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강줄기가 복잡한 미로가 되어 암흑의 땅속 깊은 곳을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실 또한 우리 내부에서 몇 갈래 길로 나뉘어 나아가는 듯하다. 몇 가지 다른 현실이 섞이고 다른 선택지가 얽혀, 그로부터 종합체로서의 현실이ㅡ 우리가 현실로 인지하는 것이ㅡ완성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 느낌이고 견해일 뿐이다. - P223
‘현실은 이것 하나뿐이고 다른건 없다‘고 한다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침몰하는 범선의 선원이 배의 메인 마스트에 매달리듯, 우리는 단 하나인 현실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말고는 다른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좋고 싫고를 떠나. - P223
어둡고 긴 밤, 벽까지 늘어지는 나의 검은 그림자를 언제가지고 가만히 바라본다. 그 그림자는 이제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내가 말을 걸고 질문을 해도 반응하지 않는다. 나의 그림자는 원래대로 말없고 납작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림자를 향해 자꾸 말을 걸고 만다. 내가 종종 그의 지혜를, 그의 격려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물음에 답이 없다. - P224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지금 왜 여기 있을까? 나는 그 점이ㅡ지금 이렇게 나를 포함하고 있는 ‘현실‘의 양상이ㅡ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었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그림자에게 작별을 고하고,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 홀로 남았을 터였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세계에 돌아와 있을까? 계속 여기 있었고, 어디에도 가지 않았고, 그저 기나긴 꿈을 꾸었을 뿐일까? - P224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나의 이 몸에 그림자가 붙어 있다. 내가 가는 곳 어디나 그림자가 따라온다. 내가 걸음을 멈추면 그림자도 멈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한다. 나와 그림자가 말 그대로 일심동체라는 사실에 그런 기분은 한번 그림자를 잃어본 인간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 P225
그 약속은 이뤄졌는가? 아니면 이뤄지지 못했는가? - P225
나는 어떤 힘에 의해 어느 시점에서 둘로 나뉘어버렸는지도모른다. 그런 생각을 떨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또하나의 나는 지금도 그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고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 저녁 그 도서관을 드나들며 그녀가 만들어준 쑥색 약초차를 마시고, 두꺼운 책상 앞에서 하염없이 오래된 꿈을 읽고 또 읽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장 논리적이고 말이 되는 추측이란 생각을 지울수 없다. - P226
어느 포인트에서 나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이쪽 선택지를 고른 나다. 그리고 또 한편, 서쪽 선택지를 고른 내가 어딘가에 있다. 어딘가ㅡ아마 높은 벽돌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 P226
‘이쪽 ‘현실세계‘에서 나는 중년으로 불리는 나이에 접어든이렇다 하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는 한 남자다. 더는 그 도시에 있던 때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아니다. 눈에 상처를 내지도 않았고, 오래된 꿈을 읽을 자격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거대한 사회를 구성하는 몇 가지 시스템 중 하나, 그톱니바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매우 작고 대체가능한 톱니바퀴다. 그 사실을 얼마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올 수 없다. - P226
이 현실이 나를 위한 현실이 아니다, 라고 피부로 느끼는 감각은, 그 깊은 위화감은, 아마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리라. - P228
관성을 박탈당하고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어 지면에 방치된 무거운 쇠공이 된 기분이었다. 결코 나쁜 감각은 아니었지만. - P229
모두 아귀를 맞추기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무대배경으로, 교묘하게 입체를 가장한 평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P229
그렇다. 나는 이 지상에 정지한 쇠공일 뿐이다. 매우 묵직하고 구심적인 쇠공이다. 나의 사념은 그 안에 단단히 갇혀 있다. 겉보기는 볼품없지만 중량만은 충분히 갖추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힘껏 밀어주지 않으면 어디도 갈 수 없다.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몇 번이고 나의 그림자를 향해 묻는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면 좋을까. 그러나 그림자는 대꾸해주지 않는다. - P230
적어도 그곳에서 나는 더이상 한곳에 묵직하게 정지한 쇠공이 아니다. 조금씩이나마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듯하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결코 나쁜 감각은 아니다. - P233
긴 꿈에서 깬 건 날이 밝기 전이었다. 주위는 아직 어둑하다. 그것이 꿈이었음을 인식할 때까지 그 꿈의 세계에서 내 몸을 완전히 걷어내어 이쪽 현실로 가져올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미묘한 중력의 조정 같은 것이 필요했다. - P234
그 꿈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려 했다. 마치 친한 사람들 사이에 마음을 담은 메시지가 오갈 때처럼, 무척 친절하고 구체적이고 알기 쉽게. 이윽고 창밖이 완전히 밝아오고 새들이 활기차게 지저컬 무렵, 나는 한가지 결론을 얻었다.
‘나에게는 새 직장이 필요하다‘ - P235
이제는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무겁게 머물러 있을 순 없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직장이란, 그렇다. 도서관 말고는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도서관 말고 내가 가야 할 장소는 없다. 이토록 간단한 사실을 왜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나는 드디어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관성을 얻어 차츰 전진한다. 생생하고 또렷한 꿈의 강력한 후원을 받으며. - P235
"실은 저도 선배에겐 이 후쿠시마현의 마을 도서관이 잘 맞지 않을까 했어요." "어째서?" "여긴 형식상 마을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이지만 실질적으로마을이 운영에 관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방공무원이 지켜야 하는 귀찮은 제약 같은 게 없을 거예요." "마을 운영 도서관인데 마을이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네, 그런 얘깁니다." - P245
오키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괜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저한테 선배는 예전부터 좀 신기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예측 불허라고 할까, 종잡을 수 없다고 할까…… 이번 일도 그래요. 잘 다니던 직장을 왜 갑자기 그만두고, 이름도 못들어본 시골 도서관에서 조건도 좋지 않은 일을 한다는 건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언젠가 내키시거든 그얘기나 좀 해주시면 좋고요." - P247
"고마워." 나는 말했다. 그리고 큰맘먹고 물어봤다. "그런데 혹시 자기 그림자의 존재가 신경쓰인 적 있나?" - P247
"나는 내 그림자가 아무래도 신경쓰여. 특히 최근 들어서.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 "저기...... 그것도 이번 이직을 고려한 이유 중 하나일까요?" "그런지도 몰라." - P248
머릿속을 텅 비워야 한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직감을ㅡ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방향감각을ㅡ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라고 오키는내게 말했다.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을 테지, 라고. - P251
어쩌면 나라는 인간에 대해 정말로 당혹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 P252
시곗바늘은 언제나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시간을 쌓아갔지만, 나에게 진짜 시간은ㅡ마음의 벽에 박힌 시계는ㅡ그대로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로부터 삼십년 가까운 세월은 그저 공허를 메우는 데 소비해온 것이나 다름없다. 텅 빈 부분을 무언가로 채울 필요가 있기에 주위에 보이는 것으로 그때그때 메워갔을 뿐이다. 공기를 들이마실 필요가 있기에 사람은 자면서도 무의식중에 호흡을 계속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 P254
"그런 설명을 하는 사이, 나는 문득 알아차렸다ㅡ큼직한 책상 구석에 모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남색 베레모였다.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부드럽게 길이 들었다. 게다가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ㅡ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ㅡ베레모였다. 놓여 있는 위치까지 똑같다. 나는 숨을 멈췄다.
‘무언가와 무언가가 이어져 있다.‘
시간이 거기서 뚝 멎어버린 것 같았다. 시곗바늘은 먼 과거의 중요한 기억을 열심히 찾는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바늘이 다시 움직이기까지 한동안 시간이 걸렸다. - P263
삼십 분쯤 걸려서 대강 이야기가 정리되자 고야스 관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남색 베레모를 집어 머리에 썼다. 볼일이 있어 슬슬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니 좀 기묘한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워낙에 약간 특이한 어휘를 구사하는 사람인 듯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모자가 멋지군요." 나는 슬쩍 떠보았다. - P267
이윽고 나는 고야스 관장의 옷차림에 관해 또하나 평범하지않은ㅡ특이하기로 말하면 베레모 이상인ㅡ사실을 발견했다. 고야스 관장은 바지가 아니라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훗날 고야스 씨는 자신이 왜 일상적으로 스커트를 입는지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첫째로는, 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네, 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 - P268
고야스 씨에 대해서는 무언가 알려지지 않은ㅡ적어도 내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ㅡ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았다. - P275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 - P280
생각할수록 고야스 씨에 대해 알아야 할 점이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유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P281
수호신을 모신 숲속의 사당 문을 함부로 열고 들여다봐선 안 된다, 하는 것처럼. 소박한ㅡ그러나 의식의 심층까지 굳게 배어 있는ㅡ종류의 터부다. - P282
몰라도 될 일은 계속 모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마도. - P283
"글쎄요. 연애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정신질환이다, 라고 말한 게 누구였더라?" - P287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 나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상당히 근사한 표현이다. - P292
가끔 도스토옙스키나 토머스 핀천, 토마스 만, 사카구치 안고, 모리 오가이, 다니자키 준이치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이 대출되기도 했다. - P294
‘뭐 어때, 곧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겠지‘라고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고야스 씨 말마따나 모든 것이 차차 선명해질 것이다.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흘러드는 것처럼. - P297
"신경쓰지 마세요. 이게 제 일이니까요." 먼저 퇴근하면서 미안한 내색을 하는 나에게 소에다 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소에다 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벽에 둘러싸인 도시의 도서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도서관에서도 출입문을 열고 잠그는 건 ‘그녀‘의 역할이었다. 그 소녀는 커다란 열쇠 다발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다. 단 하나 다른 점은, 그 도서관에서 출입문을 닫은 뒤 내가 나란히 길을 걸어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는 것이다. - P298
하지만 그 방의 공기는 이상하게 매캐하고, 잊혀버린 시대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커튼과 소파의 천색깔이 왠지 모르게 불온한 분위기를 풍겼다. 과거 이곳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의 부적절한 비밀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설령 지독한 졸음이 덮쳐온다 해도 여기서 낮잠을 자고 싶을 것 같진 않다. - P301
그는 늘 스커트를 입고 있었지만 허리 위쪽으로는 일반적인, 오히려 보수적이라 할 남성복을 걸치고 있었다. 단추를 목까지 잠근 흰색 셔츠와 반듯함 그 자체인 트위드 재킷, 무늬없는 진녹색 베스트,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언제나 흐트라짐 없는, 조금은 고풍스러워 보여도 더없이 청결한 옷차림이었다. 그렇게 지극히 중장년 남성다운 옷과 스커트(그리고 타이츠)의 조합은 아무리 봐도 조화롭다고 하기 힘들었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눈곱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 마을 사람들도 오랫동안 그 모습에 익숙해져 일일이 눈길을 주지 않는 듯했다. - P304
내리는 눈은 어쩔수없이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의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겨울이 되면 그 도시에도 자주 눈이 내렸다. 그리고 눈 속에서 많은 단각수들이 죽어갔다. 그런데 그 도시에서, 나는 어떤 신발을 신고 다녔던가? - P305
그 도시에 대해 잘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그 외에도 많았다. 어떤 건 지나칠 만큼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어떤 건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신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것 중 하나다. 그렇게 기억이 띄엄띄엄하다는 사실이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기억을 잃은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기억하는 것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일까? 어디까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어디부터가 가짜일까? - P306
게다가 나는 굳이 말하자면 적당한ㅡ그럭저럭 참을 수 있을 정도의ㅡ추위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맛보았던 것이니까. 주위를 감싸는 냉랭한 공기는 그 도시에서의 생활을 다시금 내 마음에 되살려주었다. - P307
우리가 앞으로 지나가도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치 우리 모습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왠지 불가사의한 광경이었다. 꼭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다. - P309
원래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쓰던 방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정사각형 방에는 어딘가 수수께끼 같은 의미심장한 공기가 감도는 듯 느껴졌다. 저 옛날 이곳에서 누군가가 중요한 비밀을, 누군가에게 남몰래 소리 죽여 털어놓았을 것같은...... 그리고 나는 보았다. 방 한쪽에 새카맣고 고풍스러운 장작난로가 놓여 있는 것을. - P311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숨을 고른뒤 다시 눈을 떠서 그것이 실제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확인했다. 틀림없다. 환영 같은 게 아니다. 벽에 둘러싸인 그도시의 도서관에 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ㅡ혹은 똑같다고 밖에 볼 수 없는ㅡ난로였다. 검고 둥근 연통이 벽으로 이어져있었다. 나는 말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그 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P311
"나는 제자리에 선 채 여전히 난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실제로 사용할 수 있고요?" "아무렴요. 사용할 수 있다마다요." 고야스 씨는 눈을 반짝이며 단언했다. "실은 해마다 겨울이 되면 불을 지펴서 잘 써왔답니다. 장작은 부지 내 다른 장소에 넉넉하게 쌓여 있습니다. 장작 걱정은 전혀 없지요. 근처의 사과 농가가 폐업하게되어 오래된 사과나무를 베어내면서 인심 좋게 내주셨답니다. 가깝게 지내는 제재업자가 장작으로 쓰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었고요. 태우면 무척 좋은 사과 향이 나지요. 네, 이게 또 실로 향긋하답니다. 어때요, 지금 한번 장작을 가져다 불을 붙여볼까요?" - P312
"원래는 어떤 용도로 쓰던 방일까요?" 고야스 씨는 고개를 가볍게 기울이고 귓볼을 긁적였다. "글쎄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이 건물은 예전에 양조장이었어요. 도서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절반 넘게 개축했습니다만 나머지 부분. 요컨대 이 언저리는 손대지 못하고 남겨졌습니다. 이 방이 과거에 어떻게 사용됐는지는, 네, 유감스럽지만 옛날 일이라 저도 알 수 없군요." - P313
고야스 씨와 나는 그 정사각형 방을 나와 어둑한 복도를, 소에다 씨가 앉아 있는 카운터 앞을 사람이 뜸한 열람실을 통과해 2층 관장실로 돌아갔다. 아까 방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앞을 지나가도 누구 하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그 정사각형 방과 검은색 구식 장작 난로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다음날도. - P313
12월에 접어들어 그 겨울 첫 한파가 닥쳤다. 눈발이 흩날렸다. 나는 시험삼아 관장실을 정사각형 반지하방으로 옮겨보기로 했다. 소에다 씨에게 그렇게 전하자 몇초동안 말이 없었다. 짧지만 묘하게 깊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호숫바닥에 가라앉은 작은 저울추처럼. - P314
그때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에다 씨가 건물 내부를안내했을 때는 그 방을 본 기억이 없었다. 만약 보았다면 틀림없이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방은 기묘할 정도로 반듯한 정사각형이고 장작 난로도 놓여 있었다. 내가 그 광경을 놓칠 리 없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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