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배경이 어느덧 요즘 날씨와 같은 추운 겨울로 접어든다. ‘나‘가 도서관 관장으로 일하는 집무실이 추위를 견디기에 부족한 곳이라 전임 관장에게 도움을 받아 미지의 한 장소를 소개받게 되는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다. 예전에 ‘나‘가 있었던 ‘그 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있었다. 주인공인 ‘나‘는 잠시 회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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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곁길로 나와서, 위의 내용과는 약간 결이 다른 얘기긴 한데, ‘나‘가 현실에서 도서관 관장업무를 하는 것과 관련된 실무적인 내용들이 간간이 나와서 도서관에서 어떤 업무를 하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어서 좋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서관에 주로 책을 빌리는 이용자 입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갈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실무 직원들이나 직급이 좀 더 높은 관리자 분들은 어떤식으로 일을 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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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야기가 쭉 이어지는데 위에서 말했던 매개체(난로) 외에도 마치 ‘데자부‘ 같이 예전에 ‘그 도시‘ 에서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장면이나 물건들이 하나 둘씩 등장한다. 또한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도 ‘그 도시‘에 있었던 인물들과 지금 ‘나‘가 있는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이 묘하게 대칭적으로 들어맞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 일일이 그 구조를 써보는건 자칫 ‘스포일러‘ 가 될 수 있기에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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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쭉 읽다가 p.341에 고야스 씨가 큰맘먹고 털어놓은 말을 읽는 순간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야기의 맥락을 아예 모르면 이게 뭐 온 몸에 전율까지 일어날 일인가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마 내 말에 어느정도 공감하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래 나는 책 읽는 집중력이 그닥 좋은 편이 아니라 한 번에 수많은 텍스트를 쉬지 않고 읽는 것을 힘겨워하는 사람인데, 내 몸에 전율을 일으키기 시작한 이 부분부터 대략 30 page 정도를 한 숨도 쉬지 않고 완전히 이야기에 몰입해서 읽어나갔다. 이런 표현이 어떨진 모르겠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동안 무뎌져서 그 자리에 계속 잠자코 머물러 있던 내 뇌세포들을 정말 수도 없이 깨워내고 또 깨워냈던 것 같다. 독자마다 감상의 정도에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 수야 있겠지만, 지금까지 읽은 부분 중에서는 가장 임팩트 있게 느껴졌던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이런 맛에 이런 소설을 읽는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아, 이래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유명하기도 하고 베스트 셀러 작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썼던 페이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다는 개인적인 고백을 한 적이 있는데, 오늘 읽은 부분의 임팩트가 너무나도 강력하게 느껴져서 앞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쓴 작품들을 의식적으로 찾아읽어 볼 지도 모르겠다.

얼마전에 이 책과 관련한 다른 독자들의 리뷰를 잠깐 봤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스토리나 어떤 특징 같은 것들이 그간 출간되어 온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오버랩되는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이 얘기를 듣다보니 자연스레 무라카미 하루키가 출간해왔던 그간의 작품들에도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호기심이 마구마구 샘솟아 흘러넘칠듯 하다.

그 의문은 전부 가슴속에 담아두고 소에다 씨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왠지 몰라도 이 자리에서는 그런 질문을 하지않는 게 좋겠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 P316

네 개의 말없는 벽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 P317

나는 그 형용할 수 없는 풍미를 그리워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 쓴맛을 다시 느끼고 싶다고.
그래도 침묵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난로와, 해질녘을 생각나게 하는 어둑한 방과, 이따금 달가닥 소리를 내는 오래된 주전자가 어느 때보다 그 도시를 가깝게 불러들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잃어버린 도시의 환상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다. - P318

그리고 되도록 그 도시와 그 도서관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건 위험하다. 순식간에 깊은 환상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만다. 퍼뜩 정신이 들면 책상 위에 팔꿈치를 짚고서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손에 쥐고 있던 연필은 어느새 사라졌다) 사고의 미로를 정처없이 헤매고 있다. 왜 나는 여기 있을까, 왜 나는 저쪽에 없는 것일까・・・・・・ 그렇게. - P319

이곳에서 나는 도서관장으로서 사회적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팽개치고 개인적인 환상의 세계에 몰입해 있을 순 없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어느새,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나도 모르게 돌아가 있었다. 단각수들이 발굽 소리를 내며 도로를 걷고, 하얀 민지가 앉은 오래된 꿈이 선반에 쌓여 있고, 냇버들의 가느다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바늘 없는 시계탑이 광장을 내려다보는 세계로. 물론 이동하는 건 나의 마음뿐이다. 혹은 의식뿐이다. 실제 나의 육체는 늘 이쪽 세계에 남아 있다ㅡ아마도. - P320

"사과나무 향이 아주 근사하죠? 네, 희한하게도, 향긋하지요." 나는 그 말에도 동의했다. 장작에 불을 붙이면 이윽고 방안에 어렴풋한 사과 향이 감돈다. 그러나 그건 기분좋은 동시에 내게는 다소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향기가 나를 알게 모르게 깊은 몽상의 세계로 이끄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어떤 틀을 벗어난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기척이 있었다. - P322

그러고 보니 그 도시의 문 바깥에 사과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지, 나는 생각했다. 문지기가 사과를 따서 도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문밖으로 나가는 일이 허락된 자는 문지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도서관의 소녀는 그 사과로 과자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아직도 그 맛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적당히 달고 찌르듯이 새콤한, 깊은 자연의 맛이 서서히 몸에 스며들었다. - P322

이 작은 정사각형 반지하 방에서 이렇게 고야스 씨와 단둘이 있는 것이 나는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에 바늘이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 P323

처음에는 내 눈이 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일시적으로 그림자가 져서 바늘이 보이지 않은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티내지 않으며 눈을 비비고서 다시 보았지만, 그가 왼손에 차고 있는 오래된 손목시계ㅡ아마 수동식일 것이다—의 문자반에는 바늘이 없었다. 시를 가리키는 짧은 바늘도, 분을 가리키는 긴 바늘도, 초를 가리키는 가는 바늘도, 그 외 다른 어떤 종류의 바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숫자를 새겨넣은 문자반이 있을 뿐이다. - P324

하마터면 고야스 씨에게 물어볼 뻔했다. 왜 당신 손목시계에는 바늘이 없습니까, 라고. 그러면 고야스 씨는 그 이유나사정을 선선히 설명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그렇게 물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가 나에게 그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알리고 있었다. 나는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몇 번 더 넌지시 그 왼 손목에 눈길을 주었을 뿐이다. - P324

혹시 몰라 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에 총체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건 아닌지 불현듯 걱정스러워져서. 하지만 내 왼손목 위 시계 문자반에는 여느 때처럼 모든 바이 달려 있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시각은 오후 두시 삼십육분사십오초였다. 이내 사십육초가 되고, 사십칠초가 되었다.
시간은 이 세계에 아직 무사히 존재했고, 쉼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시계만 봐서는ㅡ그렇다는 말이지만. - P325

그 시계탑과 똑같다. 나는 생각했다.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의 강가 광장에 서 있던 시계탑과 똑같다. 문자반은 있지만 바늘은 없다. - P325

시공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며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와 무언가가 뒤섞인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경계의 일부가무너지고, 혹은 모호해지고, 현실이 여기저기서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 혼란이 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초래한 것인지 아니면 고야스 씨가 초래한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혼돈 속에서도 어떻게든 침착함을 되찾고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해야 할 말을 잃었고, 대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 P325

문득 고야스 씨가 무언가를 떠올린 것 같았다. 아니편 갑자기 기억해냈는지도 모른다. 눈동자가 확 밝아지고 길게 뻗은 눈썹이 딱 한 번 꿈틀거렸다. 그리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제부터 할 발언의 예행연습을 하는 것처럼, 작은 입술이 움직에 몇 마디 소리 없는 말을 했다. 어렴풋이, 그러나 뚜렷한 의사를 지니고. 그렇다, 그는 나를 향해 무언가를 알리려 했다ㅡ아마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내용을. 나는 책상 맞은 편에서 그 말을 기다렸다. - P326

그런데 마침 그때 난로 안에서 장작이 허물어지며 와르르 소리를 냈다. 동시에 그에 호응하듯 난로 위 검은색 주전자가 하얀 김을 세차게 피워올렸다. 고야스 씨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쪽을 보고(평소 같지 않게 재빨랐다), 날카로운 눈길로 불꽃의 상태를 살펴 이변이 없음을 확인한 후 다시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P326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가 하려던 말이ㅡ그게 무엇이었는지 몰라도ㅡ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눈동자에 여느 때처럼 느긋한 기색이 돌아왔다. 해야 하는 말은 이제 없었다.
원래는 있었지만 붉은 난롯불이 남김없이 빨아들인 것 같다. - P326

시곗바늘이 없는 오래된 손목시계를 차고, 늘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한 노인ㅡ그 수수께끼 같은 존재는 무슨 의미일까.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마 나 개인을 향한 메시지가・・・・・・ - P327

"고야스 씨?" 그녀는 희미하게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삼십 분 전까지 반지하 방에서 같이 말씀을 나눴는데요. 오신건 두시가 안 돼서고요."
"글쎄요. 저는 못 봤습니다"라고 그녀는 묘하게 삐걱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볼펜을 들고 하던 일로 돌아갔다. 희한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소에다씨는 자기 자리인 카운터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거니와 주의력이 날카롭기에 사람이 들고 나는 걸 놓칠 리 없다. 그런 사람이다. - P328

고야스 씨는 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왜 하필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장작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졌을까? 꼭 그 발언을 가로막으려는 것처럼. 발언자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봤지만, 내 모든 사고와 추론은 번번이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했다. - P328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는 소녀가 항상 나를 위해 미리난롯불을 지펴주었다. 내가 저녁 무렵 도서관 문을 열면 방은 딱 알맞은 정도로 훈훈했고, 난로 위에서 커다란 주전자가 우호적인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런 준비를 해주지 않는다. 내손으로 직접 시작해야 한다. 도서관 가장 안쪽에 있는 반지하 방은 이른아침이면 차갑게 식어 있었다. - P331

책상 앞에 앉아 따뜻한 홍차를 맛보면서, 높은 벽에 둘러인 그 도시와 도서관에 있던 소녀 생각에 빠져든다. 어찌됐건 그 생각을 막을 순 없다. 그렇게 겨울 아침의 약 삼십 분이 막연하게 흘러간다. 나의 의식은 두 세계 사이를 정처 없이 오가고 있다. - P332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다음, 쇠바퀴에 갈고리를 고정하듯 의식을 이쪽 세계에 묶어둔다. 그리고 이 도서관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한다. 나는 이제 ‘오래된 꿈‘을 읽지 않는다. - P332

나는 독서할 때 쓰는 오래된 안락의자(고야스 씨가 어디선가 구해다준 것)에 앉아, 플로어스탠드 불빛 아래 플로베르의《감정 교육》을 재독하고 있었다. 오래된 활자에 눈이 피곤해져 슬슬 잘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ㅡ평소와 별다를 것 없이. - P333

"전화로 말해도 될 만큼 간단한 용건이 아닙니다. 전화는 원래부터 썩 믿을 만한 게 못 되고요." - P333

그 정경은 어릴 적 읽었던 그림책의 한 장면 같았다. 무언가가 지금부터 바뀌려 한다ㅡ그런 예감이 들었다. 길모퉁이를 돌면 그곳에서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소년 시절 내가 종종 느꼈던 감각이다. 그 무언가는 내게 중요한 사실을 알리고 그 사실은 또 내게 응분의 변용을 재촉하리라. - P337

"저는 이 방의 난로가, 네, 그 무엇보다 좋답니다." 이윽고 고아스 씨는 그렇게 말했다.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이 불꽃이, 희미한 사과나무 향이, 저의 몸과 마음을 안쪽부터 천천히 덥혀줍니다. 제게 그 따뜻함은 귀중하답니다. 이 덧없는 영혼을 덥혀주니까요. 이러는 게ㅡ제가 여기 찾아오는게ㅡ당신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만." - P339

"아뇨, 소에다 씨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묘하게 단호한 투로 고야스 씨는 말했다. "그 사람은 제가 밤중에 여기 온다는 걸 모릅니다. 앞으로도 모를 테고,
굳이 말씀드리자면, 네, 알 필요도 없답니다." - P339

알 필요가 없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사정을 설명하려면 얘기가 길어집니다." 고야스 씨는 말했다. "실은 더 빨리, 조금씩이나마 당신에게 진실을 말씀드려야했습니다. 하지만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하고 이렇게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저의 불찰이겠지요." - P340

"제가 해드릴 이야기가 상당히 기묘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아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울 테죠. 하지만 당신이라면 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어주리라 확신합니다. 당신에게는 그것을 믿을 자격이 갖춰졌기 때문입니다." - P340

"자격이라는 건, 네, 다소 어울리지 않는 말인지도 모르겠군요. 뭐랄까, 다분히 형식적인 표현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것말고 적절한 표현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처음 당신을 만난 순간부터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말하려는 것을, 또한 말해야 하는 것을 올바로 알아듣고 이해해줄 거라고, 그런 자격을 갖췄다고."
난로 안에서 파삭 하고 장작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물이 자세를 바꾸며 내는 듯한 작고 갑작스러운 소리다. - P341

"큰맘먹고 털어놓겠습니다." 고야스 씨가 말했다. "저는 그자가 없는 인간입니다."
"그림자가 없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고야스 씨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림자를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그림자라는 게 없지요. 언젠가 알아차리시겠거니 했습니다만." - P341

그 말에 나는 방의 흰 벽에 눈길을 던졌다. 아닌 게 아니라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벽에 비친 건 나의 검은 그림자뿐이다. 천장에 매달린 전구의 노란 빛을 받아 약간 비스듬히 벽 위로 늘어져 있었다. 내가 움직이면 그것도 움직인다. 그러나 나란히 있어야 할 고야스 씨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네, 보시다시피 제게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고야스 씨는 말했다. 그리고 확인시키듯 한 손을 전구 앞에 내밀어 벽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제 그림자는 제게서 떨어져 어딘가로 가버렸답니다." - P341

"제가 죽었을 때입니다. 그때 저는 그림자를 잃고 말았어요.아마도 영원히."
"당신이 죽었을 때요?"
고야스 씨는 작고 확고하게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네, 지금으로부터 일 년 하고도 조금 더 전에. 그뒤로 저는 그림자없는 인간이 되었답니다."
"즉, 당신은 이미 죽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얼어붙은 쇠못 못지않게, 고스란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 P342

"오해를 무릅쓰고 익숙하면서 편의적인 표현을 쓰자면, 지금 저는 유령이라고 해도 될 존재입니다." - P344

세상에는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하거나 남을 놀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고야스씨는 그런 농담을 즐길 타입이 아니다. 게다가 어찌됐건 그에게는 정말로 그림자가 없다. 당연한 소리지만, 농담을 하기 위해 그림자를 잠깐 지워버릴 순 없다. - P345

"네, 저도 모르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답니다." 고야스 씨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제가 죽어서 왜 무로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의식을 가지고 일시적인 형태를 띤 채 계속 이 도서관에 머무를 수 있는지, 저도 잘은 모릅니다." - P345

"의식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죽은 뒤에도 의식이 있다는 건, 네, 한층 불가사의한 일이랍니다. ‘의식이란 뇌의 물리적 상태를 뇌 자체가 자각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 있습니다. 글쎄, 어떨까요. 그게 과연 올바른 정의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P346

"네. 그렇다면 제게는 아직 뇌가 존재하는 셈입니다. 그렇죠? 의식이 있으면, 네, 필연적으로 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육체가 없는데 뇌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고야스 씨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그 전개가 일상적 수준을 크게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 P346

"네. 제 몸은 이제 이 세계에 없습니다. 지금은 일단, 네, 생전의 제 모습을 이렇게 빌려 쓰고 있지만, 장시간 유지하진 못합니다.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져 무가 됩니다. 어디까지나 잠시잠깐의 일시적인 모습이지요." - P346

"네, 의식은 그대로 확고하게 존속합니다. 육체가 없어도 의식은 멀쩡합니다. 저도 그게 큰 수수께끼랍니다. 육체가 없는데, 그리고 육체가 없으면 필연적으로 뇌도 없어야 하는데, 보다시피 의식이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이, 네에, 이렇게 죽어서도 여전히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게 왠지 기묘하답니다." - P347

"뇌와 육체 말고, 그것과 별개로 영혼이라는 존재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까요?" - P347

"많은 이들이 ‘영혼‘이라는 말을 흔히 쓰지요. 그러나 영혼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알기 쉽게 정의하고 설명해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 단어가 워낙 빈번하게 여러 국면에서 사용되는지라. 다들 영혼이라는 것이 우리 몸안에 엄연히 존재한다고 막연하게나마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죽어보면 알 수 있는 게, 영혼이란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답니다. 그걸 이용해 무슨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무엇보다 실제로 의지할 수 있는 건 의식과 기억뿐입니다." - P348

"제 경험으로 말씀드리자면,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대개 예상도 못했을 때 일어난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죽음이란, 인생에서 제법 중요한 일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 P349

"네. 소에다 씨는 제가 유령이 된 사실을 기본적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저와 소에다 씨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며 어떤 면에선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데다, 그녀는 제가 유령이 된 사실을 이른바 자연 현상으로, 그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적잖이 놀랐던 모양입니다만." - P352

"당신이 면접을 보러 이리로 오셨을 때, 저는 보자마자 첫눈에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아아, 그렇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특별하다. 이 사람은 나의 존재를 일시적인 육체를 동반한 의식으로서의 나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오롯이 받아들일 것이 분명하다고. 뭐랄까요. 생각지도 못한 기적적인 해후였습니다." - P354

"하지만 저는 조심 또 조심하며 한동안 당신의 언동을 신중히 관찰했습니다. 사실을 털어놓아도 될지 나름대로 주저하고 있었지요. 사람의 생과 사에 관한 대단히 미묘한 문제니까요. 이해하시겠지만, 사실 저는 유령이랍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가 그리 간단하진 않으니까요. 마땅한 시간의 경과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나고, 산간지방의 짧은 가을이 지나고, 이처럼 혹독한 겨울이 찾아와 이 방 난로에 불을 지피는 계절이 오자 마침내 마음속 깊이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받아들여주기에 실로 마땅한 상대라고요." - P354

"당신은 그림자를 잃었던 경험이 있지요." 이윽고 그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러고는 등을 펴고서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보았다.
"어떻게 아십니까? 제가 그림자를 한 번 잃은 적 있다는 걸요." - P355

"저는 유령입니다. 생명이 없는 의식이지요. 그런고로 보통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한 번 그림자를 잃은 적 있다는 건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 P356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잃는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고야스 씨는 눈부신 것을 보려고 할 때처럼 실눈을 떴다.
"아아, 당신은 그걸 모르는군요?"
"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거스르지 않고 따랐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판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제 그림자와 일시적으로 떨어져 분리되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그림자가 없는 도시에서." - P356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렇게 죽은 몸이 되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네, 살아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유감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이 죽었다고 갑자기 똑똑해지진 않더군요. 그러니 아쉽지만 당신 질문에 똑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하겠어요. 또한 이 세계에는 간단히 설명해선 안되는 일도 있답니다."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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