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올리네는 자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의 기억도 희미해지고, 심지어는 기본적인 생리현상조차 온전히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로 몸 상태도 쇠약해졌다. 자신의 남동생인 라스는 이미 저세상으로 갔으며, 쉬버트 또한 오늘 내일하고 있다.

이렇게 실제로 나이 들어가는 것과는 별개로 올리네는 과거 주변 인물들과 나눴던 대화나 자신의 예전 기억들을 통해 ‘라스‘에 대한 일화들을 떠올리면서 독자들에게 ‘라스‘에 관한 이야기들을 전달한다. 읽으면서 ‘라스‘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의 심리상태는 어떨지 추측해 보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딱히 정상적이지는 않아보인다.

추가로 기억과 관련하여 올리네의 현재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과 반대로 아주 오래전 기억은 비교적 명확하다는 얘기들이 책에 나오는데, 이는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단기기억력은 떨어지지만, 오래전에 있었던 옛날 얘기같은 것들은 비교적 명확하게 얘기하는 것들을 생각해본다면 어느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올리네가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예전에 ‘라스‘와 있었던 일화들을 비교적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해보이지는 않는다.
.
.
.
올리네는 몸을 온전히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도 어부 스베인의 도움으로 생활을 영위해나간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만약에 스베인이 없었다면 올리네는 배를 굶주리다가 이미 저 세상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리네는 쉬버트의 임종을 앞두고 예전에 라스가 죽음을 앞두고 보였던 행동들을 떠올린다. 고개를 돌린채 아무도 보지 않으려 했던 라스처럼 쉬버트도 비슷하게 행동한다. 어찌됐건 간에 쉬버트도 결국에는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막판에 읽다보면 올리네의 기억의 왜곡이 점점 심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자신을 도와주었던 어부의 이름이 스베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에른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고, 이미 시그네의 집에 직접 가서 쉬버트의 죽음을 확인한 뒤에도 그 사실을 망각한 채 쉬버트를 보러 시그네의 집에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죽음이 가까워 올 수록 기억력이라는 것도 점점 왜곡되어 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p.510에 밑줄 친 내용은 라스가 자신이 꿈꾸던 멋지고 이상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는 듯 하다. 다만, 현실에서 이러한 모습을 경험해보지 못한채 죽음을 맞았던 라스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한편으로는 그 씁쓸함이 더욱 더 크게 배가되는 듯 하다.

마지막에 올리네가 생존을 위해 먹던 생선에 무언가 감정이입이 되면서 저자가 작품을 마무리하는 모습도 나름 신선하게 느껴졌다.

완독 후 작품 해설에서는 대체로 작품을 읽으면서 공감했던 부분들이 많이 있어서 ‘아, 내가 이 작품을 그래도 비교적 올바르게 읽었구나‘ 라는 안도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일부 놓쳤던 부분들에 대한 설명들도 추가로 볼 수 있어서 유익했던 것 같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일상을 제대로 건사할 수 없었다. 이런일이 그녀에게 일어나다니. 그녀는 이제 자비로운 신이 자신을 거두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은 라스도 데려갔고, 보아하니 곧 쉬버트도 데려가려 하는 것 같았다. 올리네는 조만간 자신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 P468

올리네는 라스가 그린 말을 보며 그것이 바로 라스라고 생각했다. 라스는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었다. 동시에 그 말은 올리네이기도 했다. 올리네는 두 사람을 말이라 생각했다. 라스는 겁에 질린 말이었다. 라스는 집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대문을 두드리면 항상 어디론가 사라졌다. - P469

나는 라스가 사람들과 마주치기를 싫어한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마저 피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누나고, 그가 잘 아는 사람이다. 내가 아니라면 그가 특별히 마주할 사람도 없지 않은가? 나와도 얼굴을 마주치기 싫어한다면 그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참 안타깝구나. - P470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
가끔은 조용히 앉아 있을 때도 있어. 그럴 때면 눈이 촉촉하게 젖어 오는 것을 볼 수 있어. 그러다 돌연 눈빛이 야생적으로 변하곤 하지.
난 그 아이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아버지가 말했다.
그저 그러려니 하세요, 아버지. 내가 말했다. - P470

라스는 참 특별한 아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어.
라스 같은 아이는 당최 찾아볼 수가 없어. 아버지가 말했다. - P470

맞아요, 라스는 참으로 특별한 아이예요.
아버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라스는 집 부근을 벗어난 적이 없단다.
생사가 걸린 문제가 아니라면 시내에도 나가지 않을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정말 그래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도 안 갈걸.
라스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아이야.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아이지. 아버지가 말했다. - P471

라스가 저러는 건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법이니까. - P472

아버지는 라스가 저런 모습을 보일 때면 단 한 번도 먼저다가가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라스가 어떤 반응을보일지 전혀 짐작할 수 없기에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는 라스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가끔 미친 듯 화를 내는 라스를 보면 스스로 원하고 좋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고 했다. - P472

다락방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라스가 적어도 친누나와는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가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해도 그건 그의 선택일뿐이다. 하지만 친누나와는 대화를 해야 한다. 나는 라스가 친누나에게 한마디쯤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문을 열 수 없었다. - P473

나는 라스가 문손잡이를 힘주어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라스는 누나가 대화를 하기 위해 찾아와도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누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 P474

나는 다시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라스는 여전히 문을 막고 있었다. 나는 손잡이를 놓아 버렸다. 그 순간, 손잡이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라스를 보았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그의 검은 머리와 턱수염을 보았다. 그의 머리는 야생마처럼 덥수룩했고, 그의 눈동자는 검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 P474

문에 걸려 있는 쪽지가 안 보여?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라스가 소리쳤다.
나는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로 했다. 라스는 ‘접근 금지‘라는 쪽지가 문에 걸려 있으면 방해받기 싫다는 의미라며 내 등에 대고 소리쳤다. - P475

나는 라스의 화난 목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라스는 계단 위에서 사람들은 바보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라고 했다. 그의 누나도 멍청하긴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소리쳤다. 나는 그가 일을 하기 위해선 고요한 환경이 필요한데 자기에겐 그런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 P475

라스는 가끔 정신이 홱 돌아 버릴 때가 있어. 난 그 이유를전혀 알 수가 없구나.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슬프게 흐느끼기도 해.
난 둘 중에 뭐가 더 나은지, 뭐가 더 나쁜지 모르겠구나. 아버지가 말했다. - P476

나는 단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는 버럭 화를 냈다. 아버지는 내게 라스를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나쁜 의도는 전혀 없다고. - P476

나는 라스가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
라스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라.
그 불같은 성격도 그렇고.
갑자기 우는 것도 그렇고.
라스가 평범하지 않은 건 확실해. - P476

하지만 어쩌겠니. 받아들여야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아버지가 말했다. - P477

등 뒤에서 종종걸음을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라스가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내 앞에서 발을 멈추고 땅을 내려다보던 라스는 내게 종이 쪽지 한 장과 그림 한 장을 건넸다. 나는 라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반짝였다. 라스는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뛰어갔다. - P477

나는 그가 건네준 그림을 보았다. 담뱃갑 포장지의 뒷면에 그린 그림이었다. 갈색 말한 마리 말의 뒤에 보이는 뾰족한 산등성이, 그리고 사람처럼 보이는 두 개의 형상. 나는 그림 속에서 마치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사람의 형상을 뚫어지게 보았다. 나는 집을 향해 뛰어가는 라스를 돌아보았다. 라스와 아버지가 함께 사는 집. 나는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라스를 보았다. 나는 라스가 건네준 그림을 들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 P478

이제 그녀는 발이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고 바닷가로 내려가야 한다. 그녀는 내리막길이라면 그럭저럭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오르막길이었다. 너무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 것은 힘들기 짝이 없었다. - P478

너무나 힘들었다. 너무나 아팠다. 사는 것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 P478

발이 아픈 건 잊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야 했다. 바닷가에 이를 때까지 오직 쉬지 않고 걷는 수밖에 없었다. - P479

이제 그녀는 쉬지 않고 걸어 바닷가로 갈 것이다. 쉬지 않고 걸을 것이다. 올리네는 생선을 잘 간수하지 못한 탓에 고양이가 훔쳐 가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다시 바닷가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행동을 했으니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 P479

오늘 잡은 생선을 벌써 다 처치해 버렸으니 어떡하죠?
하지만 여기까지 걸음을 하셨으니 다른 수를 찾아봅시다.
제가 바다로 나가서 고기를 잡아 드릴게요.
지금 당장 바다에 배를 띄우겠습니다. 어부 스베인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올리네가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죠. 함께 바다로 가요. 고기가 잡히는지 한번 시도는 해 봐야죠. 그가 말했다. - P481

그는 올리네가 끼니를 이어 갈 수 있도록 그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올리네는 그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어부 스베인은 우리가 세상에 함께 사는 이유는 서로 도와가며 살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 P481

올리네는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방금 일어난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 시그네는 정말 쉬버트가 올리네를 만나 보고 싶다고 말했던가? 올리네는 확실히 기억할수가 없었다. - P482

그녀는 이제 생리 현상도 스스로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나이가 든다는 것이 너무나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신이 자신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러면 이 모든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 P485

통증은 여전했다. 올리네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른 신이 자신을 거두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녀는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고 싶었다. 언제쯤이면 이 고통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그녀는 얼른 이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P486

지팡이를 짚고 생선을 든 채 구부정한 몸으로 힘겹게 발을 옮기던 올리네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집 앞에 서 있는 시그네가 보였다. 시그네는 대문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올리네는 시그네와 단 한 번도 사이렇게 지낸 적이 없었다. 시그네는 올리네가 길을 걸을 때 단한 번도 집 앞에 나온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녀는 올리네가 집 앞을 지나칠 때면 쏜살같이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올리네는 시그네와 결코 친하게 지낼 수 없었다. - P487

아니, 올리네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오래전에 일어났던 일들뿐이었다. 매우 선명하고 똑똑하게 올리네는 나이가 드니 그렇게 변했다고 생각했다. - P488

올리네는 지금 오느냐고 묻는 시그네의 목소리를 들었다. 혹시 겁이 나서 죽어 가는 동생을 아예 찾아보지도 않겠다고 마음먹은건 아니겠죠? 그 말을 들은 올리네는 그제야 남동생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맞아, 그렇지. 시그네는 이미 그날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녀에게 동생을 보러 오라고 재촉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녀는 쉬버트가 죽어 가고 있는데도 바닷가에 가서 생선을 사 왔다. 그녀는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이런 일이 있어난 것이 너무나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 P488

쉬버트………….
쉬버트, 넌 매우 특별한 아이였어.
너와 라스는 참으로 개성 있고 특별한 아이였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하지만 너는 라스와 달리 단 한 번도 불같이 화를 낸 적이없었어.
쉬버트…………. 올리네가 말했다. - P493

그녀는 쉬버트가 가끔 고집을 부릴 때도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쉬버트는 어렸을 때도 가끔 고집을 부리곤 했으니까. 그는 한번 마음을 먹으면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의 고집대로 밀어붙이는 사람이었다. 라스처럼. 올리네는 쉬버트와 라스가 고집이 센 것으로 치자면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한번 마음을 먹으면 누가 뭐라 하든 자기 뜻대로 하고야 마는 사람들이었다. - P496

라스는 자신의 턱수염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내가 보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면, 자신의 턱수염을 몇 번이고 쓰다듬기도 했다. 나는 라스가 자신의 턱수염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턱수염을 쓰다듬는 모습에서 그의 자랑스러움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을 때 매우 만족해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주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못된 여인이 그의 긴 머리와 턱수염을 잘라 버린 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었다. - P496

라스는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긴 머리와 턱수염을 자른 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라스에게 그처럼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나는 그가 빈민가의 다락방에 홀로 누워 죽음을 기다릴 때 그를 찾아본 적이 있다. 침대에 누워 있던 라스는 방에 들어서는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에게 나를 향해 돌아누우라고 부탁했지만, 라스는 돌아누우려 하지 않았다. 라스는 침대에 누워 벽을 바라본 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희끗희끗하고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있던 머리를 손으로 감싸려 했지만, 그의 머리에는 잿빛의 짤막하고 뻣뻣한 머리카락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그들은 라스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 P497

라스, 머리와 턱수염을 잘랐구나. 네가 머리와 턱수염을 자르리라곤 생각도 못 했어.
자기는 절대로 머리와 턱수염을 자르기 싫었지만 그들이 강제로 잘랐다고 힘없이 말하는 라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는 라스 곁에 가위를 들고 서있는 못된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나는 왜 라스의 머리와 턱수염을 잘라야만 했는지 주인 여자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청결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 P497

그녀는 방에 누가 들어오기만 하면 라스가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보이기 싫어한다고 했다. 그녀는 그 유명한 시인 셀란도 그곳에 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라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 유명한 셸란이 라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왔건만, 라스는 말없이 벽을 향해 돌아누워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그 유명한 시인 셸란이 라스에게 말을 걸었지만, 라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라스는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에겐 절대로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고 한다. - P498

나는 가루 담배를 라스의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라스는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나는 검고 묵직한 빛을 띤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갑자기 그의 눈동자가 변했다. 그와 동시에 라스의 태도도 변했다. 라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라스가 너무나 변화무쌍한 사람이라 어떻게 돌변할지 짐작조차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P499

쉬버트는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그녀를 이곳에 불렀고, 그녀는 그의 침대 옆에 앉아 그에게 말을 건넸다. 라스에게 했던 것처럼. 하지만 쉬버트도 라스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올리네는 두 동생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생각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쉬버트는 머리카락과 턱수염을 자르지 않았다는 것. 올리네는 쉬버트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 P500

어부 비에른은 참으로 선한 사람이다. 그는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녀에게 생선을 주었다. 어부 비에른이 아니었다면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은 이미 오래전에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부 비에른이 하늘 왕국에서 큰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늘의 신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도와준 어부 비에른에게 그에 걸맞은 상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504

이제 그녀는 집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쉬버트에게도 가 봐야 한다. 왜냐하면 시그네가 그녀에게 쉬버트를 보러 오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그네를 통해 그녀에게 와 달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시그네는 쉬버트가 올리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며 발걸음을 해 달라고 말했다.  - P504

문고리에 걸린 생선 옆에는 라스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한 남자와 말,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산등성이 그림은 대부분 누런색과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라스는 어느 날 그녀에게 뛰어와서 이 그림을 주고 갔다. 올리네는 그때 라스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음을 기억했다. 그림이 훌륭하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낙서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두말없이 그림을 받아서 작은집 벽에 걸어 두었고, 그 그림은 수년 동안 제자리를 지켰다. 세월이 갈수록 올리네는 그 그림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라스가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건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 라스가 그린 그림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그것을 단지 마음속으로만 간직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라스의 그림이 비록 낙서처럼 무의미하게 보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그림은 라스가 그린 것이니까. 그녀는 그림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라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그림을 그렸다면 그녀는 그림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림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 P508

그는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문득 나는 그의 눈동자가 하늘처럼 커다랗다고 느꼈다. 그의 커다란 갈색 눈동자는 하늘을 머금을 만큼 거대했다. 라스가 몸을 돌려 내게 소리쳤다.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둬, 나를 따라오지 마. 나는 나무배 위로 오르는 라스를 보았다. 멋진 보라색 양복을 입은 라스의 모습은 평소와 너무나 달랐기에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의 검은 머리는 길고 매끈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늘어질 정도로 길었다. 그의 검은머리카락은 그의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에 닿았다. 그는 한쪽 겨드랑이 밑에 검은 가죽 가방을 끼고 있었다. 라스는 선착장에서 있던 내게 미소를 지었다. - P509

그는 가죽 가방 안에 화구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에서 그렸던 훌륭한 그림을 내게 보여 주겠다고 했다. 그는 여름에 집에 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을이 오면 그는 독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더 많이 배울 것이라고 했다. 라스는 독일에서 풍경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약 보름뒤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 줄 수 있으리라고 했다. 그는 여름이 되면 노르웨이에 머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했다. 여름 방학을 맞아 독일에서 돌아온 라스는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들에게 각각 포옹을 건넸다. 그날 아침, 심지어는 아버지도 스타방에르의 선착장에서 라스의 포옹을 받았다. 우리는 함께 집으로 갔다.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검은 화구를 담은 검은 가죽 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라스, 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라스는 너무나 멋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 멋진 청년을 라스라고 짐작했음이 틀림없었다. 너무나 그림을 잘 그렸기에 지역 유지의 후원을 받아 독일로 갔던 라스. 그림을 더 잘 그리기 위해 독일로 유학 갔던 라스, 라스는 자랑스럽게 스타방에르 거리를 걸었다. 아버지는 라스가 신문에도 나왔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라스의 기사를 오려 집에 잘 보관해 두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신문에는 라스에 관해 갖가지 좋은 얘기만 실려 있었다고 했다. 라스는 스타방에르 거리를 걸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옆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나를 비롯한 형제자매들이 함께 걸었다. - P510

나는 바닥만 내려다보는 라스를 바라보며 그런 라스의 모습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는 스타방에르거리를 여기저기 돌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밖에 나가려 하지도 않는다. 간혹 집 밖에 나가더라도 그는 종종걸음으로 급히 걷기만 했다. 바로 그 때문에 라스는 가우스타 정신병원에 가야만 했다. 다시 건강해지기 위해서. 하지만 그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 - P511

넌 성인이야. 적어도 조금은 집에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라스가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반 라스는 더 이상 스타방에르 거리를 돌아다니지도 않았고, 시내에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을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나를 만나는 것도 피했다. 나는 바닷가로 뛰어가는 라스를 보았다. 그는 보트 창고 외벽에 기대앉아 비스듬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크고 온화했다. 그의 얼굴 주위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그는 벽에 기대앉아 파이프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그의 머리를 에워쌌다. 나는 하늘을 보며 앉아 있던 라스가 홀로 코웃음을 치는 것을 보았다.  - P512

지금 생선은 작은집 문에 걸려 있다. 아, 죽은 생선의 커다란 눈알이란! 생기라곤 전혀 없는 거뭇거뭇하고 커다란 생선 눈알은 뻣뻣하게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올리네는 생선 눈알이 자신의 영혼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생선 눈알은 그녀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조금의 변화도 없이 뻣뻣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눈알은 단지 공허하게 허공을 쏘아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선 눈알. 그것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생선 눈알이 그녀의 영혼을 꿰뚫어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라스가 생선 눈알을 빌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라스가 생선의 검고 뻣뻣한 눈알을 통해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영혼을? 그녀의 깊숙한 영혼을?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녀에게 내면 깊숙한 것이 있긴 할까? 어쩌면 그녀에겐 외면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진정 내면이라는 것이 있을까? - P513

올리네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검고 뻣뻣한 생선 눈알 속을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그녀가 생선의 눈알이 된 것 같았다. 올리네는 생선의 눈알을 빌려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닌, 생선 눈알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올리네는 검고 뻣뻣한 생선 눈알을 바라보며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생선 눈알도 평온해졌다. 뻣뻣한 생선 눈알이 변했다. 그녀는 아무리 원한들 그 눈알을 지닌 생선을 먹을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숨결이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올리네는 알리다에게 대답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리네는 자신의 숨결이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갑자기 너무나 피곤해졌다. 온몸이 축 늘어짐과 동시에 너무나 평온해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생선 눈알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생선 눈알과 라스의 그림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평온함에 몸을 맡기며 벽에 몸을 기댔다. 벽에 머리를 댄 채 앉아 있던 올리네는 그제야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생선 눈알과 평온한 빛뿐이었다. - P514

저자는 문학을 통해 정상성이나 차분함에 다가서기보다, 변화무쌍하고 두려움을 유발하는 인간 내면의 비밀, 어둠, 광기를 표현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 P519

기회가 된다면 그의 작품을 소리 내어 읽어 보면서 그 특유의 아름다운 리듬감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터다. - P5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