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과 ‘그 도시‘를 왔다갔다 했던 ‘나‘에게 고야스 씨는 p.444에 밑줄친 부분에서 ‘당신의 진정한 의지‘ , ‘당신 마음 가장 깊은 곳‘이라는 말들을 써가며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의지와 내가 마음에 진정으로 원하는 어떤 것은 다를 수 있음을 얘기한다. 독자인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다보면 마음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마음은 다른데 가있는데, 실제 내 몸과 행동은 그 마음과 관계없는 것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들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이유가 어떤 현실적인 이유나 기타 여건들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내 과도한 욕심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마음 속으로 추구하면서 현실과 이상간의 괴리감을 느끼고 그냥 좌절한 채 각종 좋지 못한 것들로 그러한 괴리감이나 공허함들을 채워나가면서 점점 더 이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경우들도 있을 수 있다.

흔히들 인생에는 정답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현실에서 이루어 내며 살아가는게 성공적인 인생이라면 성공적인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여기 끄적인 것들이 이 소설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거나 생뚱맞은 것처럼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님의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의도하는 메시지나 어떤 의미같은 것들을 찾아보려는 과정 자체가 나를 포함한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미가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설령 내가 생각해낸 어떤 메시지나 의미가 작가가 의도한 것과 좀 다를지라도 말이다.
.
.
.
뒤이어 계속 읽으면서 자신이 100% 원하고 바라던 것들이 어떠한 이유들로 인해 뒤틀렸을 때, 거기에 대한 대안을 찾아서 거기에 발맞추어 살아가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Plan B‘ 라는 표현이 적당할 듯 하다. 누구나 자신의 Plan A 대로 되기를 원하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디 인생이라는게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이 책의 인물들도 현실을 사는 우리 인생들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신이 계획하고 생각했던대로 인생길이 순탄하게만 풀려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살아남아있는 이상 죽는 날까지 어떻게든 살아내야하지 않겠는가.

과연 나의 Plan A는 무엇이었고 또다른 Plan B 는 혹은 Plan C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삶을 살아낼 것인가 생각해보게 만드는 오늘의 독서다. 참 이 작가님은 소설 내용자체도 물론 흡입력이 있지만, 독자인 나에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해보게 만드는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읽을 때마다 생각의 꼬리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
.
.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어느 순간 도서관에서 책을 엄청 열심히 보는 한 소년에게 ‘나‘의 시선이 간다. 처음 보는 소년이라 사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런저런 사연들이 많이 있는 친구였다. 근데 이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왠지 모르게 ‘나‘의 어릴적 모습이 오버랩 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건 또 뒤에 이어질 내용과 이어지는 복선인 듯한 냄새가 나는데...
.
.
.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위에서 말한 소년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일정한 반복적인 패턴이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것을 타산지석(?) 삼아서 ‘나‘도 ‘나‘의 행동 패턴을 돌아본다. 돌이켜보니 자신도 행동 양식이 그 소년과 좀 다르다 뿐이지 어떤 일정한 습관? 루틴? 이런 것들을 반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무언의 깨달음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또다른 무언가의 복선 같은 것일수도 있다. 이렇게 작가가 툭 던진, 얼핏보면 무심해보이는 메시지 같은 것들이 독자인 나로 하여금 이런저런 생각들을 자꾸 해보게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간혹 이 책에 리뷰를 쓰신 분들 중에는 내용이 애매모호한 느낌이 든다면서 약간은 비판적인 논조로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독자인 나의 경우는 오히려 이러한 약간의 불명확한듯한 암시(?)가 나를 포함하여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 하여 뒤에 이어질 내용들을 추측하거나 어떤 의미들을 찬찬히 생각해보게 만들어줘서 오히려 좋다고 느껴졌다. 뭐 읽는 사람마다 보는 눈과 생각들이 다를 수 있기에 비판적으로 보시는 분들의 의견도 그 자체로 존중할 필요는 있겠지만, 나는 그런 분들과는 생각의 결이 약간은 다른 듯 하다.
.
.
.
역시나 뭔가가 존재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자칫 ‘스포‘가 될 수 있기에 내용적인 것에 대해 추가적으로 말하진 않겠다.

다만, 내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확장해서 끄적여 본다.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들 그 존재 목적 혹은 이유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현실로 돌아와 이 세상에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목적 혹은 이유가 사람마다 자기가 속한 어떤 집단이나 조직에 따라 각자 다르겠지만, 그것이 어떤 위대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관계없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자신의 존재가 때로 하찮고 미미해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될 수 있기에 우리 각자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미 그렇게 잘 살고 계신분들은 그대로 쭉 잘 살아가시면 될 것이고, 자존감이 낮아져있거나 자신감이 부족한 분들일지라도 존재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분들이니 삶을 내려놓지 말고 어떻게든 삶의 이유나 목적을 찾아서 거기에 맞게 삶을 이어나가시길 바라는 바이다.

"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 의지라는 게 어떠한 것인지, 목적은 어디쯤인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실체 없는 개인적인 영혼에 지나지 않고, 죽음으로 인해 특별한 예지를얻은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당신 이야기에서 제가 추측할 수 있는 바는 사실 그 모두가 당신의 마음이 원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겁니다. 당신 마음이(당신은 모르는 곳에서) 그러기를 원했다―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그 수수께끼의 도시에 남겠노라 오롯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셨다고요. 하지만 당신의 진정한 의지는 달랐는지도 모릅니다. 당신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는, 그 도시를 나와 이쪽으로 돌아오기를 원했는지도 모르지요." - P444

"요컨대 제 의지를 초월하는 보다 견고한 어떤 의지라는 게,
외부가 아니라 제 안에 있다는 말인가요?"
"네. 물론 미흡하고 개인적인 추측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는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군요. 당신은 필시 자신의 의지로 그 불가사의한 도시에 들어갔고, 역시 자신의 의지로 이쪽으로 돌아온 겁니다. 당신을 튕겨낸 용수철은 당신 자신의 내부에 있는 특수한 힘일 테지요. 마음속 밑바닥의 강한 의지가 그 엄청난 왕래를 가능케 했습니다. 스스로의 논리와 이성을 초월한 영역에서." - P445

"고야스 씨는 그걸 알 수 있습니까?"
"아뇨, 그저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썩 믿을 만한 게 못 될지도 모르고요. 그래도 저는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사후의 영혼에 피부가 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네, 충분히 일어날 수있는 일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일어나진 않아요. 하지만 언젠가 어디선가는 가능합니다. 강한 의지와 순수한 마음이 있다면." - P445

"그녀는 어느 날 작별의 말도 없이 조금의 암시조차 없이 제앞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후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했어요. 연락 한 줄 없었고요. 그리고 저는 이렇게, 벌써 중년의 영역에 발을 들였지요. 그런 인간이 잃어버린 소년 시절의 기억을 찾아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오간다ㅡ과연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일까요?" - P447

"결국 저는 그 백 퍼센트의 마음이 다시 한번 찾아와주기를 지금껏 기다렸나봅니다. 혹은 과거에 제게 그 마음을 가져다 주었던 그 사람을." - P448

"아내에 대한 사랑에 필적할 만한 감정을 느끼게는 상대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용모가 뛰어난 분도, 인품이 훌륭한 분도, 죽은 아내가 그랬던 것만큼 제 마음을 떨리게 하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부턴가 이렇게 스커트를 입게 되었지요. 보수적인 산간 동네다보니, 괴상한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별난 남자에게 혼담을 내미는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 P448

"제가 하고 싶은 건 이런 얘깁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 P449

"여기서는 나이 차이도, 시간의 시련도, 성적 경험의 유무도대단한 요건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백 퍼센트인가 아닌가, 중요한 건 그뿐입니다. 당신이 열여섯에서 열일곱 살 때 상대에게 품었던 사랑은 실로 순수했으며 백 퍼센트의 마음이었지요. 그래요, 당신은 인생의 아주 이른 단계에서 최고의 상대를 만났던 겁니다. 만나버렸다, 라고 해야 할까요." - P449

"아내가 한 마디 말 없이 세상을 버림으로써 제 마음은 깊은상처를 받았습니다. 남모를 상흔이 생생하게 남았습니다. 마음의 중심까지 가닿는 중상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죽지 않고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이 구제할 길 없는 치명상이란 걸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으니까요. 뒤늦게 알아차렸을 땐 저는 이미 삶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계속 살아간다, 라는 레일이 제 앞에 깔리고 만 겁니다."
고야스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 P450

"그때를 경계로 저는 그전과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 것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 그 무엇에도 열정을 가지지못하게 된 겁니다. 제 마음의 일부가 타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마음에 입은 치명상으로 저라는 인간이 이미 반쯤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후 인생에서 제가 조금이라도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오직 하나, 이 도서관뿐이었습니다. 이 작고 개인적인 도서관이 있었기에 지난해의 그날까지 어찌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네, 저는 당신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당신이 마음에 입은 상처를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주제넘은 말인지도 모르지만, 마치 제 일처럼 말입니다." - P451

"당신은 그런 사정을 충분히 아시고서 저를 이 도서관 관장으로 선택한 건가요?"
고야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첫눈에 보고 알았습니다. 당신이 이 도서관에서 제 뒤를 이어야 할 사람이란 걸요. 그도 그럴 게 여긴 평범한 도서관이 아니니까요. 그저 많은 책을 모아둔 공공시설이 아닙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여야 합니다." - P451

"가끔 저 자신을 알 수 없어집니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혹은 잃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인생을 저 자신으로, 저의 본체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그저 그림자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 때면 제가 그저 나 자신의 겉모습만 흉내내서, 교묘하게 나인 척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 P452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 P452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ㅡ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는다? 대체 어디서 낙하한다는 걸까?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 P452

이 소년은 이른바 ‘캘린더 보이‘가 아닐까. 과거나 미래의 언제든 날짜만 듣고 무슨 요일인지 순식간에 알아맞히는 특수 능력이 있는 사람, 일반적으로는 ‘서번트 증후군‘으로 불린다. 영화 <레인맨>에 나왔던 인물도 그중 하나였다. 지적장애가 있는 경우도 많지만, 수학이나 예술 분에서 종종 비범할 정도로 특출난 능력을 발휘한다. - P457

내 생일이 정말 수요일인지 인터넷에서 확인해보고 싶었지판 도서관에 컴퓨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그날 퇴근 후 집에 있는 컴퓨터로 찾아봤더니 내가 태어난 날은 정말로 수요일이 맞았다). - P457

"그런데 생일이 무슨 요일이던가요?"
"수요일." 내가 말했다.
"수요일의 아이는 수심이 가득." 소에다 씨가 말했다. 이노래 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더 구스의 한 소절이에요. 월요일의 아이는 아름답고 화요일의 아이는 품위 있고, 수요일의 아이는 수심이 가득・・・・" - P458

사진기억력이라고 하죠, 책을 읽으면 내용을 고스란히 암기하는데, 받아들인 정보량이 워낙 방대하고 자세하다보니 실용적인 수준으로 연결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 P459

"하지만 저애는 고등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학교 대신 이 도서관을 오가며 서가의 책을 순서대로 읽어치우고 있죠. 아까도 말씀드렸듯 저애한테는 이곳이 학교인 셈이에요."
"그리고 읽은 책의 내용을 고스란히 암기한다?"
"이를테면 시마자키 도손의 《동트기 전》을 읽었다고 칩시다.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전문을 그대로 암송할 수 있어요. 꽤 긴 소설이지만, 상관없이 전부 기억해버려요. 글자 하나 구두점 하나 틀리지 않고 인용할 수 있죠. 하지만 그 책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호소하는지, 혹은 문학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건 아마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 P461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특수한 능력을 꺼림칙하게 여기기도 하죠. 특히 이렇게 작고 보수적인 마을에서 이질적인 것. 평범하지 않은 것은 배척되기 마련이고, 저애랑 엮이는 걸 꺼리는 이들이 많아요. 전염병 걸린 사람을 피해다니듯이. 적어도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은 없죠. 슬픈 일이에요. 알고 보면 무척 얌전한 아이고, 생년월일을 물어보고 다니는 걸 빼면 누굴 귀찮게 하지도 않는데." - P462

"하지만 어쨌거나 지식욕 자체는 의미있고 귀중한 것이고, 도서관은 그걸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도서관은 사람들의 지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 P462

"게다가 중학교 때 같은 반 여자애한테 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어서."
"문제라면, 어떤?"
"한 아이에게 흥미를 품고 졸졸 따라다녔어요. 특별히 예쁘거나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는데, 그 여자아이의 어떤 면에 엄청나게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죠. 따라다닌다고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에요. 말도 걸지 않고, 그저 가만히 뒤를 쫓기만 했어요. 바싹 붙지도 않고, 조금 떨어져서. 그래도 당하는 사람입장에선 당연히 기분이 나쁘죠. 여자아이 부모님이 교장 선생님을 통해 항의하면서 약간 문제가 됐습니다. 이 마을 사람은 모두 그 일을 알고 있고요. 그러니 자기들 아이가 저애 가까이 가는 걸 반기지 않아요." - P464

그리고 그 소년이 내게 말을 건 것도 생년월일을 물었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번 생년월일을 알고 나면(이어서 요일을 맞히고 나면)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전부 충족되는지도 모른다.
도서관 열람실 말고 다른 장소에서 내가 그 옐로 서브마린소년을 본 건 어느 월요일, 도서관 휴관일 아침이었다. - P465

그들은 어느새 내게 신기할 만큼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생전의 그들과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음에도. - P466

어쩌면 전에도 했던 이야기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괘념치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묘비를 향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묘비는 내내 말이 없었다. 돌은 대답하지 않고, 표정도바꾸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을 듣는 건 나뿐인지도 그래도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그 도시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았다.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정도로. - P468

두꺼운 구름이 바람에 실려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는 듯했다. 그런 구름을 보고 있으면 세계가 돌고 있음을 실감한다.
지구는 천천히 착실하게 회전하고, 시간은 쉼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 P468

설령 소년이 내 이야기를 한 마디도 남김없이 들었다 한들불리할 게 있을까? 만약 상대가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말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사실이 아니라 그저 꿈같은 이야기로 정리될 것이다. 환상적인 종류의 픽션으로, 그리고 나는 ‘몽상적 경향이 있는 인물‘로 분류될 것이다. 그뿐이다. 그러나 정밀한 사진기억력을 가진 소년의 귀에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들렸을까? 그의 마음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 P469

나는 그 소년에게 호감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고야스 씨에 대한 어떤 감정이 여태껏 강하게 남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추운 겨울날 아침, 마을 외곽의 절 묘지까지 일부러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 P470

뒤뜰로 향해 고양이 가족을 관찰했다. 고양이는 비바람을 피해 오래된 툇마루 밑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누군가가 골판지 상자와 낡은 담요로 잠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어미는 사람을 크게 경계하지 않아서 (도서관 직원들이 매일 먹을 것을 챙겨주기 때문이다). 내가 다가가도 흘끗 쳐다보기만 하고 딱히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새끼들은 후각에 의지해 꼬물꼬물 어미의 젖 근처로 모여 있고, 어미는 사랑스럽다는 듯 실눈을 뜨고 새끼들을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질릴 줄도 모르고 구경했다. - P471

그리고 새삼 떠올렸다.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는ㅡ그녀가 일찍이 가르쳐주었듯ㅡ개나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외뿔 달린 짐승들은 있었다. 밤꾀꼬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동물은 본 적이 없다(하긴 밤꾀꼬리도 소리만 들었지만). 아니, 동물만이 아니다. 벌레도 한 마리 보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그 도시에 필요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 없으면 안 되는 것만 존재를 허락받는다. 그리고 짐작건대 나 역시 그 도시에 필요한 존재였다. 적어도 한동안은. - P471

그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월요일 아침 일찍 고야스씨의 무덤을 찾았을까? 그저 예의를 위한 성묘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내 본능이 말했다). 어쩌면 알고 있을까? 고야스 씨의 영혼이 아직 생사의 경계에 해당하는 세계에 머무르면서 이따금 생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 P472

나는 소에다 씨에게 재작년 봄부터 기록해온, 이 도서관에서 그애가 읽은 책 리스트를 보여달라고 했다. 놀랄 만큼 많은 권수, 놀랄 만큼 많은 분야의 책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마누엘 칸트, 모토오리 노리나가, 프란츠 카프카, 이슬람교 경전, 유전자 해설서, 스티브 잡스 전기, 코넌 도일의 《주홍색 연구》, 원자력 잠수함의 역사, 요시야 노부코의 소설, 작년도 전국농업연감,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샤를 드골의 회고록까지. - P473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나의 열여섯, 열일곱 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정도 규모는 아니지만, 나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런 걸 그렇게 열심히 읽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책들을 필사적으로 독파하고, 잡다한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무엇이 자신에게 도움되는 지식이고 무엇이 쓸모없는 지식인지 알아보는 기술이나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 P473

스케일이 장대할 뿐 그 소년이 하고 있는 일도 근본은 같을지 모른다. 젊고 건강한 지식욕은 지칠 줄 모른다. 그러나 아우리 많은 정보를 욕심껏 자기 안에 욱여넣어도 도무지 충분할 순 없다. 세계에는 무한대에 가까운 양의 정보가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특수한 능력을 지녔다 한들 개인의 수용량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다. 바닷물을 양동이로 퍼내는 거나 마찬가지다ㅡ양동이의 크기는 저마다 다를지라도. - P474

"읽다가 재미없어서 중단한 책은 없나요?" 나는 물었다.
"아뇨, 제가 알기로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은 전부 끝까지 읽했습니다. 도중에 그만두진 않아요. 그애는 보통 사람처럼 재미있다 없다, 흥미가 생긴다 아니다 같은 기준으로 판단해 책을 취사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그애에게 책은 구석구석까지,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채집해야 하는 정보가 담긴 그뜻이에요. 가령 보통 사람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이 재미있다 싶으면 그후 크리스티 작품을 몇 권 더 이어서 읽곤 하잖아요. 하지만 그애는 그렇지 않아요. 책을 선택하는 데 계통이란 것이 없죠." - P474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새끼고양이들이 없어진 상황을 어떻게 느끼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소에다 씨도 그건 알지 못했다. 그가 새끼고양이들의 소멸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있기 때문이다. 그저 매일 뒤뜰에 고양이 가족을 보러 가던 습관이 없어졌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 P480

소년은 노란 잠수함 요트파카를 입지 않은 날은 영화 《옐로 서브마린》나오는 다른 캐릭터가 프린트된 갈색 요트파카를 입었다. 푸른 얼굴에 분홍빛 귀, 몸에 갈색 털이 난 기묘한 생물이다. 나도 영화를 봤지만 그 캐릭터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노웨어 랜드에 사는 노웨어 맨이다. 존 레넌이 그의 주제가를 불렀다. 하지만 도저히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옐로 서브마린 캐릭터‘를 검색하고, 그 파란 얼굴의 기묘한 등장인물이 ‘제러미 힐러리 불
박사‘라는 것을 알았다. 피아니스트이자 식물학자, 고전학자, 치과의사, 물리학자, 풍자작가・・・・・・ 뭐든지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아닌 남자. - P481

소년은 날마다 거의 같은 옷만 입었다. ‘노란 잠수함‘ 파카 아니면 ‘제러미 힐러리 붑 박사‘ 파카. 둘 중 하나다. 그리고 빛바랜 청바지에 복사뼈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농구화, 다른옷차림은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소에다 씨 말에 따르면 집이 유복한 편이고 어머니가 막내아들을 몹시 사랑한다 하니, 깨끗한 새 옷을 사주는 일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옷들은 소년이 마음에 들어서 스스로가 원해서 매일 입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저 익숙하지 않은 새 옷을 입는 걸 완강하게 거부해서일지도. 자세한 사정은 모를 일이다. - P482

매일 정해진 행동 패턴을 하나하나 정확히 짚어가며 답습하는건 그에게 분명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행위의 본질이나 방향성보다 반복 자체가 목적인지도 모른다. - P483

소년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나는 조금 쓸쓸하고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묘비 뒤에 숨어 내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기를 내심 기대했는지도 아니, 나는 내 이야기를 고야스 씨뿐 아니라ㅡ오히려 그 이상으로ㅡ소년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인지 그 이유는 나도 설명할 수 없다. 막연히 그렇게느꼈을 뿐이다. 순수한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 이야기를 듣고 소년이 어떤 감상을 가질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P484

겨울의 태양은 온 힘을 다해 빛과 온기를 지상에 던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했다.
세계는ㅡ사람들, 고양이들, 갈 곳 없는 영혼들은ㅡ더 많은 빛과 온기를 원하는 것이다. - P484

나는 여느 때처럼 묘지에서 삼십 분쯤 시간을 보내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역 근처 이름 없는 ‘커피숍"에 들러 뜨거운 블랙커피로 몸을 녹이고, 마찬가지로 블루베리 머핀을 먹었다. 조간신문을 읽으면서 귓결로는 벽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에롤 가너의 <파리의 4월>을 들었다. 이것이 매주 월요일의 내 소소한 습관이 되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지난주의 자기 발자취를 더듬는 것. 아무렴 옐로 서브마린 소년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내 생활도 같은 일의 되풀이가 아닌가.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반복이 내 인생의 중요한 목적으로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 P485

"제 영혼이 이런 형체를 가질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때가 되면 결국 다 사라질 겁니다." 고야스 씨는 언젠가 그런 말을 했다. 그의 영혼은 그 ‘일시적인 기간‘을 경과해 이미 어딘가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무로 빨려들어가, 두번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 P486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살아 있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와 조금 다른 형이상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묘하게 고요한 슬픔을 느끼게 했다. 그 슬픔에는 아픔이 없다. 그저 순수하게 슬플 뿐이다. 그의 한 단계 더 나아간 죽음을 가정함으로써, 무가 확실히 존재함을 전에 없이 가깝게 실감할 수 있었다. 손을 뻗으면 정말로 만져질 것처럼. - P487

나와 소에다씨는 고야스 씨라는 ‘부재의 존재‘를 사이에 두고 비밀을 공유하는 공모자 같은 관계가 되어 있었다. - P488

그후 한동안 봉투를 책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바로 열어볼마음이 들지 않아서다. 그러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ㅡ그런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 준비가 필요한지, 어떤 종류의준비여야 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열지 않는 편이 좋다. 잠시 이대로 묵히는 편이 좋다. 열이 너무 오른 무언가를 식히듯이, 본능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내게 그러라고 일러주었다. - P490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힌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무음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을 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필요한 건 적절한 시간의 경과였다. - P490

나는 그 흰색 인쇄용지를 봉투에서 조심스레 꺼냈다. 종이에는 검은색 잉크로 어떤 그림이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글은 없다. 나는 그 지도를 책상 위에 펼치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딱딱한 무언가로 등을 힘껏 얻어맞은 것처럼 강한 충격을 느꼈다. 그 충격이 내 몸안에서 모든 논리를, 모든 맥락을 말끔히 내쫓아버렸다. 방 전체가 크게 출렁이는 것 같은 물리적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균형을 잃고 양손으로 책상을 꽉 붙잡았다. 그대로 잠시 말을 잃고, 생각이 나아갈 길을 잃었다. - P491

그 종이에 그려져 있었던 건,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를거의 정확하게 묘사한 지도였다. - P491

그 지도를 앞에 두고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그렇다. 그것은 틀림없이, 높은 벽돌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의 지도였다.
콩팥처럼 생긴 가장자리 (아래쪽이 움푹 파였다), 완만하게굽이치며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줄기 아름다운 강 불길하고 깊은 웅덩이를 이루는 끝자락, 유일한 출입구인 문. 그 안쪽의 문지기 오두막, 강에 걸린 오래된 돌다리 세 개 (얼마나 오래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이 말라붙은 운하, 바늘 없는 시계탑, 그리고 한 권의 책도 놓여 있지 않은 도서관. - P4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 읽었던 부분에 이어서 영적인spiritual 것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계속 나온다. 이 소설에 자주 나오는 단어인 ‘그림자‘라는 것이 성경(바이블)의 <시편> 말씀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p.358에 밑줄친 부분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집에 하나 이상씩은 가지고 있을 법한 성경책을 한 번 찬찬히 읽어 보는 것도 어떤 영적인 세계를 느끼고 경험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특정한 종교를 갖고 안 갖고를 떠나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운‘이라는 것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 ‘운‘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과 어느정도 연계되어 있다고 본다면 이 세상에는 영적인게 일정부분 존재한다고 보는게 맞는것 같다.

사람의 생사화복이 다 똑같지 않고 사람마다 다들 조금씩 다른 것도 그렇고, 단지 미신인지 아니면 그냥 재미로 보는 건지는 몰라도 신문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보다보면 오늘의 ‘운‘세니 뭐니 하면서 생년 혹은 띠에 따라 그날의 ‘운‘세를 알려주는 콘텐츠들도 많으며, 또한 길거리를 다니다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들 중에 ‘사주카페‘ 나 ‘타로점‘ 같은 것들을 봐준다고 하는 가게들도 많이 있는게 현실이다. 실제로 그런 곳에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설사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어떤 ‘운‘이라는 것 혹은 영적인 세계의 존재를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는게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종교인이든 무종교인이든 관계없이 어느정도 공감대가 있을만한 얘기라고 본다.

잠시 소설의 내용에서 곁길로 샜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영혼이라는 것에 대해 어느정도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내용이 담겨있는 부분이 어제와 오늘에 걸쳐서 장황하게 나와있음을 볼 수 있었다. 어제 쓴 내용 중에 내가 온 몸에 전율이 일었던 것도 결국에는 영적인 이야기들이 내 안에 잠재해 있는 무의식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극해서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
.
.
영혼에 대한 얘기는 대략 이 정도로 접어두고, 뒤이어 도서관 직원인 소에다 씨가 고야스 씨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에게 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래저래 사연들이 이어진다. 인생이란걸 획일화 할 수는 없겠지만, 좋을 때가 있으면 안 좋을 때도 있고 그런 것들이 지속적으로 순환되는게 인생인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이야기들이었다. 너무나도 구구절절이 이어지는 얘기들이라 한두마디로 정리하긴 힘들지만, 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책 몇 페이지 속에서 아주 응축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유감스럽지만 언제든 원할 때 이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기회는 제한되어 있어요. 시간도 결코 길지 않고요. 그러니까 언제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는 저도 모른답니다." - P357

고야스 씨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성경을 읽으십니까?"
"성경? 기독교의 성경 말인가요?"
"네, 바이블 말입니다."
"아뇨,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도가 아니라서."
"아, 저도 기독교도는 아니지만, 신앙과 관계없이 성경을 읽는 걸 좋아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시간이 나면 펼쳐들고 띄엄띄엄 읽었는데, 그러다가 습관으로 굳어졌답니다. 암시가 풍부한 읽을거리고, 배우고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그중 <시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 P358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네, 이해하시겠습니까?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네, 저는 옛날부터 이 말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만, 그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한 건 죽어서 이런 몸이 되고 나서였습니다. 그래요, 우리 인간은 그저 숨결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버린 제게는 이미 그림자조차 달려 있지 않습니다." - P359

"당신은 아직 이렇게 살아 계시지요." 고야스 씨가 말했다.
"그러니 부디 목숨을 소중히 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아직 검은 그림자가 달려 있으니까." - P359

나는 큰맘먹고 그의 등을 향해 말했다.
"고야스 씨, 사실 저는 모든 주민에게 그림자가 없는 그곳에서도 지금처럼 도서관 일을 했습니다. 이것과 똑같이 생긴 장작 난로가 있는 작은 도서관이었습니다." - P359

고야스 씨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반지하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고야스 씨가 사라지고 나니 방금 전까지 그가 여기 있었던 것 자체가 환상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심이 덮쳐왔다. 나는 여기에 계속 혼자 있었고, 그저 막연한 망상에 잠겼던 게 아닐까. 그러나 환상도 망상도 아니었다. 책상 위에 남은 빈 찻잔 두 개가 그 증거다. 한 잔은 내가, 다른 한 잔은 고야스 씨가ㅡ혹은 그의 유령이 (혹은 일시적인 육체를 동반한 그의 의식이)ㅡ마셨다. - P360

"좀 묘한 말이지만, 제가 고야스 씨의 됨됨이를 가까이서 좀더 밀접하게 알게 된 건 오히려 돌아가시고 나서였어요. 살아 계실 때는, 뭐랄까, 항상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듯 초연한 분위기를 풍기셨거든요. 차갑다거나 젠체한다는 건 절대 아니고, 저희를 대하는 태도는 상냥하고 친절했지만 주위의 현실적인 것들에 어째 관심을 두지 않는달까,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었어요." - P370

"하지만 돌아가신 뒤로는, 즉 영혼만 남고 나서는 제 눈을 똑바로 보고 진심을 담아 말씀하시더군요. 성격도 그전과 달리 활기차고 인간미 있게 바뀐 것 같았고요. 죽은 뒤에 인간적으로 더 활기차졌다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때까지 내면에 소중히 감추고 있던 것이 죽음과 함께 밖으로 드러난게 아닐까요." - P370

"생전의 고야스 씨 마음을 가리고 있던 단단한 껍데기 같은것이 사라졌다."
"네. 정말로 그런 느낌이었어요." 소에다 씨는 말했다. 마치 봄이 찾아와 쌓인 눈이 녹고, 그 아래서 여러 가지가 차례로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 P370

결국 인생은 대부분이 타협의 산물 아닌가. - P376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열렬한 사랑보다는 오히려 종합적인 인간 평가에 가까웠다. 그녀가 인생의 파트너로 원한 건 불타는 정열이 아니라 부침이 적고 안정된 인간관계였다. - P379

고야스 씨는 한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 고뇌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대로 약간의 수정과 가필을 하여 다시 자기 아이에게 물려준다ㅡ결국 자신은 단순한 일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일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령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 널리 회자될 만한 일을 이뤄내지 못한다 한들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이렇게 어떤 가능성을ㅡ그저 가능성일 뿐이라 해도ㅡ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껏 살아온 의미가 있지 않은가. - P380

그건 그에게 싹튼 완전히 새로운 시각이자, 지금껏 해보지못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보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망설임과 울분이 사라지고 거의 난생처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남몰래 가슴에 품었던 모든 야심을, 혹은 몽상과도 닮은 희망을 접고, 지방 소도시의 중견 양조회사 4대 경영자로서 안정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 P380

그것이 고야스 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들이어도 좋고 딸이어도 좋다. 그 아이가 나의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계승해준다면. - P382

어쨌거나 인생은 장기전이다. 그 길에 아무리 큰 슬픔이 있더라도, 상실과 절망이 기다리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 P389

어쨌거나 전부 일어날 일이라서 일어난 거야. 누구의 탓도 아니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우연히도 여러가지가 운 나쁘게 한꺼번에 겹쳐버린 거야.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이제 와서 하나하나 따져본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진 않아. - P391

물론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를 잇따라 잃은 일, 마음에 깊이남은 그때의 상처가 이른바 ‘기행‘의 근본적인 원인이리란 건 누구나 수월히 상상할 수 있었어요. 그전에는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으로 평범한 생활을 해왔으니까. 하지만 신기한 일이라고 할까요, 베레모에 스커트라는 별난 차림을 한 뒤로 고야스씨가 예전과 확 달라져서 매우 명랑한 성격이 된 것 같았어요.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창이 활짝 열리고, 어둡고 습하던 방에 봄볕이 가득 흘러드는 것처럼요. - P402

"피리 부는 사나이는 마지막에 가서 모든 아이들을 마을 밖으로 데려가버리죠. 맞나요?"
"맞습니다." 소에다 씨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하멜른 마을 사람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쥐를 잡아달라고 부탁하고는 일이 끝나고도 약속했던 보수를 치르지 않았어요. 그는 그 대가로 마법의 피리를 불어 마을 아이들 모두를 흘려 깊은 동굴로 이끌고 가버리죠. 남은 건 다리가 불편해 행진에 따라가지 못했던 남자아이 한 명뿐이었어요. 그렇게 피리 부는 사나이는 최종적으로 불길한 마술적인 존재가 되었지요.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고야스 씨에게는 누군가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고 그런 기미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감각을 느끼는 바를 솔직하고 꾸밈없이 따랐을 뿐이에요. 다른뜻도, 목적도 없이 자기 모습이 누군가에게 어이없게 비치건, 조롱을 당하건, 혹은 누군가를 매료하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겁니다." - P404

"마치 바뀐 옷차림을 계기로 다른 인격으로 갈아탄 것처럼."
"실은 정말로 다른 인격이 되었는지도 모르죠." 나는 말했다. "지금까지의 인생과 결별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서." - P405

"고야스 씨가 사비를 쏟아부어 이 도서관을 설립한 건 첫째로 자신이 그려온 이상 속의 도서관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것이 오랜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편안한 분위기의 특별한 장소를 마련하고, 많은 책을 모아두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골라 읽는 것, 그것이 고야스 씨가 생각한 이상적인 소세계였습니다. 아니, 소우주라고 해야 할까요. 젊어서는 스스로 소설가가 되기를 열망했지만 어느 시점에서 그 바람을 접은 뒤로, 그리고 아내와 자식을 잃은 뒤로는 그것이 그분 인생에서 유일하고 간절한 소망이었던 것 같아요." - P406

"물론 고야스 씨가 이 도서관을 사랑했고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는 건 틀림없어요. 고야스 씨는 이 도서관에 있을 수 있음을 기뻐했습니다. 그건 분명해요. 그렇다고 심적으로 충족되있는가 하면, 아마 아니었으리란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고야스씨 마음에는 깊은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것 같았어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구멍이." - P407

겨울이 길고 혹독한 고장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책을 많이 읽어요. - P408

고야스 씨는 평화롭고 따뜻한 가정을 가져야 마땅한 분이었습니다. 단란한 가족들과 사랑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하는 분이었어요.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럴 자격이 충분했고요. 그래서 저는 그분이 그렇게 홀로 인생을 마치게 된 일을 슬프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고야스 씨는 부인과 아이를 잃은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던 거예요.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을 늘 가슴에 끌어안고 살아온 겁니다. - P410

"살아 있는 당신과 죽은 고야스 씨가 그처럼 양호한 관계를 맺고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죠. 저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일이고요." - P418

"고야스 씨가 진정한 의미로는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분이 이 도서관에 존재한다는 기척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네, 그럴 수 있죠." 소에다 씨는 말했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 P419

그래도 컴퓨터 없는 일터는 나름대로 신선했고 다른 세계에 길을 잃고 흘러든 것처럼 불가사의한 어긋남이 느껴졌다. - P421

며칠 전 소에다 씨와 나눈 긴 대화, 고야스 씨에 대한 얘기를 하나하나 순서대로 떠올리며 볼펜으로 메모지에 그 요점들을 써내려갔다. 빠뜨린 게 없도록, 중요한 포인트를 깜박하지 않도록 그리고 메모를 다시 읽으며 각각의 요점을 나름대로 생각해봤다. - P421

그렇다, 죽은 자의 영혼 스스로도 자신이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 모른다. 살아 있는 내가 알 턱이 있겠는가? - P424

내가ㅡ다치기 쉬운 육체와 불완전한 사고력을 지녔을 뿐인, 현세라는 지면에 하릴없이 묶인 내가ㅡ할 수 있는 일은, 모르긴 해도 그가 처한 사정이나 형편이 충족될 때 고야스 씨의 유령이 내 앞에 출현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온통 침묵에 휩싸인 반지하의 그 정사각형 방에서, 오래된 난로에 장작불을 지피며. - P424

가끔 무언가에 실질적으로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건 제법 괜찮은 기분이다. - P425

삽으로 눈을 퍼 카트에 실으면서, 굶주림과 추위로 목숨을잃어갔던 단각수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밤이 밝으면 그들 중 몇 마리가 서식지 바닥에 하얀 눈옷을 덮어쓰고 드러누워 있었다. 누군가의 죄를 떠안고 대신 죽어간 이들처럼. - P426

흰 눈으로 둘러싸인 곳에 혼자 서서 머리 위 새파란 하늘을올려다보면 가끔 나도 알 수 없어졌다. 내가 지금 과연 어느세계에 속해 있는지.

‘이곳은 높은 벽돌 벽의 안쪽일까, 아니면 바깥쪽일까.‘ - P426

인적 드문 아침 시간에 꽃다발을 들고 마을을 걷자니 나자신이 지금의 내가 아닌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를테면 나는 열일곱 살이고, 맑은 휴일 아침, 꽃다발을 들고 걸프렌드의 집으로 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현재의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 섞여든 듯한 기묘한 감각이다. - P427

아니면 나인 척하는, 내가 아닌 나인지도 모른다. 거울 속에서 마주보는 건 내가 아닌 나인지도, 영락없이 나처럼 보이는, 그리고 나와 똑같은 동작을 하는 다른 누군가인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도 없지는 않다. - P427

부인의 이름은 분명 ‘미리‘일 것이다. 달리 읽는 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야스 미리"라고 나는 몇 번 조용히 읊어보았다. ‘이치를 보다‘, 상당히 심오한 이름이다. 그리고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마지막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는 건 생각해보면 슬픈 일이다. - P429

나는 묘비 앞에 서서 오랫동안 그 숫자를 바라보았다.
그 숫자 자체가 소리 높여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때로는 말보다 숫자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 P429

천장 가까이 붙어 있는 소형 스피커에서 데이브 브루벡 쿼텟이 연주하는 콜 포터의 오래된 스탠더드 넘버가 낮게 흘러나왔다. 맑은 물줄기를 연상시키는 폴 데즈먼드의 알토색소폰 솔로. 귀에 익은 곡인데 도저히 제목이 생각나지 않았다. 비록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도 조용한 휴일 아침에 듣기에 어울리는 음악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살아남아온 아름답고 기분좋은 멜로디. 나는 잠시 아무 생각 않고 멍하니 그 음악에 귀기울였다. - P431

여자는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아주 미인은 아니어도 인상 좋은 얼굴이었다. 화장은 옅다. 마음먹으면 더 젊어 보일 수 있을 텐데, 별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면에도 적당히 호감이 갔다.
"실은 조금 전까지 무덤 앞에 있었어요. 정말로는 아직 죽지
많은 사람의 무덤 앞에" ,  나는 자리를 뜨면서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물론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 P432

그러다 문득ㅡ마치 발밑의 풀숲에서 갑자기 새가 날아오르는 것처럼ㅡ그 제목을 생각해냈다. 역 근처 커피숍에서 흘러나오던 콜 포터의 스탠더드 넘버 제목을. <Just One of Those Things(흔히 있는 일이지만)>다. 그리고 그 멜로디가 의식의 벽에 들러붙은 주문처럼 귀 안쪽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 P434

어떻게든 잠들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한들 헛일일 것이다. 위스키도 브랜디도 소용없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밤, 아마도 무언가가 나를 재우지 않으려는 것이다. 무언가가...... - P435

집에서 오지도 않는 잠을 기다리는 건, 거의 오 분 간격으로 시곗바늘을 쳐다보는 건 더 이상 사양이었다. 그럴 바에야 추운 바깥을 정처 없이 걷는 편이 나왔다. - P435

매섭도록 추운 밤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추위를 환영했다. 냉기는 내 몸을 안쪽부터 조이고 쥐어짜며, 머릿속을 부옇게 채웠던 생각을 잠시나마 마비시켰다. 찬바람에 찔끔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덕분에 조금 전까지 귓속에서 울리던 종잡을수 없는 멜로디는 말끔히 사라졌다. 북쪽 지방의 겨울이 지닌 미덕이라고 해야 할까. - P436

걸으면서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건그저 기분좋은 공백이었다. 혹은 무였다. 눈의 예감을 품은싸늘함이 무쇠팔처럼 내 의식을 호되게 추궁하고 지배했다.
춥다는 것 말고 다른 감각이 파고들 틈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리고 문득 깨닫고 보니, 내 발길은 저절로 도서관 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신은 눈신이 주인인 나보다 더 명료한 의지를 지닌 것처럼. - P437

"무덤에 들어간 건 결국 세 사람의 유골일 뿐, 뼈와 영혼은 전혀 연관이 없어요. 네에, 뼈는 뼈, 영혼은 영혼입니다ㅡ물질과 물질이 아닌 것. 육체를 잃은 영혼은 끝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 연유로, 이렇게 죽어 사후세계에 와서도 저는 생전과 다를 바없이 외톨이입니다. 아내도 아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묘비에 셋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 결국 제 영혼도 마땅한 시간이 흐르면 어딘가로 사라져 무로 돌아갈 테지요. 영혼이란 어디까지나 과도적 상태에 지나지 않지만 무는 그야말로 영원합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표현을 초월한 것입니다." - P441

"네, 고독이란 참으로 무정하고 쓰라린 것이랍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뼈와 살을 깎는 그 무정함, 쓰라림은 다를 바가없습니다. 하지만 한편 제게는 과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억이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감촉이 양 손바닥에 짙게 배어있어요. 그리고 그 온기의 유무에 따라 사후 영혼의 상태가 크게 달라진답니다." - P441

"당신 역시 과거에 누군가를 깊이 사랑했던 강렬하고 선명한 기억을 갖고 있지요.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을 좇아 머나먼 곳으로 떠났다가 이렇게 다시 돌아오셨고요."
"고야스 씨는 그것도 알고 계시는군요."
"네, 알다마다요.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한 번이라도 자기 그림자를 잃어본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경우고요. 특히 아직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나는 잠자코 난롯불을 바라보았다. 몸안에서 시간이 정체되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의 흐름이 장해물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 P442

"그곳에 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온다는 게 살아 있는 인간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계시겠죠?" 고야스 씨는말했다. "가는 건 어찌어찌 해낸다고 쳐도 이쪽으로 귀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지간해서는 어림도 없어요." - P442

"대체 어떻게 이쪽으로 돌아왔는지는 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제 그림자는 저에게 이별을 고하고 깊은 웅덩이로 혼자 뛰어들어 무시무시한 지하 수로로 빨려들어갔습니다. 그는 단단히 결심하고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쪽 세계로 돌아오려 했어요. 하지만 저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저쪽 세계에ㅡ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ㅡ남기를 택했죠. 그런데 다음 순간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쪽 세계에 돌아와 있었어요. 그림자는 다시 제 그림자가 되었고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길고 생생한 꿈이라도 꾼것처럼. 그런데 아니에요, 그건 꿈이 아닙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누군가가 꿈이라고 저를 세뇌시키려 해도요." - P443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의지로 저쪽 세계에 남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의지와 달리 이쪽세계로 돌아오고 말았죠. 마치 강한 용수철에 튕겨나가듯열심히 생각해봤지만, 결국 제 의지를 초월하는 다른 어떤 의지가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요. 그게 어떤 의지인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의 목적도." - P443

"당신이 처음부터 그 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요컨대그 무언가의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나는 말했다. "어느 날 깊은 혼수에서 깨어보니 낯선 구덩이에 혼자 누워 있었어요. 벽에 둘러자인 도시, 그 문 근처에 파인 구덩이입니다. 문지기가 저를발견하고 도시에 들어가고 싶은지 물었어요. 저는 들어가고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어떤 의지가 저를 그 구등이 속으로 옮겨놨을 테죠. 물론 그후 문지기의 물음에 답하고 도시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건 저 자신의 의지입니다만." - P4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속 배경이 어느덧 요즘 날씨와 같은 추운 겨울로 접어든다. ‘나‘가 도서관 관장으로 일하는 집무실이 추위를 견디기에 부족한 곳이라 전임 관장에게 도움을 받아 미지의 한 장소를 소개받게 되는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다. 예전에 ‘나‘가 있었던 ‘그 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있었다. 주인공인 ‘나‘는 잠시 회상에 잠긴다.
.
.
.
잠깐 곁길로 나와서, 위의 내용과는 약간 결이 다른 얘기긴 한데, ‘나‘가 현실에서 도서관 관장업무를 하는 것과 관련된 실무적인 내용들이 간간이 나와서 도서관에서 어떤 업무를 하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어서 좋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서관에 주로 책을 빌리는 이용자 입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갈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실무 직원들이나 직급이 좀 더 높은 관리자 분들은 어떤식으로 일을 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
.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야기가 쭉 이어지는데 위에서 말했던 매개체(난로) 외에도 마치 ‘데자부‘ 같이 예전에 ‘그 도시‘ 에서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장면이나 물건들이 하나 둘씩 등장한다. 또한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도 ‘그 도시‘에 있었던 인물들과 지금 ‘나‘가 있는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이 묘하게 대칭적으로 들어맞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 일일이 그 구조를 써보는건 자칫 ‘스포일러‘ 가 될 수 있기에 생략한다.)
.
.
.
이어서 쭉 읽다가 p.341에 고야스 씨가 큰맘먹고 털어놓은 말을 읽는 순간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야기의 맥락을 아예 모르면 이게 뭐 온 몸에 전율까지 일어날 일인가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마 내 말에 어느정도 공감하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래 나는 책 읽는 집중력이 그닥 좋은 편이 아니라 한 번에 수많은 텍스트를 쉬지 않고 읽는 것을 힘겨워하는 사람인데, 내 몸에 전율을 일으키기 시작한 이 부분부터 대략 30 page 정도를 한 숨도 쉬지 않고 완전히 이야기에 몰입해서 읽어나갔다. 이런 표현이 어떨진 모르겠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동안 무뎌져서 그 자리에 계속 잠자코 머물러 있던 내 뇌세포들을 정말 수도 없이 깨워내고 또 깨워냈던 것 같다. 독자마다 감상의 정도에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 수야 있겠지만, 지금까지 읽은 부분 중에서는 가장 임팩트 있게 느껴졌던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이런 맛에 이런 소설을 읽는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아, 이래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유명하기도 하고 베스트 셀러 작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썼던 페이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다는 개인적인 고백을 한 적이 있는데, 오늘 읽은 부분의 임팩트가 너무나도 강력하게 느껴져서 앞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쓴 작품들을 의식적으로 찾아읽어 볼 지도 모르겠다.

얼마전에 이 책과 관련한 다른 독자들의 리뷰를 잠깐 봤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스토리나 어떤 특징 같은 것들이 그간 출간되어 온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오버랩되는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이 얘기를 듣다보니 자연스레 무라카미 하루키가 출간해왔던 그간의 작품들에도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호기심이 마구마구 샘솟아 흘러넘칠듯 하다.

그 의문은 전부 가슴속에 담아두고 소에다 씨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왠지 몰라도 이 자리에서는 그런 질문을 하지않는 게 좋겠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 P316

네 개의 말없는 벽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 P317

나는 그 형용할 수 없는 풍미를 그리워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 쓴맛을 다시 느끼고 싶다고.
그래도 침묵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난로와, 해질녘을 생각나게 하는 어둑한 방과, 이따금 달가닥 소리를 내는 오래된 주전자가 어느 때보다 그 도시를 가깝게 불러들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잃어버린 도시의 환상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다. - P318

그리고 되도록 그 도시와 그 도서관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건 위험하다. 순식간에 깊은 환상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만다. 퍼뜩 정신이 들면 책상 위에 팔꿈치를 짚고서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손에 쥐고 있던 연필은 어느새 사라졌다) 사고의 미로를 정처없이 헤매고 있다. 왜 나는 여기 있을까, 왜 나는 저쪽에 없는 것일까・・・・・・ 그렇게. - P319

이곳에서 나는 도서관장으로서 사회적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팽개치고 개인적인 환상의 세계에 몰입해 있을 순 없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어느새,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나도 모르게 돌아가 있었다. 단각수들이 발굽 소리를 내며 도로를 걷고, 하얀 민지가 앉은 오래된 꿈이 선반에 쌓여 있고, 냇버들의 가느다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바늘 없는 시계탑이 광장을 내려다보는 세계로. 물론 이동하는 건 나의 마음뿐이다. 혹은 의식뿐이다. 실제 나의 육체는 늘 이쪽 세계에 남아 있다ㅡ아마도. - P320

"사과나무 향이 아주 근사하죠? 네, 희한하게도, 향긋하지요." 나는 그 말에도 동의했다. 장작에 불을 붙이면 이윽고 방안에 어렴풋한 사과 향이 감돈다. 그러나 그건 기분좋은 동시에 내게는 다소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향기가 나를 알게 모르게 깊은 몽상의 세계로 이끄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어떤 틀을 벗어난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기척이 있었다. - P322

그러고 보니 그 도시의 문 바깥에 사과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지, 나는 생각했다. 문지기가 사과를 따서 도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문밖으로 나가는 일이 허락된 자는 문지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도서관의 소녀는 그 사과로 과자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아직도 그 맛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적당히 달고 찌르듯이 새콤한, 깊은 자연의 맛이 서서히 몸에 스며들었다. - P322

이 작은 정사각형 반지하 방에서 이렇게 고야스 씨와 단둘이 있는 것이 나는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에 바늘이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 P323

처음에는 내 눈이 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일시적으로 그림자가 져서 바늘이 보이지 않은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티내지 않으며 눈을 비비고서 다시 보았지만, 그가 왼손에 차고 있는 오래된 손목시계ㅡ아마 수동식일 것이다—의 문자반에는 바늘이 없었다. 시를 가리키는 짧은 바늘도, 분을 가리키는 긴 바늘도, 초를 가리키는 가는 바늘도, 그 외 다른 어떤 종류의 바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숫자를 새겨넣은 문자반이 있을 뿐이다. - P324

하마터면 고야스 씨에게 물어볼 뻔했다. 왜 당신 손목시계에는 바늘이 없습니까, 라고. 그러면 고야스 씨는 그 이유나사정을 선선히 설명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그렇게 물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가 나에게 그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알리고 있었다. 나는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몇 번 더 넌지시 그 왼 손목에 눈길을 주었을 뿐이다. - P324

혹시 몰라 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에 총체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건 아닌지 불현듯 걱정스러워져서. 하지만 내 왼손목 위 시계 문자반에는 여느 때처럼 모든 바이 달려 있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시각은 오후 두시 삼십육분사십오초였다. 이내 사십육초가 되고, 사십칠초가 되었다.
시간은 이 세계에 아직 무사히 존재했고, 쉼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시계만 봐서는ㅡ그렇다는 말이지만. - P325

그 시계탑과 똑같다. 나는 생각했다.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의 강가 광장에 서 있던 시계탑과 똑같다. 문자반은 있지만 바늘은 없다. - P325

시공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며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와 무언가가 뒤섞인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경계의 일부가무너지고, 혹은 모호해지고, 현실이 여기저기서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 혼란이 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초래한 것인지 아니면 고야스 씨가 초래한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혼돈 속에서도 어떻게든 침착함을 되찾고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해야 할 말을 잃었고, 대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 P325

문득 고야스 씨가 무언가를 떠올린 것 같았다. 아니편 갑자기 기억해냈는지도 모른다. 눈동자가 확 밝아지고 길게 뻗은 눈썹이 딱 한 번 꿈틀거렸다. 그리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제부터 할 발언의 예행연습을 하는 것처럼, 작은 입술이 움직에 몇 마디 소리 없는 말을 했다. 어렴풋이, 그러나 뚜렷한 의사를 지니고. 그렇다, 그는 나를 향해 무언가를 알리려 했다ㅡ아마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내용을. 나는 책상 맞은 편에서 그 말을 기다렸다. - P326

그런데 마침 그때 난로 안에서 장작이 허물어지며 와르르 소리를 냈다. 동시에 그에 호응하듯 난로 위 검은색 주전자가 하얀 김을 세차게 피워올렸다. 고야스 씨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쪽을 보고(평소 같지 않게 재빨랐다), 날카로운 눈길로 불꽃의 상태를 살펴 이변이 없음을 확인한 후 다시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P326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가 하려던 말이ㅡ그게 무엇이었는지 몰라도ㅡ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눈동자에 여느 때처럼 느긋한 기색이 돌아왔다. 해야 하는 말은 이제 없었다.
원래는 있었지만 붉은 난롯불이 남김없이 빨아들인 것 같다. - P326

시곗바늘이 없는 오래된 손목시계를 차고, 늘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한 노인ㅡ그 수수께끼 같은 존재는 무슨 의미일까.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마 나 개인을 향한 메시지가・・・・・・ - P327

"고야스 씨?" 그녀는 희미하게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삼십 분 전까지 반지하 방에서 같이 말씀을 나눴는데요. 오신건 두시가 안 돼서고요."
"글쎄요. 저는 못 봤습니다"라고 그녀는 묘하게 삐걱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볼펜을 들고 하던 일로 돌아갔다. 희한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소에다씨는 자기 자리인 카운터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거니와 주의력이 날카롭기에 사람이 들고 나는 걸 놓칠 리 없다. 그런 사람이다. - P328

고야스 씨는 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왜 하필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장작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졌을까? 꼭 그 발언을 가로막으려는 것처럼. 발언자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봤지만, 내 모든 사고와 추론은 번번이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했다. - P328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는 소녀가 항상 나를 위해 미리난롯불을 지펴주었다. 내가 저녁 무렵 도서관 문을 열면 방은 딱 알맞은 정도로 훈훈했고, 난로 위에서 커다란 주전자가 우호적인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런 준비를 해주지 않는다. 내손으로 직접 시작해야 한다. 도서관 가장 안쪽에 있는 반지하 방은 이른아침이면 차갑게 식어 있었다. - P331

책상 앞에 앉아 따뜻한 홍차를 맛보면서, 높은 벽에 둘러인 그 도시와 도서관에 있던 소녀 생각에 빠져든다. 어찌됐건 그 생각을 막을 순 없다. 그렇게 겨울 아침의 약 삼십 분이 막연하게 흘러간다. 나의 의식은 두 세계 사이를 정처 없이 오가고 있다. - P332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다음, 쇠바퀴에 갈고리를 고정하듯 의식을 이쪽 세계에 묶어둔다. 그리고 이 도서관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한다. 나는 이제 ‘오래된 꿈‘을 읽지 않는다. - P332

나는 독서할 때 쓰는 오래된 안락의자(고야스 씨가 어디선가 구해다준 것)에 앉아, 플로어스탠드 불빛 아래 플로베르의《감정 교육》을 재독하고 있었다. 오래된 활자에 눈이 피곤해져 슬슬 잘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ㅡ평소와 별다를 것 없이. - P333

"전화로 말해도 될 만큼 간단한 용건이 아닙니다. 전화는 원래부터 썩 믿을 만한 게 못 되고요." - P333

그 정경은 어릴 적 읽었던 그림책의 한 장면 같았다. 무언가가 지금부터 바뀌려 한다ㅡ그런 예감이 들었다. 길모퉁이를 돌면 그곳에서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소년 시절 내가 종종 느꼈던 감각이다. 그 무언가는 내게 중요한 사실을 알리고 그 사실은 또 내게 응분의 변용을 재촉하리라. - P337

"저는 이 방의 난로가, 네, 그 무엇보다 좋답니다." 이윽고 고아스 씨는 그렇게 말했다.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이 불꽃이, 희미한 사과나무 향이, 저의 몸과 마음을 안쪽부터 천천히 덥혀줍니다. 제게 그 따뜻함은 귀중하답니다. 이 덧없는 영혼을 덥혀주니까요. 이러는 게ㅡ제가 여기 찾아오는게ㅡ당신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만." - P339

"아뇨, 소에다 씨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묘하게 단호한 투로 고야스 씨는 말했다. "그 사람은 제가 밤중에 여기 온다는 걸 모릅니다. 앞으로도 모를 테고,
굳이 말씀드리자면, 네, 알 필요도 없답니다." - P339

알 필요가 없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사정을 설명하려면 얘기가 길어집니다." 고야스 씨는 말했다. "실은 더 빨리, 조금씩이나마 당신에게 진실을 말씀드려야했습니다. 하지만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하고 이렇게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저의 불찰이겠지요." - P340

"제가 해드릴 이야기가 상당히 기묘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아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울 테죠. 하지만 당신이라면 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어주리라 확신합니다. 당신에게는 그것을 믿을 자격이 갖춰졌기 때문입니다." - P340

"자격이라는 건, 네, 다소 어울리지 않는 말인지도 모르겠군요. 뭐랄까, 다분히 형식적인 표현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것말고 적절한 표현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처음 당신을 만난 순간부터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말하려는 것을, 또한 말해야 하는 것을 올바로 알아듣고 이해해줄 거라고, 그런 자격을 갖췄다고."
난로 안에서 파삭 하고 장작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물이 자세를 바꾸며 내는 듯한 작고 갑작스러운 소리다. - P341

"큰맘먹고 털어놓겠습니다." 고야스 씨가 말했다. "저는 그자가 없는 인간입니다."
"그림자가 없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고야스 씨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림자를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그림자라는 게 없지요. 언젠가 알아차리시겠거니 했습니다만." - P341

그 말에 나는 방의 흰 벽에 눈길을 던졌다. 아닌 게 아니라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벽에 비친 건 나의 검은 그림자뿐이다. 천장에 매달린 전구의 노란 빛을 받아 약간 비스듬히 벽 위로 늘어져 있었다. 내가 움직이면 그것도 움직인다. 그러나 나란히 있어야 할 고야스 씨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네, 보시다시피 제게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고야스 씨는 말했다. 그리고 확인시키듯 한 손을 전구 앞에 내밀어 벽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제 그림자는 제게서 떨어져 어딘가로 가버렸답니다." - P341

"제가 죽었을 때입니다. 그때 저는 그림자를 잃고 말았어요.아마도 영원히."
"당신이 죽었을 때요?"
고야스 씨는 작고 확고하게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네, 지금으로부터 일 년 하고도 조금 더 전에. 그뒤로 저는 그림자없는 인간이 되었답니다."
"즉, 당신은 이미 죽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얼어붙은 쇠못 못지않게, 고스란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 P342

"오해를 무릅쓰고 익숙하면서 편의적인 표현을 쓰자면, 지금 저는 유령이라고 해도 될 존재입니다." - P344

세상에는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하거나 남을 놀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고야스씨는 그런 농담을 즐길 타입이 아니다. 게다가 어찌됐건 그에게는 정말로 그림자가 없다. 당연한 소리지만, 농담을 하기 위해 그림자를 잠깐 지워버릴 순 없다. - P345

"네, 저도 모르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답니다." 고야스 씨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제가 죽어서 왜 무로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의식을 가지고 일시적인 형태를 띤 채 계속 이 도서관에 머무를 수 있는지, 저도 잘은 모릅니다." - P345

"의식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죽은 뒤에도 의식이 있다는 건, 네, 한층 불가사의한 일이랍니다. ‘의식이란 뇌의 물리적 상태를 뇌 자체가 자각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 있습니다. 글쎄, 어떨까요. 그게 과연 올바른 정의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P346

"네. 그렇다면 제게는 아직 뇌가 존재하는 셈입니다. 그렇죠? 의식이 있으면, 네, 필연적으로 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육체가 없는데 뇌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고야스 씨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그 전개가 일상적 수준을 크게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 P346

"네. 제 몸은 이제 이 세계에 없습니다. 지금은 일단, 네, 생전의 제 모습을 이렇게 빌려 쓰고 있지만, 장시간 유지하진 못합니다.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져 무가 됩니다. 어디까지나 잠시잠깐의 일시적인 모습이지요." - P346

"네, 의식은 그대로 확고하게 존속합니다. 육체가 없어도 의식은 멀쩡합니다. 저도 그게 큰 수수께끼랍니다. 육체가 없는데, 그리고 육체가 없으면 필연적으로 뇌도 없어야 하는데, 보다시피 의식이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이, 네에, 이렇게 죽어서도 여전히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게 왠지 기묘하답니다." - P347

"뇌와 육체 말고, 그것과 별개로 영혼이라는 존재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까요?" - P347

"많은 이들이 ‘영혼‘이라는 말을 흔히 쓰지요. 그러나 영혼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알기 쉽게 정의하고 설명해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 단어가 워낙 빈번하게 여러 국면에서 사용되는지라. 다들 영혼이라는 것이 우리 몸안에 엄연히 존재한다고 막연하게나마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죽어보면 알 수 있는 게, 영혼이란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답니다. 그걸 이용해 무슨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무엇보다 실제로 의지할 수 있는 건 의식과 기억뿐입니다." - P348

"제 경험으로 말씀드리자면,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대개 예상도 못했을 때 일어난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죽음이란, 인생에서 제법 중요한 일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 P349

"네. 소에다 씨는 제가 유령이 된 사실을 기본적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저와 소에다 씨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며 어떤 면에선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데다, 그녀는 제가 유령이 된 사실을 이른바 자연 현상으로, 그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적잖이 놀랐던 모양입니다만." - P352

"당신이 면접을 보러 이리로 오셨을 때, 저는 보자마자 첫눈에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아아, 그렇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특별하다. 이 사람은 나의 존재를 일시적인 육체를 동반한 의식으로서의 나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오롯이 받아들일 것이 분명하다고. 뭐랄까요. 생각지도 못한 기적적인 해후였습니다." - P354

"하지만 저는 조심 또 조심하며 한동안 당신의 언동을 신중히 관찰했습니다. 사실을 털어놓아도 될지 나름대로 주저하고 있었지요. 사람의 생과 사에 관한 대단히 미묘한 문제니까요. 이해하시겠지만, 사실 저는 유령이랍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가 그리 간단하진 않으니까요. 마땅한 시간의 경과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나고, 산간지방의 짧은 가을이 지나고, 이처럼 혹독한 겨울이 찾아와 이 방 난로에 불을 지피는 계절이 오자 마침내 마음속 깊이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받아들여주기에 실로 마땅한 상대라고요." - P354

"당신은 그림자를 잃었던 경험이 있지요." 이윽고 그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러고는 등을 펴고서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보았다.
"어떻게 아십니까? 제가 그림자를 한 번 잃은 적 있다는 걸요." - P355

"저는 유령입니다. 생명이 없는 의식이지요. 그런고로 보통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한 번 그림자를 잃은 적 있다는 건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 P356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잃는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고야스 씨는 눈부신 것을 보려고 할 때처럼 실눈을 떴다.
"아아, 당신은 그걸 모르는군요?"
"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거스르지 않고 따랐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판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제 그림자와 일시적으로 떨어져 분리되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그림자가 없는 도시에서." - P356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렇게 죽은 몸이 되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네, 살아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유감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이 죽었다고 갑자기 똑똑해지진 않더군요. 그러니 아쉽지만 당신 질문에 똑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하겠어요. 또한 이 세계에는 간단히 설명해선 안되는 일도 있답니다." - P3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편향에 관한 다양한 연구와 실제 실험을 통해 편향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그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 혹은 대안들을 끊임없이 제안한다.

이 책의 구성자체가 어떤 한 줄기의 이야기가 쭉 이어진다기보다는, 병렬적으로 각각의 이야기(연구, 실험)들을 그냥 쫙 나열하고 그 안에서 문제제기부터 문제 해결 혹은 대안 제시같은 결론에까지 이르기에 호흡이 짧은듯 하면서도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례들의 양에 압도되어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나가는게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은듯 하다.

그래도 어쨌든 책에서 제기하는 편향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보게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의 목적이 일정부분 달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네가 할 일을 하고 말썽을 부리지 마라.

멘토링과 롤 모델은 주변적 집단의 성공을 북돋는 입증된 길이다.

그녀에게 요구된 역할은 실제 변화는 하지 않으면서 다양성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 그녀는 역겨워졌다.

편향은 사람들이 단순히 자신의 일을 하는 것도 힘들게 만들 수 있다.

편향이 적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집단의 다양성을 키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인적 자원 연구 교수 사리사 니시이Lisa Nishii는 20년간의 조사를 바탕으로 포용적 설정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공정하고 편향 없는 실천,
사람들의 ‘온전한 자아‘에 대한 환영받는 태도와 존중, 그리고 다른 관점을 추구하고 싶은 열망이다.

일부 연구자는 포용적 환경에서 사람들은 소속감을 느끼고 목소리를 낸다고 설정한다.

많은 연구에서 포용을 평가하는 방법은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당신은 환영받는다고 느끼는가? 당신의 생각이 중요시 되는가? 당신은 어딘가에 속해 있는가?

환영받는다는 기분, 소속된다는 느낌. 이런 것은 중요하다. 생각의 공유도 그렇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래도 자기들이 항상 해온 대로 계속할 수 있습니다"

"전 생일 축하 카드를 받고 싶은 게 아니에요. 진정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은 거지요"

진짜 질문은 사람들이 환영받는 느낌을 받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영향력을 갖는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들을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납득시키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불공정성을 인지하면 사람들은 직장에 헌신하지 않게 된다.

회사의 남자들이 성차별적 발언을 하면 그는 그들을 조용히 데리고 나가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학생이었더라면 그런 농담이 통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여기는 학교가 아닙니다. 그만 하세요."

차이를 부富로 보고 이런 차이에서 기꺼이 배우려는 태도는 사람들이 갈등을 피해야 할 지뢰가 아니라 성장의 기회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다양성의 맥락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모른다‘는 작업 가정working assumption 을 세워야 한다."

차이를 헤쳐나가는 데 가장 숙련된 사람은 타인에 대한 지식을 새로이 쌓을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사람

다양성이 존재하는 상황에는 모두 갈등과 혼란이 잠재되어 있다. 배우려는 태도는 그런 긴장을 해소해 유용한 재료로 변환시킨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뭔가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이 그를 자유롭게 했다.

그러나 이 접근법에는 중요한 책략이 있다고 사회심리학자이블린 카터 Evelyn Carte는 말한다. 그것은안전한 환경에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주변적 집단 출신 사람이 방어막을 거두기 위한 필수 조건은 모두가 해를 끼치지 않는 분위기를 창출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에서 뭔가를 배울 만큼 개방되지 않고도 생산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들은 일을 완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본질적으로 취약하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런 상황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다양성이 가져다주는 풍부한 직관의 혜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또 갈등이 생길 때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겪을지도 모르는  도전을 줄이고 싶기때문에 자신들과 똑같은 인물을 밀어준다

가장 중요한 채용 대상은 바로 당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당신에게 가장 많이 도전할 사람들이고, 비판과 방어를 겪은 아이디어에서 더 나은 결정이 나온다.

"당신이 옳거나, 내가 당신을 설득시킨다면 내가 옳습니다. 당신이 내적으로 더 많이 도전받을수록 외적으로 받는 도전은 줄어듭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공정한 환경이란 일하기에 더 즐거운 직장이다.

조직 내 다양성에 대한 40년간의 연구에 대한 어떤 리뷰는 다양한 집단이 동종집단보다 창의적일때가 더 많지만, 마틴 데이비드슨이 주장했듯 갈등과 소통불능에 빠지기 쉬운 성향도 생길 수 있음을 밝혔다.

마사 메즈네프스키Martha Maznevski는 다양한 집단이 동종적 집단보다 수행 성적이 더 좋지만 그렇게 되려면 아주 특정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구축할 수 있다는 조건 말이다. 그것은 곧 그들이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안전하다고 느끼면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새 정보를 흡수하고 성장할 여유를 얻는다.

받아들여진다고 느끼고 소속감을 갖는 것ㅡ포용의 등록상표―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버틸 수 있게 도와주며, 그들의 성취를 증진시킨다. 또 그 분야에 남아 있을 동기를 갖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체계적으로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는 문화를 창출하려면 차이를 편안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내가 했던 인터뷰 가운데 많은 수가 타인들이 각자의 고유한 배경을 인정한 순간을 진정한 포용의 순간으로 설명했다.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무시는 심각한 소외 행태로 느껴질 수 있다.

포용적 환경을 양성하려면 또한 지도자들이 올바른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

그는 사람들이 편안해하지 않을 때 그들더러 털어놓으라고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전부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들이 환영받는다는 신호를 보냈다.
언어를 통해, 계급 정책을 통해, 존중과 호기심과 상호 격려하는 환경을 통해 그는 모두가 성공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그는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공개하라고 강제하지 않았고, 열린 태도로 대하면서 그들이 경험을 공개할 때는 존중과 관심을 갖고 귀담아들었다.

사람들의 마음, 심장, 습관을 변형하는 것은 편향을 바꾸는 방식 중 하나다. 또 다른 방식은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조직의 운영 절차와 구조와 문화를 바꾸는 것이다. 물론 두 방식은 서로 뒤엉켜 있다.

절차, 구조, 조직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개인이며, 이런 것들은 개인의 사유와 행동을 형성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더 큰 문화, 우리가 살고 있는 더 넓은 환경의 산물이기도 하다. 변화는 이 세 번째 출발점에서 또다시 시작될수 있다.

‘우리의 공통점은 우리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이다‘.

고정관념이란 한 집단의 구성원은 모두 동일한 특징을 지닌다는 생각에 의거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집단의 구성원을 동종적 존재로 볼수록 그들에 대해 더 많은 편향을 갖고 보게 된다는 것이 연구에서 밝혀진다.

이와 반대로, 어떤 집단이 서로 큰 차이가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졌음이 더 많이 인지될수록 사람들이 그들을 고정관념화할 확률은 낮다.

포스터들이 효과가 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랍인이 모두 똑같지 않다고 주장한 데 있다. 그들을 고정관념화하려는 사람들의 능력을 포스터가 손상시킨 것이다.

구성원들이 서로 달라 보인다면, 그들 모두를 똑같은 존재로 느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포스터가 긍정적 성격과 부정적 성격 양쪽 모두를 열거했다는 사실은 특히 중요해 보인다. 포스터의 또 다른 버전―‘낙관적‘, ‘따뜻함‘, ‘솔직함‘ 같은 긍정적 속성만 포함시킨 버전ㅡ은 그만큼 효과가 없었다.

이 접근법―어떤 집단 정체성 내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ㅡ은 통상의 다문화적 인식 캠페인에 역행한다. 그 캠페인은 전형적으로 어떤 집단을 다른 집단과 구별하는 요소를 강조한다.

차이에만 관심을 갖는 태도는 스테레오타이핑을 촉진할 수 있다. 다른 집단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공포와 증오로 이어지게 된다. 어떤 존재를 ‘타자‘로 만드는 것을 너무 강조하면 편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화를 내고, 모두 웃어요.

사랑하는 관계가 편향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 1부가 끝나고 2부를 들어갔다. 1부는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면 2부는 아직 초반부이긴 하지만 1부에 비해 현실로 좀 돌아온듯한 느낌이었다.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1부에 나왔던 내용이나 배경들과 2부에 나오는 것들이 교묘하게 조금씩 오버랩되는 느낌을 받았다. 등장인물들이 그러했고, 어떤 배경이나 맡은 직책 같은 것도 살짝 다른듯 하면서 앞서 나왔던 내용에서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
.
주인공 ‘나‘는 아는 후배의 도움을 받아 지방의 비교적 한적한 어느 도서관에 관장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나‘는 그곳 일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데 1부에 나왔던 ‘그 도시‘에서 맡았던 ‘꿈 읽는 이‘라는 직책으로 했던 일들과 무언가 비슷한 느낌의 일들을 하게 된다. 그때와 지금 하는 일이 약간은 다르지만 무언가 살짝 겹치는 듯한 느낌이 드는건 나만의 느낌은 아닐듯 하다.

그 강줄기가 복잡한 미로가 되어 암흑의 땅속 깊은 곳을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실 또한 우리 내부에서 몇 갈래 길로 나뉘어 나아가는 듯하다. 몇 가지 다른 현실이 섞이고 다른 선택지가 얽혀, 그로부터 종합체로서의 현실이ㅡ 우리가 현실로 인지하는 것이ㅡ완성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 느낌이고 견해일 뿐이다. - P223

‘현실은 이것 하나뿐이고 다른건 없다‘고 한다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침몰하는 범선의 선원이 배의 메인 마스트에 매달리듯, 우리는 단 하나인 현실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말고는 다른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좋고 싫고를 떠나. - P223

어둡고 긴 밤, 벽까지 늘어지는 나의 검은 그림자를 언제가지고 가만히 바라본다. 그 그림자는 이제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내가 말을 걸고 질문을 해도 반응하지 않는다. 나의 그림자는 원래대로 말없고 납작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림자를 향해 자꾸 말을 걸고 만다. 내가 종종 그의 지혜를, 그의 격려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물음에 답이 없다. - P224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지금 왜 여기 있을까? 나는 그 점이ㅡ지금 이렇게 나를 포함하고 있는 ‘현실‘의 양상이ㅡ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었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그림자에게 작별을 고하고,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 홀로 남았을 터였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세계에 돌아와 있을까? 계속 여기 있었고, 어디에도 가지 않았고, 그저 기나긴 꿈을 꾸었을 뿐일까? - P224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나의 이 몸에 그림자가 붙어 있다. 내가 가는 곳 어디나 그림자가 따라온다. 내가 걸음을 멈추면 그림자도 멈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한다. 나와 그림자가 말 그대로 일심동체라는 사실에 그런 기분은 한번 그림자를 잃어본 인간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 P225

그 약속은 이뤄졌는가? 아니면 이뤄지지 못했는가? - P225

나는 어떤 힘에 의해 어느 시점에서 둘로 나뉘어버렸는지도모른다. 그런 생각을 떨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또하나의 나는 지금도 그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고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 저녁 그 도서관을 드나들며 그녀가 만들어준 쑥색 약초차를 마시고, 두꺼운 책상 앞에서 하염없이 오래된 꿈을 읽고 또 읽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장 논리적이고 말이 되는 추측이란 생각을 지울수 없다. - P226

어느 포인트에서 나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이쪽 선택지를 고른 나다.
그리고 또 한편, 서쪽 선택지를 고른 내가 어딘가에 있다. 어딘가ㅡ아마 높은 벽돌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 P226

‘이쪽 ‘현실세계‘에서 나는 중년으로 불리는 나이에 접어든이렇다 하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는 한 남자다. 더는 그 도시에 있던 때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아니다. 눈에 상처를 내지도 않았고, 오래된 꿈을 읽을 자격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거대한 사회를 구성하는 몇 가지 시스템 중 하나, 그톱니바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매우 작고 대체가능한 톱니바퀴다. 그 사실을 얼마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올 수 없다. - P226

이 현실이 나를 위한 현실이 아니다, 라고 피부로 느끼는 감각은, 그 깊은 위화감은, 아마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리라. - P228

관성을 박탈당하고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어 지면에 방치된 무거운 쇠공이 된 기분이었다. 결코 나쁜 감각은 아니었지만. - P229

모두 아귀를 맞추기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무대배경으로, 교묘하게 입체를 가장한 평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P229

그렇다. 나는 이 지상에 정지한 쇠공일 뿐이다. 매우 묵직하고 구심적인 쇠공이다. 나의 사념은 그 안에 단단히 갇혀 있다. 겉보기는 볼품없지만 중량만은 충분히 갖추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힘껏 밀어주지 않으면 어디도 갈 수 없다.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몇 번이고 나의 그림자를 향해 묻는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면 좋을까. 그러나 그림자는 대꾸해주지 않는다.
  - P230

적어도 그곳에서 나는 더이상 한곳에 묵직하게 정지한 쇠공이 아니다. 조금씩이나마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듯하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결코 나쁜 감각은 아니다. - P233

긴 꿈에서 깬 건 날이 밝기 전이었다. 주위는 아직 어둑하다. 그것이 꿈이었음을 인식할 때까지 그 꿈의 세계에서 내 몸을 완전히 걷어내어 이쪽 현실로 가져올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미묘한 중력의 조정 같은 것이 필요했다. - P234

그 꿈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려 했다. 마치 친한 사람들 사이에 마음을 담은 메시지가 오갈 때처럼, 무척 친절하고 구체적이고 알기 쉽게.
이윽고 창밖이 완전히 밝아오고 새들이 활기차게 지저컬 무렵, 나는 한가지 결론을 얻었다.

‘나에게는 새 직장이 필요하다‘ - P235

이제는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무겁게 머물러 있을 순 없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직장이란, 그렇다. 도서관 말고는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도서관 말고 내가 가야 할 장소는 없다. 이토록 간단한 사실을 왜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나는 드디어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관성을 얻어 차츰 전진한다. 생생하고 또렷한 꿈의 강력한 후원을 받으며. - P235

"실은 저도 선배에겐 이 후쿠시마현의 마을 도서관이 잘 맞지 않을까 했어요."
"어째서?"
"여긴 형식상 마을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이지만 실질적으로마을이 운영에 관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방공무원이 지켜야 하는 귀찮은 제약 같은 게 없을 거예요."
"마을 운영 도서관인데 마을이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네, 그런 얘깁니다." - P245

오키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괜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저한테 선배는 예전부터 좀 신기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예측 불허라고 할까, 종잡을 수 없다고 할까…… 이번 일도 그래요. 잘 다니던 직장을 왜 갑자기 그만두고, 이름도 못들어본 시골 도서관에서 조건도 좋지 않은 일을 한다는 건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언젠가 내키시거든 그얘기나 좀 해주시면 좋고요." - P247

"고마워." 나는 말했다. 그리고 큰맘먹고 물어봤다.
"그런데 혹시 자기 그림자의 존재가 신경쓰인 적 있나?" - P247

"나는 내 그림자가 아무래도 신경쓰여. 특히 최근 들어서.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
"저기...... 그것도 이번 이직을 고려한 이유 중 하나일까요?"
"그런지도 몰라." - P248

머릿속을 텅 비워야 한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직감을ㅡ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방향감각을ㅡ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라고 오키는내게 말했다.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을 테지, 라고. - P251

어쩌면 나라는 인간에 대해 정말로 당혹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 P252

시곗바늘은 언제나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시간을 쌓아갔지만, 나에게 진짜 시간은ㅡ마음의 벽에 박힌 시계는ㅡ그대로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로부터 삼십년 가까운 세월은 그저 공허를 메우는 데 소비해온 것이나 다름없다. 텅 빈 부분을 무언가로 채울 필요가 있기에 주위에 보이는 것으로 그때그때 메워갔을 뿐이다. 공기를 들이마실 필요가 있기에 사람은 자면서도 무의식중에 호흡을 계속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 P254

"그런 설명을 하는 사이, 나는 문득 알아차렸다ㅡ큼직한 책상 구석에 모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남색 베레모였다.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부드럽게 길이 들었다. 게다가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ㅡ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ㅡ베레모였다. 놓여 있는 위치까지 똑같다. 나는 숨을 멈췄다.

‘무언가와 무언가가 이어져 있다.‘

시간이 거기서 뚝 멎어버린 것 같았다. 시곗바늘은 먼 과거의 중요한 기억을 열심히 찾는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바늘이 다시 움직이기까지 한동안 시간이 걸렸다. - P263

삼십 분쯤 걸려서 대강 이야기가 정리되자 고야스 관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남색 베레모를 집어 머리에 썼다. 볼일이 있어 슬슬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니 좀 기묘한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워낙에 약간 특이한 어휘를 구사하는 사람인 듯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모자가 멋지군요." 나는 슬쩍 떠보았다. - P267

이윽고 나는 고야스 관장의 옷차림에 관해 또하나 평범하지않은ㅡ특이하기로 말하면 베레모 이상인ㅡ사실을 발견했다. 고야스 관장은 바지가 아니라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훗날 고야스 씨는 자신이 왜 일상적으로 스커트를 입는지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첫째로는, 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네, 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 - P268

고야스 씨에 대해서는 무언가 알려지지 않은ㅡ적어도 내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ㅡ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았다. - P275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 - P280

생각할수록 고야스 씨에 대해 알아야 할 점이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유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P281

수호신을 모신 숲속의 사당 문을 함부로 열고 들여다봐선 안 된다, 하는 것처럼. 소박한ㅡ그러나 의식의 심층까지 굳게 배어 있는ㅡ종류의 터부다. - P282

몰라도 될 일은 계속 모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마도. - P283

"글쎄요. 연애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정신질환이다, 라고 말한 게 누구였더라?" - P287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 나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상당히 근사한 표현이다. - P292

가끔 도스토옙스키나 토머스 핀천, 토마스 만, 사카구치 안고, 모리 오가이, 다니자키 준이치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이 대출되기도 했다. - P294

‘뭐 어때, 곧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겠지‘라고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고야스 씨 말마따나 모든 것이 차차 선명해질 것이다.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흘러드는 것처럼. - P297

"신경쓰지 마세요. 이게 제 일이니까요." 먼저 퇴근하면서 미안한 내색을 하는 나에게 소에다 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소에다 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벽에 둘러싸인 도시의 도서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도서관에서도 출입문을 열고 잠그는 건 ‘그녀‘의 역할이었다. 그 소녀는 커다란 열쇠 다발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다. 단 하나 다른 점은, 그 도서관에서 출입문을 닫은 뒤 내가 나란히 길을 걸어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는 것이다. - P298

하지만 그 방의 공기는 이상하게 매캐하고, 잊혀버린 시대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커튼과 소파의 천색깔이 왠지 모르게 불온한 분위기를 풍겼다. 과거 이곳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의 부적절한 비밀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설령 지독한 졸음이 덮쳐온다 해도 여기서 낮잠을 자고 싶을 것 같진 않다. - P301

그는 늘 스커트를 입고 있었지만 허리 위쪽으로는 일반적인, 오히려 보수적이라 할 남성복을 걸치고 있었다. 단추를 목까지 잠근 흰색 셔츠와 반듯함 그 자체인 트위드 재킷, 무늬없는 진녹색 베스트,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언제나 흐트라짐 없는, 조금은 고풍스러워 보여도 더없이 청결한 옷차림이었다. 그렇게 지극히 중장년 남성다운 옷과 스커트(그리고 타이츠)의 조합은 아무리 봐도 조화롭다고 하기 힘들었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눈곱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 마을 사람들도 오랫동안 그 모습에 익숙해져 일일이 눈길을 주지 않는 듯했다. - P304

내리는 눈은 어쩔수없이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의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겨울이 되면 그 도시에도 자주 눈이 내렸다. 그리고 눈 속에서 많은 단각수들이 죽어갔다.
그런데 그 도시에서, 나는 어떤 신발을 신고 다녔던가? - P305

그 도시에 대해 잘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그 외에도 많았다.
어떤 건 지나칠 만큼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어떤 건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신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것 중 하나다. 그렇게 기억이 띄엄띄엄하다는 사실이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기억을 잃은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기억하는 것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일까? 어디까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어디부터가 가짜일까? - P306

게다가 나는 굳이 말하자면 적당한ㅡ그럭저럭 참을 수 있을 정도의ㅡ추위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맛보았던 것이니까. 주위를 감싸는 냉랭한 공기는 그 도시에서의 생활을 다시금 내 마음에 되살려주었다. - P307

우리가 앞으로 지나가도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치 우리 모습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왠지 불가사의한 광경이었다. 꼭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다. - P309

원래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쓰던 방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정사각형 방에는 어딘가 수수께끼 같은 의미심장한 공기가 감도는 듯 느껴졌다. 저 옛날 이곳에서 누군가가 중요한 비밀을, 누군가에게 남몰래 소리 죽여 털어놓았을 것같은......
그리고 나는 보았다. 방 한쪽에 새카맣고 고풍스러운 장작난로가 놓여 있는 것을. - P311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숨을 고른뒤 다시 눈을 떠서 그것이 실제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확인했다. 틀림없다. 환영 같은 게 아니다. 벽에 둘러싸인 그도시의 도서관에 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ㅡ혹은 똑같다고 밖에 볼 수 없는ㅡ난로였다. 검고 둥근 연통이 벽으로 이어져있었다. 나는 말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그 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P311

"나는 제자리에 선 채 여전히 난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실제로 사용할 수 있고요?"
"아무렴요. 사용할 수 있다마다요." 고야스 씨는 눈을 반짝이며 단언했다. "실은 해마다 겨울이 되면 불을 지펴서 잘 써왔답니다. 장작은 부지 내 다른 장소에 넉넉하게 쌓여 있습니다. 장작 걱정은 전혀 없지요. 근처의 사과 농가가 폐업하게되어 오래된 사과나무를 베어내면서 인심 좋게 내주셨답니다. 가깝게 지내는 제재업자가 장작으로 쓰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었고요. 태우면 무척 좋은 사과 향이 나지요. 네, 이게 또 실로 향긋하답니다. 어때요, 지금 한번 장작을 가져다 불을 붙여볼까요?" - P312

"원래는 어떤 용도로 쓰던 방일까요?"
고야스 씨는 고개를 가볍게 기울이고 귓볼을 긁적였다. "글쎄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이 건물은 예전에 양조장이었어요. 도서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절반 넘게 개축했습니다만 나머지 부분. 요컨대 이 언저리는 손대지 못하고 남겨졌습니다. 이 방이 과거에 어떻게 사용됐는지는, 네, 유감스럽지만 옛날 일이라 저도 알 수 없군요." - P313

고야스 씨와 나는 그 정사각형 방을 나와 어둑한 복도를, 소에다 씨가 앉아 있는 카운터 앞을 사람이 뜸한 열람실을 통과해 2층 관장실로 돌아갔다. 아까 방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앞을 지나가도 누구 하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그 정사각형 방과 검은색 구식 장작 난로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다음날도. - P313

12월에 접어들어 그 겨울 첫 한파가 닥쳤다. 눈발이 흩날렸다. 나는 시험삼아 관장실을 정사각형 반지하방으로 옮겨보기로 했다. 소에다 씨에게 그렇게 전하자 몇초동안 말이 없었다. 짧지만 묘하게 깊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호숫바닥에 가라앉은 작은 저울추처럼. - P314

그때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에다 씨가 건물 내부를안내했을 때는 그 방을 본 기억이 없었다. 만약 보았다면 틀림없이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방은 기묘할 정도로 반듯한 정사각형이고 장작 난로도 놓여 있었다. 내가 그 광경을 놓칠 리 없다. - P3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