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에서 멜랑콜리아 I 이 끝났고, 오늘 부터는 멜랑콜리아 II 다. 1902년으로 시대 배경이 바뀌었고, ‘올리네‘ , ‘스베인‘ , ‘시그네‘ , ‘쉬버트‘ 등 처음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앞의 멜랑콜리아 I 과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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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올리네에게 라스와 쉬버트가 남매관계인듯 한데, 여기서는 라스는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오고 쉬버트도 곧 죽음을 앞두고 있는 듯 하다. 그나저나 라스는 멜랑콜리아 I 에 나왔던 그 ‘라스‘인 듯 한데...

올리네는 쉬버트의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문득 자신의 남동생인 라스에 대한 기억을 회상한다. 참 이상한 아이였다고, 독특했고 이해하기 힘든 친구였다고...

여기 일일이 밑줄치진 않았지만 라스와 쉬버트를 포함한 올리네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치는 못했던 것 같다. 식구의 수가 많았지만 그에 걸맞는 소득 수준이 못 되었기에 가난함을 면하기가 쉽지 않았고, 올리네의 부모님은 그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바닷가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는 등의 활동을 매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소설 속 내용에 근거하여 생각해본 내 주관적인 추측 혹은 생각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소질이 있었던 ‘라스‘는 자신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 열중하고 싶은데 반해 현실적인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해서는 아버지의 어부 일을 쉴새없이 거들어야 하는 상황이기에 자신의 꿈을 향한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어떤 자괴감에 빠져있는 듯 보였다. 그에 따라 자신이 꿈꾸는 이상인 ‘그림 그리는 것‘과 현실인 ‘생계유지관련 일‘ 사이에서 엄청난 괴리감을 느끼고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괴리감으로 인해 계속 방황하는 ‘라스‘는 근처 바닷가의 바위에 올라가서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때로는 인근의 다른 섬에 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온다든가 하는 등의 마음의 갈피를 쉽사리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있으면 그냥 적정선에서 타협하고 살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왜 쓸데없이 방황하면서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냐고, 뭐 이렇게 인생 피곤하게 사냐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독자인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멜랑콜리아 I 에 나왔던 내용과 연계지어 본다면 ‘라스‘의 이력이라는 것이 어업과 같은 생계유지활동보다는 뭔가 좀 더 고차원의 것(?) 혹은 좀 더 고상한 것(?)을 이루기 위해 지속적으로 훈련받고 교육받았던 삶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릴 때 지역 유지에게 후원을 받아서 독일로 유학을 갈 정도로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사람이 바로 ‘라스‘였고, 이를 통해 그림과 관련하여 그 업계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사람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그들과 교류하고 인맥을 쌓아왔던 ‘라스‘였다. 이렇듯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꽃피우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상황에 근접했던 사람이 (이후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떤 일로 인해 그 꿈을 이루기 힘든 상황이 되었을 때 느끼는 좌절감, 패배의식 등은 그 당사자에게 엄청난 심리적 타격을 가져다 주었던 것 같다. 이 소설에선 그 대상이 ‘라스‘로 대변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날때부터 단순히 먹고 살기만도 너무나도 바쁜 나머지 애초부터 원대한 꿈이라는게 아예 없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내적인 갈등이나 괴리감 같은 것은 살면서 특별히 느낄 일도 없었을텐데,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지역 유지로부터 후원까지 받아서 유학을 와서 자신의 꿈에 거의 근접했던 사람이 궁극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 느끼는 패배감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말할 수 없을정도로 그 데미지가 상당하다.

멜랑콜리아 I 을 읽다보면 ‘라스‘는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하고 그로인해 자신은 대다수의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귀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정도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임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큰 사람이 자신이 꿈꿨던 것을 할 수 없거나 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은 감히 말로 하기 힘들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결국 이 엄청난 좌절감이 ‘라스‘를 미치게 한 것 같다고 보여졌다. 갑자기 뜬금없이 바닷가의 바위에 올라가서 눈물을 훔친다거나, 각종 섬들을 떠돌아다니며 혼자있고 싶으니 날 내버려두라는 등의 말들을 하는 것이 결코 생뚱맞은(?)일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정말로 미치면 이 정도는 정말 일도 아닐 수도 있다. 이보다 훨씬 더 한 짓도 서스럼없이 하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아닌가.

1902년 초가을, 스타방에르: 올리네는 지팡이를 짚고 한 발짝 한 발짝 힘겹게 바닷가의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다. 발이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지만 그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한 걸음씩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한 손에는 생선이 담긴 봉지를 든 올리네는 바닷가에서 그녀의 집까지 이르는 언덕길이 너무나 가파르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매일 이 언덕을 올라야 했다. 그녀는 바닷가의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집에서 홀로 살았다. 그녀의 집은 언덕 꼭대기에 나란히 서 있는 집들 중에서 가장 작은 하얀 집이었다. - P375

어부 스베인. 올리네는 지금까지 그에게서 얻거나 구입했던 수많은 생선들을 떠올렸다. - P376

올리네!
올리네는 발을 멈추었다. 누군가가 분명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올리네!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네는 길가에 있는 집을 돌아보았다. 2층 창문이 열려 있었다. 열린 창문 뒤로 시그네의 모습이 보였다. - P376

지금 내려갈 테니 잠깐만 기다려요. 시그네가 소리쳤다.
올리네는 창문 뒤에 서 있던 시그네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부른 사람은 시그네였다. 그녀는 시그네가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부른 뒤에야 그 소리를 들었음을 깨달았다. 최근에는 귀도 잘 안 들리고 기억도 가물가물해졌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억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어린 시절의 일뿐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다. 조금 전 시그네가 그녀를 불렀던가. 그렇다. 그 정도는 기억할 수 있다. - P377

시그네가 그녀를 소리쳐 부르는 일은 자주 없었다. 올리네와 시그네는 단 한 번도 친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앙숙으로 지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두 사람이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항상 예쁘고 우아했던 시그네가 올리네를 알게 모르게 경멸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377

올리네의 집이 지저분하다거나, 올리네의 자식들이 청결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시그네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올리네는 시그네가 그런 의중을 분명히 이런저런 방식으로 내보였음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시그네는 단 한 번도 올리네를 존중한 적이 없었다. 올리네도 물론 그런 시그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올리네는 시그네와 앙숙이라 해도 틀린 말은아닐 것이다. 아니, 엄밀하게 따져서 앙숙이라기보다는 친한 친구가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 P377

시그네는 올리네가 바닷가에서 생선을 사서 매일 같은 언덕길을 오르며 그녀의 집 앞을 수도 없이 지나쳤건만 단 한 번도 그녀를 소리쳐 부른 적이 없었다. 우연이라도 두 사람이 마주친 적은 없었다. 올리네는 언덕길을 오를 때마다 시그네가 자신을 일부러 피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시그네는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올리네는 도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 P378

쉬버트 말이에요. 시그네가 말했다.
올리네는 그제야 시그네가 자신을 소리쳐 부른 이유가 자신의 남동생 때문임을 깨달았다. 올리네는 자신과 너무나 사이가 좋았던 쉬버트가 무엇 때문에 시그네 같은 여인과 결혼했는지 알 수 없었다.
쉬버트의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어요.
아무래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시그네가 말했다. - P378

올리네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젠 쉬버트마저 떠나겠구나. 지난번엔 라스, 이젠 쉬버트, 두 사람은 나이도 거의 비슷했다. 올리네는 이미 라스를 떠나보냈다. 이젠 항상 건강하고 밝기만 했던 쉬버트마저 보낼 날이 다가왔다. 온종일 열심히 일을 했고 아픈 적도 거의 없었던 쉬버트마저 보내야 하다니. - P379

쉬버트는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올리네는 지금 당장 그가 숨을 거두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시그네는 틀림없이 상황을 과장해서 말한 것이다. 그녀는 항상 모든 일을 걱정하고 과장하곤 했으니까. 이제 그녀는 쉬버트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 P379

그나저나 쉬버트 생각을 하니 슬픔이 밀려왔다. 그가 곧 세상을 떠날 것인가? 라스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 쉬버트마저 세상을 떠나다니. 올리네는 곧 자기 차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지팡이를 짚고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자신이 이미 세상을 떠났더라면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 P382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 P384

올리네는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의 마지막 구간을 오르기 전에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평소 어부 보르의 집앞에서 잠시 쉬곤 했다. 그녀가 평소 발을 멈추고 쉬었던 곳은 조금 전 시그네가 잠시 불러 세웠던 그곳이 아니라, 바로 보르의 집 앞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시그네가 그녀를 불러 세웠기 때문에 평소와는 다른 곳에서 잠시 쉬었다. - P384

올리네에겐 자식들이 많다. 올리네는 그 작은 집에서 그 많은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집이 복잡하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 보자면 부족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에겐 그 집이 크고 좋기만 했다. 게다가 그녀의 훌륭한 남동생 중 한 명은 유명한 화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지만, 어느 순간 그가 그리는 그림은 낙서처럼 변하고 말았다. - P385

그녀는 그가 그린 그림을 작은집 문에 걸어 놓았다. 낙서처럼 보이는 그림 속에서는 말을 탄 기사도 볼 수 있었다. 담뱃갑 포장지의 뒷면에 그린 그림. 그다지 눈여겨볼 만한 그림이라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생이 그린 그림을 문에 걸어 놓았다. 그녀는 자주 그림을 내려 버릴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거기에 걸려 있었던 그림이므로 조금 더 걸어 두더라도 문제는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손을 대지 않았다. 아름답고 훌륭한 그림을 그렸던 그가 말년에 이르러 낙서 같은 그림만 그렸다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 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 거부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삶은 현재가 중요한 법. 올리네는 현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P386

그녀의 남동생? 그녀가 남동생에게서 받았던 유일한 것은 지금 작은집 문에 걸려 있는 낙서 같은 그림이다. - P386

그녀는 그것을 화장실 문에 걸어 두었다. 결코 보기 좋은 그림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어디든 걸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그 그림을 작은집 문에 걸어 놓았음을 기억해 냈다. - P386

라스는 이상한 청년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했다. 미쳐 버린 청년. 사람들은 그를 미친 라스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 외에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그를 불렀다. 들쥐 라스. 들쥐. 주머니 속의 들쥐. 들쥐. - P386

그녀는 다시 발에 통증을 느꼈지만 계속 발을 옮겼다. 발을 옮겨야만 했다. 그녀는 배를 곯지 않도록 음식을 구입해야 하고, 난로에 불을 지피기위해 장작을 마련해야 한다. 그녀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지 않은가? 그녀가 자신의 삶을 제대로 꾸려 나가지 못한다면 최악의 가난으로 점철된 밑바닥 인생만 남을 것이기에, 그녀는 어쨌든 힘닿는 데까지 애를 써야 한다. 올리네는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아픈 발을 질질 끌며 힘겹게 언덕길을 올랐다. - P387

그녀에겐 살아 있는 남동생이 없다. 올리네는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남동생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던가? 그렇다. 그들은 세상을 떠났다. 모두. 마지막 남은 남동생이 세상을 떠난 건 불과 두어해 전이다. - P388

헤우게순 : 노르웨이 로갈란주의 북부에 위치한 도시. - P388

그녀는 이런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을 때의 삶을 샅샅이 다 아는 젊은이들은 없다. 올리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젊었을 때는 화장실에 생선을 들고 들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 P395

그녀는 조금 더 앉아 있으면 뭐라도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계속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라스도마지막 순간에는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그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미리암이던가? 엘리네던가? 아무튼 사납기 짝이 없는 여인의 집에서 다른 저소득자들과 함께 살았고, 침대에 누워 속옷에 용변을 보았다. 사실 그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 P396

그녀는 아이들 때문에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라스도 동네 아이들 때문에 편안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아이들은 라스를 졸졸 따라다니며 들쥐, 들쥐 라스라고 불러 대며 놀렸다. - P396

늙은 몸은 가만히 앉아 있을 때 행복해한다. - P397

라스의 눈, 그의 눈은 갈색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자주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우는 일이 자주 있었다. 심지어는 식사 중에도 갑자기 울곤 했다. 그는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갑자기 눈물을 흘렸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스는 참으로 독특하고 이상한 동생이었다. - P398

라스는 결코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는 화를 자주 냈고 다른 사람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말과 행동을 매우 조심했다. 나는 그가 살인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어쨌든 그의 성격은 매우 독특했다. 나는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 P398

내가 그의 뒤를 밟았던 날, 그의 갈색 눈동자는 검게 변해 있었다. 그날 아침 그를 보았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짙은 어둠이 어려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자리한 그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서 반짝였다.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제자리에서 튀어나올 듯 실룩거렸고,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그날 아침 내 앞에 서 있던 그의 눈동자는 그처럼 이상했다. - P398

왜 항상 이래야만 할까? 그가 말했다. - P400

누가 너에게 나쁜 짓이라도 한 거야?
난 누가 내게 나쁜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아. 라스가 말했다. - P400

라스는 누가 자기에게 나쁜 짓을 해도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라스는 물고기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의 굳어진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 P401

그는 습지를 넘어 바닷가 쪽으로 뛰어갔다. 그는 길을 따라 걷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발이 습지에 푹푹 빠지는 것을 보았다. 넘어졌던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켜 뛰기 시작했다. 그가 습지에 빠진 한쪽 발을 힘겹게 들어 올리면 다른 쪽 발이 습지에 잠겼다. 나는 라스가 바닷가 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갑자기 습지 중앙에 있는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나는 바위에 앉아 있는 그의 등을 보았다. 나는 라스가 두 손을 올려 눈가를 닦아 내는 것을 보았다. 나는 라스가 눈물을 훔친다고 생각했다. 라스는 왜 우는 것일까? - P401

나는 라스가 몸을 앞으로 숙이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는 것을 보았다. 라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나를 혼자 있게 해 줘! 나는 라스가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날 제발 가만히 내버려 둬. 뭐 특별한 건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 P401

나는 라스가 몸을 일으켜 바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두 발이 습지에 푹 빠졌다. 나는 라스가 습지에 빠진 발을 힘겹게 빼내어 바닷가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의 발이 다시 습지에 빠졌다. 그는 힘겹게 습지와 싸우며 바닷가로 향했다. 바다는 조용했다. - P401

나는 라스가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가서 앉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바위에 앉아 하늘과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어슴푸레한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그를 보며 비록 내 동생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내 동생은 매우 독특한 사람이다. - P402

나는 바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라스에게 눈을 돌렸다. 푸른 바다는 하얀 파도를 만들어 냈고, 푸른 하늘에는 하얀 솜털 같은 구름이 떠 있었다. 좋은 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고요함과 차분함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 P402

나는 바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라스를 보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옆에 앉고 싶었지만, 그러면 라스가 좋아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면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에는 라스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자주 말을 걸어 보곤 했었다. 하지만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등 하며 혼자 있고 싶어 했다. - P403

그는 내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한 여자라고 말했다. 라스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 P403

하지만 그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낼까?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가 이런 상태에 있을때면 무슨 생각을 할까? 왜 그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그는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까? 왜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 것일까? 라스는 이런 상태에 접어들면 몇 시간이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아침 일찍 집에서 나갔고 어두워지면 돌아오곤 했다. 집에서 해야 할 일이 있건 없건, 그는 개의치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P403

아버지는 그에게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면 안 된다고 자주 주의를 주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끔은 아버지가 화를 낼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는 말수도 적고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라스에게 말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 P404

아버지는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서 낚시를 하거나 그물을 끌어 올리는 일 등. 라스는 아버지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알았다고 대답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라스가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은 계속 되풀이되었다. 마치 아버지의 말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마치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라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 P404

나는 라스에게 아버지와 약속을 했음에도 왜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을 되풀이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라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그저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었다고. 그는 아버지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 P404

나는 아버지가 라스에게 마음이 무거워지면 어디론가 가 보는 것도 괜찮지만, 사전에 무언가를 함께하기로 약속한 상황이라면 말없이 사라지는 일을 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만약 라스가 말도 없이 사라지면 아버지 혼자 해야 할 일이 많아질 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도 도움을 얻지 못하니 말이다. 특히 그물을 끌어 올리는 일은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하면 훨씬 수월하다. - P404

라스는 마음 같아선 항상 아버지의 일을 돕고 싶지만, 눈 뒤편에서 무언가 짓누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금방이라도 눈알이 터질 것만 같다고 했다. 라스는 아버지에게 아들의 눈이 터지기를 바란다면 여기저기 섬을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집에 붙들어 두면 된다고 했다. 여기저기 섬을 돌아다니는 일. 그것이 바로 라스가 했던 일이었다. - P405

아버지는 라스에게 만약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라고 말하며, 그물을 끌어 올리는 동안 나무배의 노를 저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아버지는 이미 먼 바다에 그물을 쳐 놓은 뒤였다. 라스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오솔길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갔다. 나는 그때 라스가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바다만 바라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마치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마치 크나큰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처럼 그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라스의 얼굴을 본 나는 그가 많이 우울하고 슬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P405

난 아버지를 도와야 해. 라스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말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하지 마.
알았어.
말없이 사라지진 않을게.
나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어. 라스가 말했다.
넌 아버지를 도와줘야 해.
응. - P405

나는 라스가 몸을 돌려 집 뒤편의 작은 바위 언덕 위로 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라스가 아버지를 도와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며 흐느껴 울었다. - P406

나는 라스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먼 바다에 나가 홀로 그물을 끌어 올려야 한다. 라스는 밤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다음 날 아침 초췌한 얼굴로 돌아올 때도 있었다. 추위에 떨며 피를 흘리며 온 적도 있었다. 그렇다. 라스는 피범벅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어두웠고 난폭한 빛을 띠고 있었다. - P406

나는 그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는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두운 눈동자로 말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 다녀왔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아버지가 집요하게 질문을 되풀이했던 적은 딱 한번 있었다. 아버지는 라스에게 어디에 다녀왔느냐고 연신 물었다.
어디서 뭘 했니, 라스? 라스는 아버지의 계속되는 질문에 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집을 나갔고, 나는 그가 언제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는지 기억할 수 없다. - P406

라스는 지금 바위에 앉아있다. 만약 그가 나를 발견한다면 당장 어디론가 뛰쳐나갈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내 모습을 들키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라스가 집을 나가서 온종일 뭘 하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라스의 뒤를 밟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몸을 숨긴 채 가만히 서서 라스를 보았다. 그의 뒤를 밟아도 좋을까?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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