 된다. 예를 들어, ‘너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으니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트라우마general trauma, 신체적 학대physical abuse, 성적 학대sexual abuse, 방임과 정서적 학대neglect and emotional abuse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그 사람의 예민성이나 공격성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는 우울증이나 불안증, 공황장애 등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학대의 경험은 ‘재경험‘과 ‘공포의 일반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재경험은 과거 혹은 어린 시절의 부정적 경험, 정서, 갈등상태의 감정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무의식중에 떠올리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공포의 일반화는 과거에 경험한 트라우마 때문에 현재의 일상적인 경험, 사건, 대인관계까지도 더 위험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위협 반응이 더 쉽게 일어납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자신이 현재 경험하는 것들이 과거와 연결된 기억을 불러오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과 부모와의 관계는 평생에 걸쳐 예민성을 줄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그런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뇌는 현재의 좋은 기억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는 새로운 신경망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 그리고 편안하게 느끼는 일을 찾는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만약 자신의 직업이나 배우자, 이성친구, 좋아하는 책, 아니면 상담하는 의사가 이와 같은 편안함을 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을 긍정적인 태도로 넘기는 사람이 결국 더 행복했다

‘평온의 기도‘

신이시여,

저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남편의 사망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주변 사람으로 채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을 때 트라우마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일상을 되찾게 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지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트라우마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진하게 되는 질환입니다. 흔히 우울증, 불면증, 깜짝 놀라는 반응, 멍한 느낌 등을 동반하게 됩니다.

자조모임은 같은 아픔을 지닌 유족들이 모여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의 과정을 함께하는 모임입니다. 모임의 참여자와 함께 애도 과정을 공유하며 공감, 이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참여자 간의 지지와 격려를 통해 변화를 체험하고 자기표현의 기회를 통해 절망감을 완화하고, 나아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참여자 간 다양한 시각에서 조언해줄 수 있어, 참여를 통해 자신의 상황, 감정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같은 상황을 경험한 분들과 함께하는 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에서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자살 유족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위로가 되는 말‘은 ‘네 잘못이 아니야‘ ‘고인도 네가 잘 지내길 바랄거야‘ ‘많이 힘들었겠다‘ ‘무슨 말을 한들 네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힘들면 실컷 울어도 돼‘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상처가 되는 말‘은 ‘이제 그만 잊어‘ ‘너는 뭐하고 있었어?‘ ‘왜 그랬대?‘ ‘이제 괜찮을 때도 됐잖아‘ ‘다시는 그 사람 이야기하지 말아라‘ 등이었습니다.

유족에게 ‘위로가 되는 말‘로 따뜻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유족에 대한 작은 관심과 배려로도 2차적인 극단적인 선택을 예방하기 위한 큰 힘이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자괴감이 극심한 주인공 라스와 그 주변인들의 얘기를 통해 자신이 꿈꾸던 삶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을 때 사람이 얼마나 비참하고 추하게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었고, 뒤에 나오는 올리네라는 인물을 보면서는 인생이라는게 참 덧없음을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가 들어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올리네는 자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의 기억도 희미해지고, 심지어는 기본적인 생리현상조차 온전히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로 몸 상태도 쇠약해졌다. 자신의 남동생인 라스는 이미 저세상으로 갔으며, 쉬버트 또한 오늘 내일하고 있다.

이렇게 실제로 나이 들어가는 것과는 별개로 올리네는 과거 주변 인물들과 나눴던 대화나 자신의 예전 기억들을 통해 ‘라스‘에 대한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독자들에게 ‘라스‘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달한다. 읽으면서 ‘라스‘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의 심리상태는 어떨지 추측해 보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딱히 정상적이지는 않아보인다.

추가로 기억과 관련하여 올리네의 현재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과 반대로 아주 오래전 기억은 비교적 명확하다는 얘기들이 책에 나오는데, 이는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단기기억력은 떨어지지만, 오래전에 있었던 옛날 얘기같은 것들은 비교적 명확하게 얘기하는 것들을 생각해본다면 어느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올리네가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예전에 ‘라스‘와 있었던 일화들을 비교적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해보이지는 않는다.
.
.
.
올리네는 몸을 온전히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도 어부 스베인의 도움으로 생활을 영위해나간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만약에 스베인이 없었다면 올리네는 배를 굶주리다가 이미 저 세상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리네는 쉬버트의 임종을 앞두고 예전에 라스가 죽음을 앞두고 보였던 행동들을 떠올린다. 고개를 돌린채 아무도 보지 않으려 했던 라스처럼 쉬버트도 비슷하게 행동한다. 어찌됐건 간에 쉬버트도 결국에는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막판에 읽다보면 올리네의 기억의 왜곡이 점점 심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자신을 도와주었던 어부의 이름이 스베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에른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고, 이미 시그네의 집에 직접 가서 쉬버트의 죽음을 확인한 뒤에도 그 사실을 망각한 채 쉬버트를 보러 시그네의 집에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죽음이 가까워 올 수록 기억력이라는 것도 점점 왜곡되어 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p.510에 밑줄 친 내용은 라스가 자신이 꿈꾸던 멋지고 이상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는 듯 하다. 다만, 현실에서 이러한 모습을 경험해보지 못한채 죽음을 맞았던 라스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한편으로는 그 씁쓸함이 더욱 더 크게 배가되는 듯 하다.

마지막에 올리네가 생존을 위해 먹던 생선에 무언가 감정이입이 되면서 저자가 작품을 마무리하는 모습도 나름 신선하게 느껴졌다.

완독 후 작품 해설에서는 대체로 작품을 읽으면서 공감했던 부분들이 많이 있어서 ‘아, 내가 이 작품을 그래도 비교적 올바르게 읽었구나‘ 라는 안도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일부 놓쳤던 부분들에 대한 설명들도 추가로 볼 수 있어서 유익했던 것 같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일상을 제대로 건사할 수 없었다. 이런일이 그녀에게 일어나다니. 그녀는 이제 자비로운 신이 자신을 거두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은 라스도 데려갔고, 보아하니 곧 쉬버트도 데려가려 하는 것 같았다. 올리네는 조만간 자신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 P468

올리네는 라스가 그린 말을 보며 그것이 바로 라스라고 생각했다. 라스는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었다. 동시에 그 말은 올리네이기도 했다. 올리네는 두 사람을 말이라 생각했다. 라스는 겁에 질린 말이었다. 라스는 집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대문을 두드리면 항상 어디론가 사라졌다. - P469

나는 라스가 사람들과 마주치기를 싫어한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마저 피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누나고, 그가 잘 아는 사람이다. 내가 아니라면 그가 특별히 마주할 사람도 없지 않은가? 나와도 얼굴을 마주치기 싫어한다면 그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참 안타깝구나. - P470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
가끔은 조용히 앉아 있을 때도 있어. 그럴 때면 눈이 촉촉하게 젖어 오는 것을 볼 수 있어. 그러다 돌연 눈빛이 야생적으로 변하곤 하지.
난 그 아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아버지가 말했다.
그저 그러려니 하세요, 아버지. 내가 말했다. - P470

라스는 참 특별한 아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어.
라스 같은 아이는 당최 찾아볼 수가 없어. 아버지가 말했다. - P470

맞아요, 라스는 참으로 특별한 아이예요.
아버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라스는 집 부근을 벗어난 적이 없단다.
생사가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시내에도 나가지 않을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정말 그래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도 안 갈걸.
라스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아이야.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아이지. 아버지가 말했다. - P471

라스가 저러는 건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법이니까. - P472

아버지는 라스가 저런 모습을 보일 때면 단 한 번도 먼저다가가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라스가 어떤 반응을보일지 전혀 짐작할 수 없기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는 라스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가끔 미친 듯 화를 내는 라스를 보면 스스로 원하고 좋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고 했다. - P472

다락방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라스가 적어도 친누나와는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가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해도 그건 그의 선택일뿐이다. 하지만 친누나와는 대화를 해야 한다. 나는 라스가 친누나에게 한마디쯤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문을 열 수 없었다. - P473

나는 라스가 문손잡이를 힘주어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라스는 누나가 대화를 하기 위해 찾아와도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누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 P474

나는 다시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라스는 여전히 문을 막고 있었다. 나는 손잡이를 놓아 버렸다. 그 순간, 손잡이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라스를 보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그의 검은 머리와 턱수염을 보았다. 그의 머리는 야생마처럼 덥수룩했고, 그의 눈동자는 검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 P474

문에 걸려 있는 쪽지가 안 보여?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라스가 소리쳤다.
나는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로 했다. 라스는 ‘접근 금지‘라는 쪽지가 문에 걸려 있으면 방해받기 싫다는 의미라며 내 등에 대고 소리쳤다. - P475

나는 라스의 화난 목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라스는 계단 위에서 사람들은 바보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라고 했다. 그의 누나도 멍청하긴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소리쳤다. 나는 그가 일을 하기 위해선 고요한 환경이 필요한데 자기에겐 그런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 P475

라스는 가끔 정신이 홱 돌아 버릴 때가 있어. 난 그 이유를전혀 알 수가 없구나.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슬프게 흐느끼기도 해.
난 둘 중에 뭐가 더 나은지, 뭐가 더 나쁜지 모르겠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 P476

나는 단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는 버럭 화를 냈다. 아버지는 내게 라스를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나쁜 의도는 전혀 없다고. - P476

나는 라스가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
라스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라.
그 불같은 성격도 그렇고.
갑자기 우는 것도 그렇고.
라스가 평범하지 않은 건 확실해. - P476

하지만 어쩌겠니. 받아들여야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아버지가 말했다. - P477

등 뒤에서 종종걸음을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라스가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내 앞에서 발을 멈추고 땅을 내려다보던 라스는 내게 종이 쪽지 한 장과 그림 한 장을 건넸다. 나는 라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반짝였다. 라스는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뛰어갔다. - P477

나는 그가 건네준 그림을 보았다. 담뱃갑 포장지의 뒷면에 그린 그림이었다. 갈색 말한 마리 말의 뒤에 보이는 뾰족한 산등성이, 그리고 사람처럼 보이는 두 개의 형상. 나는 그림 속에서 마치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사람의 형상을 뚫어지게 보았다. 나는 집을 향해 뛰어가는 라스를 돌아보았다. 라스와 아버지가 함께 사는 집. 나는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라스를 보았다. 나는 라스가 건네준 그림을 들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 P478

이제 그녀는 발이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고 바닷가로 내려가야 한다. 그녀는 내리막길이라면 그럭저럭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오르막길이었다. 너무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 것은 힘들기 짝이 없었다. - P478

너무나 힘들었다. 너무나 아팠다. 사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 P478

발이 아픈 건 잊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야 했다. 바닷가에 이를 때까지 오직 쉬지 않고 걷는 수밖에 없었다. - P479

이제 그녀는 쉬지 않고 걸어 바닷가로 갈 것이다. 쉬지 않고 걸을 것이다. 올리네는 생선을 잘 간수하지 못한 탓에 고양이가 훔쳐 가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다시 바닷가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행동을 했으니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 P479

오늘 잡은 생선을 벌써 다 처치해 버렸으니 어떡하죠?
하지만 여기까지 걸음을 하셨으니 다른 수를 찾아봅시다.
제가 바다로 나가서 고기를 잡아 드릴게요.
지금 당장 바다에 배를 띄우겠습니다. 어부 스베인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올리네가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죠. 함께 바다로 가요. 고기가 잡히는지 한번 시도는 해 봐야죠. 그가 말했다. - P481

그는 올리네가 끼니를 이어 갈 수 있도록 그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올리네는 그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어부 스베인은 우리가 세상에 함께 사는 이유는 서로 도와가며 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 P481

올리네는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방금 일어난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시그네는 정말 쉬버트가 올리네를 만나 보고 싶다고 말했던가? 올리네는 확실히 기억할수가 없었다. - P482

그녀는 이제 생리 현상도 스스로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나이가 든다는 것이 너무나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신이 자신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러면 이 모든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 P485

통증은 여전했다. 올리네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른 신이 자신을 거두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녀는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고 싶었다. 언제쯤이면 이 고통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그녀는 얼른 이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P486

지팡이를 짚고 생선을 든 채 구부정한 몸으로 힘겹게 발을 옮기던 올리네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집 앞에 서 있는 시그네가 보였다. 시그네는 대문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올리네는 시그네와 단 한 번도 사이렇게 지낸 적이 없었다. 시그네는 올리네가 길을 걸을 때 단한 번도 집 앞에 나온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녀는 올리네가 집 앞을 지나칠 때면 쏜살같이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올리네는 시그네와 결코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 P487

아니, 올리네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오래전에 일어났던 일들뿐이었다. 매우 선명하고 똑똑하게 올리네는 나이가 드니 그렇게 변했다고 생각했다. - P488

올리네는 지금 오느냐고 묻는 시그네의 목소리를 들었다. 혹시 겁이 나서 죽어 가는 동생을 아예 찾아보지도 않겠다고 마음먹은건 아니겠죠? 그 말을 들은 올리네는 그제야 남동생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맞아, 그렇지. 시그네는 이미 그날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녀에게 동생을 보러 오라고 재촉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녀는 쉬버트가 죽어 가고 있는데도 바닷가에 가서 생선을 사 왔다. 그녀는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이런 일이 있어난 것이 너무나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 P488

쉬버트………….
쉬버트, 넌 매우 특별한 아이였어.
너와 라스는 참으로 개성 있고 특별한 아이였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지만 너는 라스와 달리 단 한 번도 불같이 화를 낸 적이없었어.
쉬버트…………. 올리네가 말했다. - P493

그녀는 쉬버트가 가끔 고집을 부릴 때도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쉬버트는 어렸을 때도 가끔 고집을 부리곤 했으니까. 그는 한번 마음을 먹으면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의 고집대로 밀어붙이는 사람이었다. 라스처럼. 올리네는 쉬버트와 라스가 고집이 센 것으로 치자면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한번 마음을 먹으면 누가 뭐라 하든 자기 뜻대로 하고야 마는 사람들이었다. - P496

라스는 자신의 턱수염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내가 보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면, 자신의 턱수염을 몇 번이고 쓰다듬기도 했다. 나는 라스가 자신의 턱수염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턱수염을 쓰다듬는 모습에서 그의 자랑스러움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을 때 매우 만족해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주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못된 여인이 그의 긴 머리와 턱수염을 잘라 버린 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었다. - P496

라스는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긴 머리와 턱수염을 자른 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라스에게 그처럼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나는 그가 빈민가의 다락방에 홀로 누워 죽음을 기다릴 때 그를 찾아본 적이 있다. 침대에 누워 있던 라스는 방에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에게 나를 향해 돌아누우라고 부탁했지만, 라스는 돌아누우려 하지 않았다. 라스는 침대에 누워 벽을 바라본 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희끗희끗하고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있던 머리를 손으로 감싸려 했지만, 그의 머리에는 잿빛의 짤막하고 뻣뻣한 머리카락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그들은 라스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 P497

라스, 머리와 턱수염을 잘랐구나. 네가 머리와 턱수염을 자르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
자기는 절대로 머리와 턱수염을 자르기 싫었지만 그들이 강제로 잘랐다고 힘없이 말하는 라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는 라스 곁에 가위를 들고 서있는 못된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나는 왜 라스의 머리와 턱수염을 잘라야만 했는지 주인 여자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청결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 P497

그녀는 방에 누가 들어오기만 하면 라스가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보이기 싫어한다고 했다. 그녀는 그 유명한 시인 셀란도 그곳에 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라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 유명한 셸란이 라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왔건만, 라스는 말없이 벽을 향해 돌아누워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그 유명한 시인 셸란이 라스에게 말을 걸었지만, 라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라스는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에겐 절대로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고 한다. - P498

나는 가루 담배를 라스의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라스는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나는 검고 묵직한 빛을 띤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갑자기 그의 눈동자가 변했다. 그와 동시에 라스의 태도도 변했다. 라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라스가 너무나 변화무쌍한 사람이라 어떻게 돌변할지 짐작조차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P499

쉬버트는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그녀를 이곳에 불렀고, 그녀는 그의 침대 옆에 앉아 그에게 말을 건넸다. 라스에게 했던 것처럼. 하지만 쉬버트도 라스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올리네는 두 동생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생각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쉬버트는 머리카락과 턱수염을 자르지 않았다는 것. 올리네는 쉬버트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 P500

어부 비에른은 참으로 선한 사람이다. 그는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녀에게 생선을 주었다. 어부 비에른이 아니었다면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은 이미 오래전에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부 비에른이 하늘 왕국에서 큰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늘의 신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도와준 어부 비에른에게 그에 걸맞은 상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504

이제 그녀는 집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쉬버트에게도 가 봐야 한다. 왜냐하면 시그네가 그녀에게 쉬버트를 보러 오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그네를 통해 그녀에게 와 달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시그네는 쉬버트가 올리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며 발걸음을 해 달라고 말했다.  - P504

문고리에 걸린 생선 옆에는 라스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한 남자와 말,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산등성이 그림은 대부분 누런색과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라스는 어느 날 그녀에게 뛰어와서 이 그림을 주고 갔다. 올리네는 그때 라스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음을 기억했다. 그림이 훌륭하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낙서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두말없이 그림을 받아서 작은집 벽에 걸어 두었고, 그 그림은 수년 동안 제자리를 지켰다. 세월이 갈수록 올리네는 그 그림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라스가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건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 라스가 그린 그림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그것을 단지 마음속으로만 간직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라스의 그림이 비록 낙서처럼 무의미하게 보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그림은 라스가 그린 것이니까. 그녀는 그림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라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그림을 그렸다면 그녀는 그림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림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 P508

그는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문득 나는 그의 눈동자가 하늘처럼 커다랗다고 느꼈다. 그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는 하늘을 머금을 만큼 거대했다. 라스가 몸을 돌려 내게 소리쳤다.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둬, 나를 따라오지 마. 나는 나무배 위로 오르는 라스를 보았다. 멋진 보라색 양복을 입은 라스의 모습은 평소와 너무나 달랐기에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의 검은 머리는 길고 매끈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늘어질 정도로 길었다. 그의 검은머리카락은 그의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에 닿았다. 그는 한쪽 겨드랑이 밑에 검은 가죽 가방을 끼고 있었다. 라스는 선착장에서 있던 내게 미소를 지었다. - P509

그는 가죽 가방 안에 화구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에서 그렸던 훌륭한 그림을 내게 보여 주겠다고 했다. 그는 여름에 집에 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을이 오면 그는 독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더 많이 배울 것이라고 했다. 라스는 독일에서 풍경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약 보름뒤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 줄 수 있으리라고 했다. 그는 여름이 되면 노르웨이에 머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 여름 방학을 맞아 독일에서 돌아온 라스는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들에게 각각 포옹을 건넸다. 그날 아침, 심지어는 아버지도 스타방에르의 선착장에서 라스의 포옹을 받았다. 우리는 함께 집으로 갔다.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검은 화구를 담은 검은 가죽 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라스, 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라스는 너무나 멋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 멋진 청년을 라스라고 짐작했음이 틀림없었다. 너무나 그림을 잘 그렸기에 지역 유지의 후원을 받아 독일로 갔던 라스. 그림을 더 잘 그리기 위해 독일로 유학 갔던 라스, 라스는 자랑스럽게 스타방에르 거리를 걸었다. 아버지는 라스가 신문에도 나왔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라스의 기사를 오려 집에 잘 보관해 두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신문에는 라스에 관해 갖가지 좋은 얘기만 실려 있었다고 했다. 라스는 스타방에르 거리를 걸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옆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나를 비롯한 형제자매들이 함께 걸었다. - P510

나는 바닥만 내려다보는 라스를 바라보며 그런 라스의 모습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는 스타방에르거리를 여기저기 돌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밖에 나가려 하지도 않는다. 간혹 집 밖에 나가더라도 그는 종종걸음으로 급히 걷기만 했다. 바로 그 때문에 라스는 가우스타 정신병원에 가야만 했다. 다시 건강해지기 위해서. 하지만 그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 - P511

넌 성인이야. 적어도 조금은 집에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라스가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반 라스는 더 이상 스타방에르 거리를 돌아다니지도 않았고, 시내에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을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나를 만나는 것도 피했다. 나는 바닷가로 뛰어가는 라스를 보았다. 그는 보트 창고 외벽에 기대앉아 비스듬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크고 온화했다. 그의 얼굴 주위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그는 벽에 기대앉아 파이프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그의 머리를 에워쌌다. 나는 하늘을 보며 앉아 있던 라스가 홀로 코웃음을 치는 것을 보았다.  - P512

지금 생선은 작은집 문에 걸려 있다. 아, 죽은 생선의 커다란 눈알이란! 생기라곤 전혀 없는 거뭇거뭇하고 커다란 생선 눈알은 뻣뻣하게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올리네는 생선 눈알이 자신의 영혼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생선 눈알은 그녀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조금의 변화도 없이 뻣뻣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눈알은 단지 공허하게 허공을 쏘아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선 눈알. 그것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생선 눈알이 그녀의 영혼을 꿰뚫어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라스가 생선 눈알을 빌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라스가 생선의 검고 뻣뻣한 눈알을 통해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영혼을? 그녀의 깊숙한 영혼을?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녀에게 내면 깊숙한 것이 있긴 할까? 어쩌면 그녀에겐 외면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진정 내면이라는 것이 있을까? - P513

올리네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검고 뻣뻣한 생선 눈알 속을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그녀가 생선의 눈알이 된 것 같았다. 올리네는 생선의 눈알을 빌려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닌, 생선 눈알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올리네는 검고 뻣뻣한 생선 눈알을 바라보며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생선 눈알도 평온해졌다. 뻣뻣한 생선 눈알이 변했다. 그녀는 아무리 원한들 그 눈알을 지닌 생선을 먹을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숨결이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올리네는 알리다에게 대답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자신의 숨결이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 피곤해졌다. 온몸이 축 늘어짐과 동시에 너무나 평온해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생선 눈알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생선 눈알과 라스의 그림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평온함에 몸을 맡기며 벽에 몸을 기댔다. 벽에 머리를 댄 채 앉아 있던 올리네는 그제야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생선 눈알과 평온한 빛뿐이었다. - P514

저자는 문학을 통해 정상성이나 차분함에 다가서기보다, 변화무쌍하고 두려움을 유발하는 인간 내면의 비밀, 어둠, 광기를 표현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 P519

기회가 된다면 그의 작품을 소리 내어 읽어 보면서 그 특유의 아름다운 리듬감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터다. - P5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 포스팅에서 ‘라스‘가 내적 갈등으로 인해 굉장히 힘든 상황임을 엿볼 수 있었는데, 오늘은 ‘올리네‘가 들고 온 생선을 통해 ‘라스‘의 감정상태를 간접적으로 표현해내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표현 방식이 어제는 좀 직접적이었다면 오늘은 생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한단계 거쳐서 간다는 점에서 어제보다는 좀 간접적이라고나 할까. 어찌됐든 어제나 오늘이나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 책의 제목처럼 ‘멜랑콜리‘하게 느껴진다.

연이어 읽다가 p.413에 밑줄 친 부분에서 ‘라스‘를 찾아 헤매던 누나 ‘올리네‘가 우여곡절 끝에 ‘라스‘를 찾아서 만나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제까지의 분위기와 약간 다른 점은 얼마전에 누나에게 돌멩이까지 거리낌없이 던졌던 ‘라스‘가 누나를 보고서도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이제 이렇게 살다 죽어야 하나. 그녀도 한때는 젊음을 자랑했던 적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지치지도 않고 보르그외위의 언덕 위, 무성한 덤불 사이를 뛰어다니곤 했다. 그녀는 아무리 거칠고 험한 숲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주저하지 않고 보르그외위 곳곳을 뛰어다녔다. - P407

올리네는 지금 작은집에 앉아 생선 눈알을 바라보고 있다. 생선에 묻은 피는 거의 다 말라 굳어 있었다. 올리네는 한 손을 뻗어 생선을 만져 보았다. 꾸덕꾸덕하고 찐득찐득했다. 그녀는 생선 눈알이 조금 전과 달리 그다지 날카롭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선 눈알은 꿈을 꾸는듯 몽롱하게 보였다. 그녀는 생선이 점점 쪼그라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 P407

올리네는 생선에서 손을 떼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허벅지도 나이를 이기지 못해 쭈글쭈글해졌다. 젊었을 때의 탱탱했던 피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허벅지는 핏기 없이 창백했고 쭈글쭈글했다. 문득 허벅지에 손을 대도 아무런 감각이 없음을 깨달은 올리네는 허벅지를 살짝 꼬집어 보았다. 역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녀는 허벅지의 감각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른 허벅지에 손을 가져가서 꼬집어 보았다. 역시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올리네는 차가운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P408

올리네는 난로에 불을 피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손잡이에 걸려 있는 생선을 바라보았다. 생선은 더 이상 신선해보이지 않았다. 눈알도 몽롱해 보였다. 올리네는 바위에 앉아있던 라스가 몸을 돌려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을떠올렸다. 라스는 왜 거기 앉아서 자신을 감시하느냐고 소리쳤다.
아냐 난 너를 보고 있지 않았어.
거짓말하지 마
아니라니까.
거기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잖아.
내가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니?
그런 건 아냐. - P409

나는 몸을 굽혀 돌멩이 한 개를 주워 드는 라스를 보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 손에 든 돌멩이를 뚫어지게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뒤통수에 대고 나를 째려보았다. 라스는 내게 돌멩이를 던졌다. 얼른 몸을 피한 나는 허공을 지나 우리집을 향해 날아가는 돌멩이를 보았다. 나는 돌멩이가 집 담벼락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라스는 서둘러 바위에서 내려왔다. 누군가가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다. 나는 대문 밖으로 나오는 아버지를 보았다. - P409

나는 아버지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서려 있음을 보았다. - P409

물론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차마 라스가 돌멩이를 내게 던졌고 내가 몸을 피하는 바람에 돌멩이가 집 담벼락으로 날아들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P410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아버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라스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틀림없이 바닷가 근처 어딘가로 뛰어갔을 것이다. 나는 그의 뒤를 밟겠다고 결심하고 나왔는데. 그는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를 다시 찾고 싶다면 나는 지금 당장 가야 한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  - P411

나는 몸을 일으켜 하늘을 쳐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있었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검푸른 바다에 하얀 파도가 넘실거렸다. 나는 라스가 하늘 같다고, 바다 같다고 생각했다. 항상 변하는 사람. 밝음에서 어둠으로, 흰색에서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라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바다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반면 나는 돌멩이와 습지 같은 사람이다. 누런 갈색, 그다지 울퉁불퉁하지도 않고 그다지 매끄럽지도 않은 사람. 가끔 꽃을 피우기도 하는 사람. - P411

내 눈에 띄었던 것은 라스가 남긴 발자국뿐이었다. 그렇다면 라스는 내가 짐작했던 대로 바닷가 저편으로 뛰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모래위에 남겨진 발자국은 오래돼 보이진 않았다. 발자국을 따라가던 나는 머릿속에서 라스의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왜 그는 갑자기 화를 내며 내게 돌을 던졌을까? 나는 그 때문에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만약 돌을 던진 사람이 라스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할까? - P412

나는 바위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바위 아래에는 작은 만과 작은 모래사장이 있었다. 내 동생 라스는 바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
라스.
라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누나왔어?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응.
나는 라스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얼른 이리로 와 봐. 누나에게 보여 줄게 있어. - P413

라스는 커다란 바위 아래 자리한 작은 암석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라스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따라와.
라스가 내게 손짓을 했다. 나는 암석 동굴의 입구에 서 있는 라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바로 여기야. - P413

라스가 암석 동굴의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온통 거뭇거뭇한 것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이건 석탄이야. 물과 섞은 것이지.
그래서 어쨌다고?
난 이걸 사용해.
이걸 무엇에 사용하는데?
내가 보여 줄게. - P414

라스가 바닥에 엎드리더니 엉금엉금 기어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쪽은 매우 어두웠기에 라스의 윤곽만 어렵풋이 보일 뿐이었다. 라스는 잠시 후 다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그는 동굴 안쪽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조각난 부목 같았다. 라스는 부목 조각을 들고 고개를 돌려 내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 내게 뭔가를 제대로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 P414

라스는 내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라스가 부목 조각에 그린 그림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 P415

난 석탄과 물을 사용해 작은 나뭇가지 끝을 깎아 내서 그림을 그린 다음에 손가락으로 번지게 한 거야. - P415

그는 부목 조각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부목에 그려진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그제야 나는 라스가 그린 것이 구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라스가 그린 것은 움직이는 구름이었다. 훌륭한 그림이었다. 라스는 지금껏 그런 그림을 꽤 많이 그렸다고 말했다. - P415

라스는 다시 엉금엉금 기어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후, 라스가 다시 기어 나와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내게 부목 한 개를 건넸다. 나는 그가 그린 것이 집 뒤편의 산과 나무배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라스가 참으로 재주 많은 동생이라고 생각했다. - P416

넌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질 때면 여기 와서 그림을 그렸던거니?
그럴 때도 있어.
나는 라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뚝뚝해졌음을 깨달았다. - P416

넌 기분이 안 좋을 때만 그림을 그리니?
라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집 뒤편의 산과 나무배를 그린 그림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그 그림이 우울할 때의 라스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고 느꼈다. 물론 그림 속의 산과 나무배는 눈에 익은 실제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그림이 가끔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때의 라스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거뭇거뭇하고 어두운 그림은 어둠에 빠져 있는 라스였던 것이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생명을 머금은 어둠, 빛을 발하는 어둠이라고 해야 할까. - P417

사실 난 누나 그림을 그린 적도 있어.
라스가 내 그림을 그렸다고? 그건 내가 거부하거나 결정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이미 내 그림을 그려 놓았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림을 가져올게.
나는 라스의 목소리가 별안간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 P417

라스는 다른 부목 조각들도 하나씩 차례차례 바닷속으로 던졌다. 그가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는 나를 지나쳐 뛰어가더니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갔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라스는 나 때문에 그림을 바닷속으로 던져 버렸다. 나는 분명 라스가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이다. 세상엔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 P418

이제 우린 이곳을 떠날 거야.
더는 견딜 수 없어.
이젠 이웃집 사람들이 우리 집에 돌을 던지기까지 하잖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너도 이해하지?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집을 부숴 버릴 거야. 그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서 다시 집을 지어 올릴 거야. - P419

나는 어머니가 소리 없이 우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내게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며 신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P420

바다는 어느새 거뭇거뭇하게 변했다. 먹구름이 잔뜩낀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 P421

라스는 어디 있니?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걔가 왜 섬을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장남이라면 집안일도 좀 도와야 하는데 말이지. 식구들의 배를 굶기지 않으려면. 아버지가 말했다. - P421

나는 바람에 사다리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렸다. 나는 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라스가 나무배를 바다 쪽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도대체 라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미쳤나?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왜 이런 날씨에 배를 바다에 띄우는 걸까? 라스는 세찬 파도에 흔들리는 나무배에 앉았다. 나는 그가 이런 날씨에 노를 저을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 P422

나이가 드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드네요.
아주 많이 힘들어요.
늙는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에요. 올리네가 말했다. - P433

짧은 다리, 긴 허리. 라스가 걷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과 많이달랐다. 그렇다고 그가 뛰어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라스는 항상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종종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나는 그의 덥수룩한 턱수염이 바람 때문에 양옆으로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어쩐 일인지 여느 때와는 달리 평온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렇다, 앞머리가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 자리한 그의 갈색 눈동자는 매우 평온해 보였다. - P436

그는 어깨에 톱을 지고 있었다. 틀톱. 라스는 그것을 틀톱이라 불렀다. 톱 중에서 제일 좋은 톱. 나는 라스가 틀톱을 어깨에 지고 종종걸음으로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라스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는 동네 사람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나무에 톱질을 해서 장작을 마련해 주곤 했다. 그는 일의 대가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거나 돈을 조금 받곤 했다. 라스는 장작을 마련하기 위해 일손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라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의 검고 덥수룩한 턱수염 뒤로 미소가 생겨났다. - P436

그들은 예술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아무것도.
그들은 예술을 소 똥구멍처럼 여겨요.
아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요. 라스가 말했다. - P439

그들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해요. 라스가 말했다.
화가라고 해서 다 죽여 버릴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거의 모든 화가들을 죽여야 해요. 모든 화가들을 죽일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거의 모두. 그가 말했다.
알리다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P439

그들은 죽어야 해요. 그들은 그림을 못 그리기 때문에 죽어야 해요. 그가 말했다.
알았어. 내가 말했다.
나는 그들을 죽일 거예요. 라스가 말했다. - P440

그땐 이미 장작을 엄청 많이 자른 뒤였죠. 매우 빠른 속도로 일을 했어요. 나는 그렇게 일을 빨리 하는 사람을 처음 봤답니다. 그녀가 말했다.
네, 라스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에요. 올리네가 말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죠. 알리다가 맞장구를 쳤다. - P442

올리네는 알리다가 자신의 남동생 중 한 명과 결혼한 여인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자식도 많이 낳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녀의 남동생도 그녀처럼 나이가 들고 건강도많이 악화되었을 것이다. 올리네는 세상일이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 P445

세상에, 내게 이런 날이오다니. 누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단 말인가. - P445

하지만 어쩌다 정신이 나가 버렸는지, 불쌍하기도 하죠. 알리다가 말했다.
맞아요, 불쌍한 인생이죠. 올리네가 말했다.
크게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결국은 그렇게 끝이 나 버렸으니. - P447

침대에 누워 마지막 날만 기다린다는 건 참 끔찍한 일이에요. 올리네가 말했다. - P447

올리네는 별안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에, 내가 노망이든 게 틀림없어. 그녀는 쉬버트와 결혼한 사람이 알리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알리다는 쉬버트가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지 않았던가. 이렇게 정신이 없을 수 있다니!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녀는 기억도 못 하고, 눈앞도 잘 볼 수 없고, 발에는 통증이 가실 날이 없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게다가 그녀는 소변도 참지 못한다. 대변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 P449

알리다는 단 한 번도 올리네가 하는 일에 만족하는 것 같지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게도 만족하지 않았고, 특히 라스에겐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라스가 없을 때면 비웃기까지 했다. 라스의 면전에서는 항상 듣기 좋은 말만 했지만, 라스가 없을 때면 좋은 말을 듣기가 힘들었다. - P451

알리다는 라스에게 절대 친절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라스는 알리다를 위해 그 많은 장작을 잘라 주고 손질해 주었건만 알리다는 라스를 존중하기는커녕 때때로 비웃기까지 했다. 라스가 알리다에게서 감사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아니, 라스는 알리다에게서 비웃음만 되돌려 받았을 뿐이다. 알리다가 다가와서 생각에 잠겨 있는 올리네의 팔을 잡아끌었다. - P451

창밖에서는 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 손에 죽을 거야. 저주받은 독일 놈 같으니 나는 라스가 장작에 도끼를 내려치는 소리를 들었다. 라스가 다시 소리쳤다. 왜, 싫어? 쓰레기 같은 놈. 왜, 싫으냐고? 싫어도 하는 수 없어! 라스는 다시 장작 위에 도끼를 내려쳤고, 알리다는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코웃음을 치며 내게 궛속말을 했다. 여기 가까이 와서 라스가 어떻게 일을 하는지 보세요. 알리다는 온 얼굴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내게 귓속말을 했다. - P452

빨리 여기로 와 보세요. 알리다가 나직이 말했다.
나는 알리다의 뒤에 몸을 숨겼다. 나는 벌목 통나무 앞에서 있는 라스를 보았다. 그는 자신의 틀톱은 작은집 벽에 기대어 세웠다. 한 손에 도끼를 든 라스는 야생의 미치광이처럼보였다. - P452

난 언젠가 너를 죽여 버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쓰레기 같은 놈!
넌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놈이었어. 결코! 그런데도 나는 그림을 그린답시고 다른 화가들을 괴롭혔지.
저주받을 새끼!
이곳 산드비겐, 이곳 스타방에르는 너 같은 쓰레기가 살 수있는 곳이 아냐!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선 살 수 없어 절대! 라스가 말했다. - P453

넌 도끼질도 하고 톱질도 하는구나. 내가 말했다.
난 도끼질을 하고 싶을 때는 도끼질을 하고, 톱질을 하고 싶을 때는 톱질을 해.
난 내가 원하는 걸 할 뿐이야. 라스가 말했다. - P454

알리다는 집에 남편이 아파 누워 있는데도 왜 올리네의 집에 와서 굳이 청소까지 해 주는 것일까. 참으로 이상하고 무례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치 올리네의 부엌 바닥이 자신의 남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올리네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해도 도움이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 P455

라스는 아버지의 집 다락방에서 살았다. 그는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릴 때마다 방문 앞에 ‘접근 금지‘라는 쪽지를 붙여 놓았다. 라스가 그 쪽지를 방문 앞에 걸어 놓았다는 것은 그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함을 의미했다. 라스는 그림을 그릴 때면 창가에 앉아 창밖의 지붕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무의미한 낙서 같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방문 앞에 걸린 쪽지에도 ‘접근 금지‘라고 적혀 있었다. - P460

나는 내 자식들이 세례를 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어. 단 한 명도 세례를 못 받게 했지.
열두 명 중에 단 한 명도 세례를 받지 않았단다.
난 내 신념을 굽히지 않았어. 아버지가 말했다. - P462

아버지, 저는 세례를 받고 견진 성사도 받을 생각이에요.
그건 올리네도 마찬가지예요. 라스가 말했다. - P462

그건 네가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야. - P4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포스팅에서 멜랑콜리아 I 이 끝났고, 오늘 부터는 멜랑콜리아 II 다. 1902년으로 시대 배경이 바뀌었고, ‘올리네‘ , ‘스베인‘ , ‘시그네‘ , ‘쉬버트‘ 등 처음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앞의 멜랑콜리아 I 과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하다.
.
.
.
읽다보니 올리네에게 라스와 쉬버트가 남매관계인듯 한데, 여기서는 라스는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오고 쉬버트도 곧 죽음을 앞두고 있는 듯 하다. 그나저나 라스는 멜랑콜리아 I 에 나왔던 그 ‘라스‘인 듯 한데...

올리네는 쉬버트의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문득 자신의 남동생인 라스에 대한 기억을 회상한다. 참 이상한 아이였다고, 독특했고 이해하기 힘든 친구였다고...

여기 일일이 밑줄치진 않았지만 라스와 쉬버트를 포함한 올리네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치는 못했던 것 같다. 식구의 수가 많았지만 그에 걸맞는 소득 수준이 못 되었기에 가난함을 면하기가 쉽지 않았고, 올리네의 부모님은 그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바닷가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는 등의 활동을 매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소설 속 내용에 근거하여 생각해본 내 주관적인 추측 혹은 생각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소질이 있었던 ‘라스‘는 자신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 열중하고 싶은데 반해 현실적인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해서는 아버지의 어부 일을 쉴새없이 거들어야 하는 상황이기에 자신의 꿈을 향한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어떤 자괴감에 빠져있는 듯 보였다. 그에 따라 자신이 꿈꾸는 이상인 ‘그림 그리는 것‘과 현실인 ‘생계유지관련 일‘ 사이에서 엄청난 괴리감을 느끼고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괴리감으로 인해 계속 방황하는 ‘라스‘는 근처 바닷가의 바위에 올라가서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때로는 인근의 다른 섬에 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온다든가 하는 등의 마음의 갈피를 쉽사리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있으면 그냥 적정선에서 타협하고 살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왜 쓸데없이 방황하면서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냐고, 뭐 이렇게 인생 피곤하게 사냐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독자인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멜랑콜리아 I 에 나왔던 내용과 연계지어 본다면 ‘라스‘의 이력이라는 것이 어업과 같은 생계유지활동보다는 뭔가 좀 더 고차원의 것(?) 혹은 좀 더 고상한 것(?)을 이루기 위해 지속적으로 훈련받고 교육받았던 삶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릴 때 지역 유지에게 후원을 받아서 독일로 유학을 갈 정도로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사람이 바로 ‘라스‘였고, 이를 통해 그림과 관련하여 그 업계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사람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그들과 교류하고 인맥을 쌓아왔던 ‘라스‘였다. 이렇듯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꽃피우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상황에 근접했던 사람이 (이후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떤 일로 인해 그 꿈을 이루기 힘든 상황이 되었을 때 느끼는 좌절감, 패배의식 등은 그 당사자에게 엄청난 심리적 타격을 가져다 주었던 것 같다. 이 소설에선 그 대상이 ‘라스‘로 대변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날때부터 단순히 먹고 살기만도 너무나도 바쁜 나머지 애초부터 원대한 꿈이라는게 아예 없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내적인 갈등이나 괴리감 같은 것은 살면서 특별히 느낄 일도 없었을텐데,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지역 유지로부터 후원까지 받아서 유학을 와서 자신의 꿈에 거의 근접했던 사람이 궁극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 느끼는 패배감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말할 수 없을정도로 그 데미지가 상당하다.

멜랑콜리아 I 을 읽다보면 ‘라스‘는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고 그로인해 자신은 대다수의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귀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정도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임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큰 사람이 자신이 꿈꿨던 것을 할 수 없거나 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은 감히 말로 하기 힘들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결국 이 엄청난 좌절감이 ‘라스‘를 미치게 한 것 같다고 보여졌다. 갑자기 뜬금없이 바닷가의 바위에 올라가서 눈물을 훔친다거나, 각종 섬들을 떠돌아다니며 혼자있고 싶으니 날 내버려두라는 등의 말들을 하는 것이 결코 생뚱맞은(?)일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정말로 미치면 이 정도는 정말 일도 아닐 수도 있다. 이보다 훨씬 더 한 짓도 서스럼없이 하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아닌가.

1902년 초가을, 스타방에르: 올리네는 지팡이를 짚고 한 발짝 한 발짝 힘겹게 바닷가의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다. 발이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지만 그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한 걸음씩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한 손에는 생선이 담긴 봉지를 든 올리네는 바닷가에서 그녀의 집까지 이르는 언덕길이 너무나 가파르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매일 이 언덕을 올라야 했다. 그녀는 바닷가의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집에서 홀로 살았다. 그녀의 집은 언덕 꼭대기에 나란히 서 있는 집들 중에서 가장 작은 하얀 집이었다. - P375

어부 스베인. 올리네는 지금까지 그에게서 얻거나 구입했던 수많은 생선들을 떠올렸다. - P376

올리네!
올리네는 발을 멈추었다. 누군가가 분명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올리네!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네는 길가에 있는 집을 돌아보았다. 2층 창문이 열려 있었다. 열린 창문 뒤로 시그네의 모습이 보였다. - P376

지금 내려갈 테니 잠깐만 기다려요. 시그네가 소리쳤다.
올리네는 창문 뒤에 서 있던 시그네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부른 사람은 시그네였다. 그녀는 시그네가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부른 뒤에야 그 소리를 들었음을 깨달았다. 최근에는 귀도 잘 안 들리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졌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어린 시절의 일뿐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다. 조금 전 시그네가 그녀를 불렀던가. 그렇다. 그 정도는 기억할 수 있다. - P377

시그네가 그녀를 소리쳐 부르는 일은 자주 없었다. 올리네와 시그네는 단 한 번도 친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앙숙으로 지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두 사람이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항상 예쁘고 우아했던 시그네가 올리네를 알게 모르게 경멸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377

올리네의 집이 지저분하다거나, 올리네의 자식들이 청결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시그네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올리네는 시그네가 그런 의중을 분명히 이런저런 방식으로 내보였음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시그네는 단 한 번도 올리네를 존중한 적이 없었다. 올리네도 물론 그런 시그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올리네는 시그네와 앙숙이라 해도 틀린 말은아닐 것이다. 아니, 엄밀하게 따져서 앙숙이라기보다는 친한 친구가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 P377

시그네는 올리네가 바닷가에서 생선을 사서 매일 같은 언덕길을 오르며 그녀의 집 앞을 수도 없이 지나쳤건만 단 한 번도 그녀를 소리쳐 부른 적이 없었다. 우연이라도 두 사람이 마주친 적은 없었다. 올리네는 언덕길을 오를 때마다 시그네가 자신을 일부러 피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시그네는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올리네는 도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 P378

쉬버트 말이에요. 시그네가 말했다.
올리네는 그제야 시그네가 자신을 소리쳐 부른 이유가 자신의 남동생 때문임을 깨달았다. 올리네는 자신과 너무나 사이가 좋았던 쉬버트가 무엇 때문에 시그네 같은 여인과 결혼했는지 알 수 없었다.
쉬버트의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어요.
아무래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시그네가 말했다. - P378

올리네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젠 쉬버트마저 떠나겠구나. 지난번엔 라스, 이젠 쉬버트, 두 사람은 나이도 거의 비슷했다. 올리네는 이미 라스를 떠나보냈다. 이젠 항상 건강하고 밝기만 했던 쉬버트마저 보낼 날이 다가왔다. 온종일 열심히 일을 했고 아픈 적도 거의 없었던 쉬버트마저 보내야 하다니. - P379

쉬버트는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올리네는 지금 당장 그가 숨을 거두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시그네는 틀림없이 상황을 과장해서 말한 것이다. 그녀는 항상 모든 일을 걱정하고 과장하곤 했으니까. 이제 그녀는 쉬버트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 P379

그나저나 쉬버트 생각을 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그가 곧 세상을 떠날 것인가? 라스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 쉬버트마저 세상을 떠나다니. 올리네는 곧 자기 차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지팡이를 짚고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자신이 이미 세상을 떠났더라면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 P382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 P384

올리네는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의 마지막 구간을 오르기 전에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평소 어부 보르의 집앞에서 잠시 쉬곤 했다. 그녀가 평소 발을 멈추고 쉬었던 곳은 조금 전 시그네가 잠시 불러 세웠던 그곳이 아니라, 바로 보르의 집 앞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시그네가 그녀를 불러 세웠기 때문에 평소와는 다른 곳에서 잠시 쉬었다. - P384

올리네에겐 자식들이 많다. 올리네는 그 작은 집에서 그 많은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집이 복잡하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 보자면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에겐 그 집이 크고 좋기만 했다. 게다가 그녀의 훌륭한 남동생 중 한 명은 유명한 화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지만, 어느 순간 그가 그리는 그림은 낙서처럼 변하고 말았다. - P385

그녀는 그가 그린 그림을 작은집 문에 걸어 놓았다. 낙서처럼 보이는 그림 속에서는 말을 탄 기사도 볼 수 있었다. 담뱃갑 포장지의 뒷면에 그린 그림. 그다지 눈여겨볼 만한 그림이라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생이 그린 그림을 문에 걸어 놓았다. 그녀는 자주 그림을 내려 버릴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거기에 걸려 있었던 그림이므로 조금 더 걸어 두더라도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손을 대지 않았다. 아름답고 훌륭한 그림을 그렸던 그가 말년에 이르러 낙서 같은 그림만 그렸다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 거부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삶은 현재가 중요한 법. 올리네는 현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P386

그녀의 남동생? 그녀가 남동생에게서 받았던 유일한 것은 지금 작은집 문에 걸려 있는 낙서 같은 그림이다. - P386

그녀는 그것을 화장실 문에 걸어 두었다. 결코 보기 좋은 그림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어디든 걸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그 그림을 작은집 문에 걸어 놓았음을 기억해 냈다. - P386

라스는 이상한 청년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했다. 미쳐 버린 청년. 사람들은 그를 미친 라스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 외에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그를 불렀다. 들쥐 라스. 들쥐. 주머니 속의 들쥐. 들쥐. - P386

그녀는 다시 발에 통증을 느꼈지만 계속 발을 옮겼다. 발을 옮겨야만 했다. 그녀는 배를 곯지 않도록 음식을 구입해야 하고, 난로에 불을 지피기위해 장작을 마련해야 한다. 그녀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지 않은가? 그녀가 자신의 삶을 제대로 꾸려 나가지 못한다면 최악의 가난으로 점철된 밑바닥 인생만 남을 것이기에, 그녀는 어쨌든 힘닿는 데까지 애를 써야 한다. 올리네는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아픈 발을 질질 끌며 힘겹게 언덕길을 올랐다. - P387

그녀에겐 살아 있는 남동생이 없다. 올리네는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남동생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던가? 그렇다. 그들은 세상을 떠났다. 모두. 마지막 남은 남동생이 세상을 떠난 건 불과 두어해 전이다. - P388

헤우게순 : 노르웨이 로갈란주의 북부에 위치한 도시. - P388

그녀는 이런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을 때의 삶을 샅샅이 다 아는 젊은이들은 없다. 올리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젊었을 때는 화장실에 생선을 들고 들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 P395

그녀는 조금 더 앉아 있으면 뭐라도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계속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라스도마지막 순간에는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그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미리암이던가? 엘리네던가? 아무튼 사납기 짝이 없는 여인의 집에서 다른 저소득자들과 함께 살았고, 침대에 누워 속옷에 용변을 보았다. 사실 그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 P396

그녀는 아이들 때문에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라스도 동네 아이들 때문에 편안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아이들은 라스를 졸졸 따라다니며 들쥐, 들쥐 라스라고 불러 대며 놀렸다. - P396

늙은 몸은 가만히 앉아 있을 때 행복해한다. - P397

라스의 눈, 그의 눈은 갈색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자주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우는 일이 자주 있었다. 심지어는 식사 중에도 갑자기 울곤 했다. 그는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갑자기 눈물을 흘렸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스는 참으로 독특하고 이상한 동생이었다. - P398

라스는 결코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는 화를 자주 냈고 다른 사람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말과 행동을 매우 조심했다. 나는 그가 살인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어쨌든 그의 성격은 매우 독특했다. 나는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 P398

내가 그의 뒤를 밟았던 날, 그의 갈색 눈동자는 검게 변해 있었다. 그날 아침 그를 보았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짙은 어둠이 어려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자리한 그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서 반짝였다.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제자리에서 튀어나올 듯 실룩거렸고,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그날 아침 내 앞에 서 있던 그의 눈동자는 그처럼 이상했다. - P398

왜 항상 이래야만 할까? 그가 말했다. - P400

누가 너에게 나쁜 짓이라도 한 거야?
난 누가 내게 나쁜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아. 라스가 말했다. - P400

라스는 누가 자기에게 나쁜 짓을 해도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라스는 물고기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의 굳어진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 P401

그는 습지를 넘어 바닷가 쪽으로 뛰어갔다. 그는 길을 따라 걷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발이 습지에 푹푹 빠지는 것을 보았다. 넘어졌던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켜 뛰기 시작했다. 그가 습지에 빠진 한쪽 발을 힘겹게 들어 올리면 다른 쪽 발이 습지에 잠겼다. 나는 라스가 바닷가 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갑자기 습지 중앙에 있는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나는 바위에 앉아 있는 그의 등을 보았다. 나는 라스가 두 손을 올려 눈가를 닦아 내는 것을 보았다. 나는 라스가 눈물을 훔친다고 생각했다. 라스는 왜 우는 것일까? - P401

나는 라스가 몸을 앞으로 숙이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는 것을 보았다. 라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나를 혼자 있게 해 줘! 나는 라스가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날 제발 가만히 내버려 둬. 뭐 특별한 건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 P401

나는 라스가 몸을 일으켜 바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두 발이 습지에 푹 빠졌다. 나는 라스가 습지에 빠진 발을 힘겹게 빼내어 바닷가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의 발이 다시 습지에 빠졌다. 그는 힘겹게 습지와 싸우며 바닷가로 향했다. 바다는 조용했다. - P401

나는 라스가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가서 앉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바위에 앉아 하늘과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어슴푸레한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그를 보며 비록 내 동생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내 동생은 매우 독특한 사람이다. - P402

나는 바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라스에게 눈을 돌렸다. 푸른 바다는 하얀 파도를 만들어 냈고, 푸른 하늘에는 하얀 솜털 같은 구름이 떠 있었다. 좋은 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고요함과 차분함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 P402

나는 바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라스를 보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옆에 앉고 싶었지만, 그러면 라스가 좋아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면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에는 라스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자주 말을 걸어 보곤 했었다. 하지만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등 하며 혼자 있고 싶어 했다. - P403

그는 내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한 여자라고 말했다. 라스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 P403

하지만 그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낼까?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가 이런 상태에 있을때면 무슨 생각을 할까? 왜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그는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까? 왜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것일까? 라스는 이런 상태에 접어들면 몇 시간이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아침 일찍 집에서 나갔고 어두워지면 돌아오곤 했다. 집에서 해야 할 일이 있건 없건, 그는 개의치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P403

아버지는 그에게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면 안 된다고 자주 주의를 주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끔은 아버지가 화를 낼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는 말수도 적고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라스에게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 P404

아버지는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서 낚시를 하거나 그물을 끌어 올리는 일 등. 라스는 아버지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알았다고 대답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라스가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은 계속 되풀이되었다. 마치 아버지의 말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마치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라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 P404

나는 라스에게 아버지와 약속을 했음에도 왜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을 되풀이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라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그저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었다고. 그는 아버지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 P404

나는 아버지가 라스에게 마음이 무거워지면 어디론가 가 보는 것도 괜찮지만, 사전에 무언가를 함께하기로 약속한 상황이라면 말없이 사라지는 일을 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만약 라스가 말도 없이 사라지면 아버지 혼자 해야 할 일이 많아질 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도 도움을 얻지 못하니 말이다. 특히 그물을 끌어 올리는 일은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하면 훨씬 수월하다. - P404

라스는 마음 같아선 항상 아버지의 일을 돕고 싶지만, 눈 뒤편에서 무언가 짓누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금방이라도 눈알이 터질 것만 같다고 했다. 라스는 아버지에게 아들의 눈이 터지기를 바란다면 여기저기 섬을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집에 붙들어 두면 된다고 했다. 여기저기 섬을 돌아다니는 일. 그것이 바로 라스가 했던 일이었다. - P405

아버지는 라스에게 만약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라고 말하며, 그물을 끌어 올리는 동안 나무배의 노를 저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아버지는 이미 먼 바다에 그물을 쳐 놓은 뒤였다. 라스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오솔길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갔다. 나는 그때 라스가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바다만 바라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마치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마치 크나큰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처럼 그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라스의 얼굴을 본 나는 그가 많이 우울하고 슬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P405

난 아버지를 도와야 해. 라스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말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하지 마.
알았어.
말없이 사라지진 않을게.
나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어. 라스가 말했다.
넌 아버지를 도와줘야 해.
응. - P405

나는 라스가 몸을 돌려 집 뒤편의 작은 바위 언덕 위로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라스가 아버지를 도와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며 흐느껴 울었다. - P406

나는 라스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먼 바다에 나가 홀로 그물을 끌어 올려야 한다. 라스는 밤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다음 날 아침 초췌한 얼굴로 돌아올 때도 있었다. 추위에 떨며 피를 흘리며 온 적도 있었다. 그렇다. 라스는 피범벅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어두웠고 난폭한 빛을 띠고 있었다. - P406

나는 그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는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눈동자로 말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 다녀왔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아버지가 집요하게 질문을 되풀이했던 적은 딱 한번 있었다. 아버지는 라스에게 어디에 다녀왔느냐고 연신 물었다.
어디서 뭘 했니, 라스? 라스는 아버지의 계속되는 질문에 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집을 나갔고, 나는 그가 언제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는지 기억할 수 없다. - P406

라스는 지금 바위에 앉아있다. 만약 그가 나를 발견한다면 당장 어디론가 뛰쳐나갈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내 모습을 들키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라스가 집을 나가서 온종일 뭘 하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라스의 뒤를 밟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몸을 숨긴 채 가만히 서서 라스를 보았다. 그의 뒤를 밟아도 좋을까? - P4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