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읽은 마지막 부분에 이어서 오늘 읽은 초반부에서는 ‘나‘가 도서관 직원에게 ‘그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그 소년‘의 가정형편이 어떻고 부모님이나 형제들과의 관계는 어떤지 같은 것들이다.

‘나‘는 얘기를 듣고 난 뒤 ‘그 소년‘의 심정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에 어떤 확고한 기준 같은 것이 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될 듯 하다. 여기서 일일이 말하기엔 말이 너무 길어지기도 할 뿐더러 자칫 ‘스포‘가 될 수도 있기에 이정도로만 한다. 다만 독자인 내가 여기 밑줄 그은 것만 읽어봐도 대략적인 유추는 가능할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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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나‘가 고야스 씨의 무덤에 다녀오는 일을 마치고 습관적으로 들르는 카페가 있다. 앞에서도 이 카페와 관련된 간단한 이야기들이 잠깐잠깐씩 나왔었는데 그 때는 이야기의 포커스가 위에서 말한 ‘소년‘에게 가 있었다면, 이제는 카페를 운영하는 ‘한 여자‘ 에게로 포커스가 옮겨지는 듯 하다. 갑자기 ‘나‘와 이 ‘여자‘의 관계가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한 층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뒷 내용을 아직 몰라서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갈진 모르겠지만, 독자인 나의 촉(?)으로 봤을 땐 뭔가 이야기 상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물일 것 같지는 않은 느낌이다.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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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연결고리(?)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소년은 이 현실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의미로는 뿌리내리지 않은 것이다. 임시로 매어둔 기구같은 존재. 지상에서 살짝 떠오른 상태로 살고 있다. 그리고 주위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그러니 매어둔 고리를 풀고 이 세계를 영원히 떠나버리는 일에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 P535

나는 무심결에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 지상 어딘가에단단히 이어져 있을까? 그곳에 뿌리내리고 있을까? 나는 블루베리 머핀을 생각했다. 역 앞 커피숍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폴 데즈먼드의 알토색소폰 음색을 생각했다. 꼬리를 세우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야위고 고독한 암고양이를 생각했다. 그것들은 내 정신을 이 세계에 조금이라도 붙들어매주고 있을까? 아니면 너무도 하찮아서 논할 가치도 없는 존재들인 걸까? - P535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 도시로 갈 생각이니?"
소년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이어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그 손가락을 허공으로 향했다.
나는 그 제스처를 나의 언어로 치환했다. "내가 너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그 뜻이야?"
‘제러미 힐러리 붑 박사‘가 프린트된 파카를 입은 소년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예스. - P536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나도 내 의지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그 도시에 갈 수 있는 건 아냐. 하물며 너를 그곳까지 안내하는 건 도저히 자신이 없어. 나는 에떤 우연으로, 어쩌다가 그곳에 다다랐을 뿐이야." - P536

내가 그 문을 통과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다. 이미 그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으니까. 소년을 배웅하고, 문이 다시 닫히는 걸 지켜본 뒤, 나는 혼자 이쪽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 P537

소에다 씨에게 소년이 지금 읽는 책의 제목을 물으면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소년이 빠져 있는 책은 『아이슬란드 사가saga』『비트겐슈타인, 언어를 말하다』 『이즈미 교카 전집』 『가정의학백과』 등이었다.
하나같이 꽤 두꺼운 책이다. 보아하니 내용을 따지기보다 무건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얇은 책은 성에 차지 않는 것이리라. 식욕이 왕성한 사람이 식당에서 가장 두툼한 스테이크를 주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 P538

우리는ㅡ소년과 나는ㅡ이 지상의 현실세계에서 각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 P538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로 가기그곳의 주민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이쪽 세계에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이쪽 세계에 그를 붙잡아둘 만한 힘을 지닌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분명하다. 그러나 소년의 힘만으로는 그 도시에 갈 수 없다. 나의 ‘안내‘를 필요로 한다. 그 도시로 통하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은ㅡ혹은 한 번이라도 그 길을 밟아본 사람은ㅡ나 하나 뿐이니까. - P539

하지만 나 역시 그 도시로 향하는 길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진 못한다. 예전에 간 적이 있을 뿐이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무의식중에 그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같은 식으로 다시 가보라고 한들 방법을 모른다.
그리고 또하나, 내가 판단하기 힘든 것이 있다. 소년을 저쪽세계로 데려가는 일이 과연 올바른 행위인가 하는 문제다. 그건 도덕적으로 용인되는 일인가? 만약 소년이 그 도시에 들어가 ‘꿈 읽는 이‘로 정착한다면, 그 결과 아마 이 현실세계에서는 그의 존재가 소멸할 것이다. - P539

나는 그림자가 죽지 않았기에, 그리고 그림자를 벽 바깥으로 도망시켰기에 이쪽 세계로 복귀할 수 있었고(좀더 정확히 말하면 돌려보내졌고), 결과적으로 이 세계에서 존재가 지워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 P539

그러나 만약 소년이 자신의 그림자와 떨어지고 그 그림자가목숨을 잃는다면, 소년의 존재는 이쪽 세계에서 영원히 결정적으로 상실된다. - P539

아무리 소년 스스로가 진지하게 원한다 해도 또한 그것이 소년의 인생에서 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인다 해도, 그건 인간으로서 도의에 반하는 행위가 아닐까? - P540

"M**이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지 저는 물론 알 길이 없어요. 감정을 겉으로 거의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맞아요. 집이 결코 편하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아버지, 지나치게 간섭하는 어머니. 어느 쪽도 그애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도 없는 듯하죠." - P543

소에다 씨의 얘기를 듣고 소년의 가정 사정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되어서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해졌다.
그 소년에게는 집을 떠나기를, 이 세계에서 나가기를 간절히 원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리면 어머니는 틀림없이 비탄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소년을 위해서는 어머니와 떨어지는 편이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새끼고양이들이 어느 시점에 어미에게서 떨어져 자립하는 것처럼, 새끼를 잃은 어미고양이는 한동안 주위를 필사적으로 찾아다니지만 이윽고 단념하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다음 사이클로 들어간다. 동물들에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계절이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 P544

또한 소년에게는 친구라고 할 만한 상대가 한 명도 없다. 이 세계에서 어디까지나 고립된 존재다. 사라진다 해도 그 공백은 순식간에 메워질 것이다. 소리도 없이, 눈에 띄는 파문도 일으키지 않고, 매우 조용히. - P545

가령 내가 그 소년의 입장이라면ㅡ소에다 씨가 말했다시피그에 입장에서 감정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지만ㅡ역시 이 마을에 머무르기보다 다른 세계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싶다고생각할 것이다.
이를테면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 P545

아마 고야스 씨의 영혼은 이미 이 세계를 벗어났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 대화한 지 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 역시 이 지상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 두 사람이 실제로(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나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건 분명 무미건조한 세계일 것이다. 나는 그 두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호감과 공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 P548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어요. 봐요, 지난번에 그 남자애도 말했잖아요, 수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수심이 가득하다고."
"그애가 말한 게 아니에요. 제가 그랬죠. 그런 동요 가사가 있다고. 그애는 ‘당신은 수요일에 태어났다‘고만 했고요."
"그랬던가."
그애는 기본적으로 사실만 말해요."
"사실만 말한다." 그녀는 감탄한 듯 되풀이했다. "대단한 걸요." - P551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무언가가 나를 붙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가게로 돌아가, 카운터 안쪽에서 커피를 내리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P552

나는 가게를 나와 집까지 걸었다. 걸으면서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을 하나하나 떠올려보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그녀에게 식사를 권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거의 자동적으로 내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여자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한건 생각해보면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대체 무엇이 나를 그러도록 만들었을까? 혹시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 P553

설령 그렇다 해도 그녀의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지는 알 수 없다. 전부터 막연한 호감은 있었지만 딱히 무언가를 보다ㅡ친밀한 유대 같은 것을ㅡ원하는 유의 호감은 아니었다. 매주 월요일 오전, 내게 커피와 머핀을 내주는 인상 좋은 삼십대중반의 여자, 그게 다였다. 체격이 늘씬하고, 혼자서 기민하게 움직인다. 미소에는 자연스러운 따뜻함이 담겨 있다. - P553

그날 그녀의 어딘가에 특별히 마음이 끌려서 식사를 권하게된 것이리라. 그녀와 나눈 짧은 대화 속의 무언가가 내 마음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저 내가 혼자 지내는 것에  지쳐서, 하룻저녁 기분좋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았을 뿐인지도. 하지만 아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직감이 그렇게 알렸다. - P553

어쨌거나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반쯤무의식적으로,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식사를 권했고, 그녀는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면 많은 일이 그렇듯 당사자의 의도나 계획과 무관하게, 자연스럽고 멋대로 나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좀더 생각해보면 지금 내게는 의도나 계획 따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 P554

"안토니오 비발디는 1678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생전에 육백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작곡가로도 인기를 누렸고 명바이올리니스트로 화려하게 활약했지만, 그후 오랜 세월 전혀 회고되지 않아 잊힌 과거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에 재평가의 기회가 왔고, 특히 협주곡집  <사계>의 악보가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면서, 사후 이백 년이 넘어서야 단번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이백 년 넘게 잊힌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백 년은 긴 세월이다. ‘전혀 회고되지 않고 잊힌‘ 이백년. 이백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 아니, 이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 P555

하지만 전부 내 멋대로 해본 추측일 뿐이다. 소년의 뇌속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그 자신밖에 모르는 일이다. - P556

그럼에도 나는 눈을 감고서 고독한 소년의 내부에 세워진 지의 기둥 (이라고 해야 할 것)의 모습을 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땅속 저 아래 솟구친 거대한 종유동의 기둥 같은 것이리라. 사람이 아직 발을 들인 적 없는 칠흑의 암흑 속에,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고 당당히 기립해 있다. 그 어둠 속에서 이백 년은 하찮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 P556

어쩌면 그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들어감으로써 그 ‘지의기둥‘을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지의 적절한 아웃풋 통로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 P556

옐로 서브마린 소년……… 그 자신이 그대로 하나의 자립한 도서관이 될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궁극의 개인 도서관. - P557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말을 했다. "혹시 싫지 않다면, 우리집에 가지 않겠어요? 간단한 요리는 바로 해줄  수 있는데." - P559

"난 이 년 전쯤에 이혼했어요." 그녀는 노면이 얼마나 열어붙었는지 확인하듯 조심스레 발밑을 살피면서 말했다. "그 과정에서 좀 시달리느라 한동안 기분이 우울했죠. 아무런 의욕도 안 생기고. 그래서 어디든 좋으니 삿포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보자 싶었어요.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라도 좋았고." - P561

"여기 온 뒤로 이렇게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아무한테도."
"깊은 구덩이를 파고, 밑바닥을 향해 죄다 털어놓은 적은?"
"없어요. 당신은?"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있을지도." - P562

서로의 처지가 조금은 비슷하다는 데서 친밀감 가까운 감정이 싹텄는지도 모른다. 도호쿠 지방의 작은 산속 마을에 바람에 실려오듯 다다른 홀몸의 외지인들이다. 원래 알던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앞으로 이곳에 뿌리를 내릴지 어떨지. 그것도 확실치 않다. - P562

누군가와 식사 자리를 함께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마지막으로 다른 사람과 같이 식사한 게 언제였을까?). 그리고 제법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짝을 맞춘 식기를 테이블에 내놓고, 편한 대화를 나누면서 저녁을 먹는 것. 우리는 음식을 조금씩 입으로 가져가고 와인잔을 기울이면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었으므로 그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다. - P564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작게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무튼 언제 어디선가 중요한 무언가가 망가져버린 것처럼, 뭘해도 미묘하게 엇갈렸어요. 대화가 자꾸 어긋나고, 이런저런 취향이나 사고방식의 차이가 점점 드러났고, 그리고 섹스도.... 음, 대충 뭔지 알겠죠?" - P566

"결국엔 그 사람이 회사 동료와 외도 비슷한 걸 했고, 그걸 나한테 들킨 게 이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어요. 뭘 숨기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랬군요." 나는 말했다.
"그래도 그 여자와 그렇게 깊은 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얼결에 그랬다고 할까,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할까. 그 사람도 반성하고 진지하게 사과했죠.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뭐, 흔한 얘기예요.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죠." - P566

"제일 힘들었던 건 그 사람과의 이혼 자체보다. 내 마음에 확신을 품을 수 없게 됐다는 거였어요." 그녀는 손에 든 와인잔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앞으로 어떤 남자를 알아도, 그리고 결혼 같은 걸 해도 상대방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예전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 P567

"혹시 고등학교 동창회 나가본 적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동창회는 한 번도 나간 적 없는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옛날 일을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꼭 그런 건 아니고, 우리 학교, 우리 반이라는 것에 솔직히 큰 소속감을 못 느꼈어요. 같은 반이었던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 P568

"같은 반에 좋아하던 애 없었어요? 멋지다고 생각했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었지 싶어요."
"옛날부터 고독을 좋아했나?"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아마 어디에도." 나는 말했다. "다들 무언가를, 누군가를 원해요. 원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러게. 그럴지도 몰라요." - P568

"추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문제니까."
"더 추운 밤도 있었어요?" 그녀가 물었다.
"더 추운 곳도 있었어요." - P569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변길을 걸었다. 그녀의 부츠 급이 군데군데 얼어붙은 지면을 밟으며 까드득까드득 딱딱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도서관의 소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던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물소리가 들리고, 이따금 밤꾀꼬리가 지저귀고, 냇버들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가 걸친 오래된 레인코트는 바스락바스락 메마른 소리를 냈다.
내 안에서 시간이 뒤섞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끄트머리가 미묘하게 포개지고 있다. 만조 때 하구에 바닷물과 강물이 사방으로 섞여드는 것처럼. - P569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추위를 환영했다. 그게 내 안에 있는 혼란을 조금쯤 잠재워주었다. - P570

"그래도 궁금해요.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당신이 완성됐는지, 그걸 알고 싶은데."
"그렇게 흥미로운 과정은 아니에요.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서 평범한 일을 하며 혼자 조용히 살았지. 흔하디흔한 인생이에요."
"하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도저히 흔하디흔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녀가 말했다. "결혼 생각은 해본 적 있어요?"
"몇 번." 내가 말했다. "나도 평범한 인간이니까. 남들처럼 생각해본 적도 있죠. 그런데 그런 가능성이 생길 때마다 이상하게 잘 풀리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또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는 게 귀찮아졌고."
"사랑하는 게?"
그 말에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은 백지의 입김이라는 형태를 띠고 허공에 떠 있었다. - P570

"또 만나자고 해도 될까요?" 나는 출입문 안쪽에 서서 그녀 에게 물었다. 그 말 역시 거의 무의식중에 자연히 입에서 튀어 나왔다. 마치 숙련된 복화술사가 어딘가에서 내 입을 멋대로 움직여 말을 시키는 것처럼. - P572

"가게는 무슨 요일에 쉬죠?"
"매주 수요일이 휴일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다른 날은 아침 열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열고, 도서관은요?"
"매주 월요일이 휴관일. 다른 날은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예섯시까지 개관하고."
"아무래도 우린 해가 진 뒤에 만나는 수밖에 없겠네요."
"두 마리 부엉이처럼."
"어두운 숲속 깊은 곳, 두 마리 부엉이처럼." 그녀가 말했다.
"정기휴일을 월요일로 바꾸면 어때요. 당신이 주인이니 무슨 요일에 가게를 닫건 당신 자유니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렇네요. 조금 생각해봐야겠어요." - P572

죽은 자의 영혼에 어느정도 능력이 있는지, 살아 있는 나는 짐작할 수 없다. - P576

추운 밤 붉게 빛나는 불에는 유전자에 깊이 새겨진 집합적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었다. - P576

뭐가 어찌됐건 그녀의 모습이 내 마음 한구석(그러나 시선이 틀림없이 닿는 장소)에 머무른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내게 떠올리게 하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모습은 다른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그녀 자신, 독자적인 존재로 내 안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 P578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가?
대답은 아마 노일 것이다. 내 생각에, 나는 그 커피숍 여자를 사랑하진 않는다. 자연스러운 호감을 느끼지만 사랑과는 다르다. 사랑을 하기 위한 내 심신의 기능은 상대에게 나 자신을 고스란히 내주고 싶다는 종합적 충동 같은 것은 아주오래전에 다 타버린 듯하다. 언젠가 고야스 씨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인생의 아주 이른 단계에서 최고의 상대를 만났던겁니다. 만나버렸다, 라고 해야 할까요." - P579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거친 몇 번의쓰라린 경험이 명료하게 알려주었다. 주입시켰다, 고 해야 할까. 그렇다, 나는 몸으로 그 사실을 배웠다………… 적지 않은 수업료를 내고. 가능하다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본의 아니게 남에게 상처를 주고, 그 결과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는 경험은. - P579

과거의 성욕과 현재의 성욕을 정확히 가려낼 수 없었다.
그 두 가지가 내 안에서 맞닿아 하나로 뒤엉켰다. 그것이 나를 적지 않은 혼란에 빠트렸다.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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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100자평] 프란츠 카프카

3년 전이라 모든 작품이 일일이 기억나진 않지만 대표작이었던 ‘변신‘ 만큼은 나름 임팩트있게 느껴져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제 기억에 어렴풋이나마 남아있는 듯 합니다. 이 책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모음집이라 작가의 다양한 작품 라인업이 나와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때는 제가 북플을 하지 않을 때라 밑줄을 친다거나 읽으면서 간략한 후기 같은 것들을 남기지 못한채 지나갔던거 같은데, 예전 100자 평에도 썼듯이 그냥 아무런 배경지식없이 작품만 읽으면 굉장히 난해하지만 책의 뒷면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프란츠 카프카라는 사람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고 보니 읽었던 작품들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나마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이나 그의 작품세계가 궁금하신 분들께 추천할만한 책이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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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3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23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갑자기 소설 속에 등장한 ‘그 소년‘과 ‘나‘ 사이에 기묘한 일들이 발생한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은 밑줄 그은 내용들을 참조하시면 될 듯 하다

책에 이 ‘소년‘과 관련하여 도서관 직원인 소에다 씨를 통해 설명되는 이야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독자인 나의 어떤 직관적인(?) 느낌으로 봤을 때 갑자기 어느순간 소설 속에 등장한 이 ‘소년‘은 과거에 ‘그 도시에 있던 나‘ 를 상징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여러 정황상 이러한 내 나름의 결론에 이르렀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들을 독자인 내가 예상하면서 읽는 것이 때로는 머리를 피곤하게 하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을 저자가 독자들에게 원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여러 의미로 해석의 여지를 줌으로써 비록 똑같은 글일지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정답없는 방식이 굉장히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내게는 그다지 나쁜것 같지는 않다. 소위 말하는 ‘열린 해석‘이 가능하기에 내게는 이 소설이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씨앗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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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논한 얘기와는 별개로 전체 줄거리에 비하면 비교적 사소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p.508에 폴 데즈먼드 라는 연주가에 대한 간략한 얘기들이 나온다. 독자인 나는 이 소설에서 처음 들어봤는데, 재즈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에겐 이미 익숙한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뭐 하여튼 간에 중간중간 나오는 이러한 관련 정보들을 통해 내가 잘 몰랐던 분야에 대한 약간의 상식(?)을 넓히고 더해갈 수 있는 것도 이 소설의 소소한 유익함이라면 유익함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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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3에 밑줄 친 부분 중에 독서와 관련하여 비유적인 표현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꽃은 책을 상징하는 듯 하고, 나비는 책을 읽는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유가 너무나도 멋지다고 생각되어 밑줄을 안 치고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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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읽다 보면 p.529에 밑줄 친 부분 중에 현실세계에서 들려오는 현실의 소리에 ‘나‘가 반응하며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게 얼핏보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안되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말했다고 하면서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로 말했다는게 무슨 ‘성대모사‘를 한 것 같지는 않고, ‘나‘가 아닌 어떤 다른 영혼이 말을 했다는 거라고 생각하는게 맞는건지.. 도대체 뭐가 뭔지 단지 추측해볼 따름이다. 아예 내가 생각지도 못한 제 3의 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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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부분 막판에 ‘나‘와 얘기를 나누던 소년이 ‘그 도시‘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그 도시‘를 경험해 봤던 ‘나‘는 소년에게 ‘나‘가 경험했던 ‘그 도시‘에 관해 간단하게나마 얘기해주고 소년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 도시‘가 이상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암시하지만, 소년의 의지는 확고하다. 뒷 내용이 어떻게 이어질지 슬슬 궁금해진다.

그렇게 맥락 없고 단편적인 정보를 직소퍼즐처럼 끼워맞춰 지도의 형태로 완성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시각적인 사진기억력뿐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경이로운 능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내 기억에 따르면, 서번트 증후군에는 아무리 길고 복잡한 곡이라도 한 번 들으면 한 음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재현할 수 있는ㅡ연주하거나 사보할 수 있는ㅡ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도 그중 하나였다고 한다. - P494

그렇지만 내 기억이 나중에 변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다. 앞뒤 순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소년이 그린 지도에 맞추어 내 기억이 미묘하게 바뀌었을 가능성도 아주 없진 않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혼란스럽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추론인가? - P494

내 주위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형체를 이루고 있다는 막연한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어떤 힘에 의해 어딘가로 조금씩 이끌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최근에 시작된 일인지, 아니면 제법 예전부터 서서히 이어져온 일인지는 알 수 없다. - P495

내가 가까스로 알 수 있는 건 지금 나 자신의 위치가 아마도
‘저쪽‘과 ‘이쪽‘ 세계의 경계선 근처이리라는 것 정도였다. 이 반지하 방과 마찬가지다. 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도 아니다. 흘러드는 빛은 엷고 흐릿하다. 나는 그렇듯 어슴푸레한 세계에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인지 확실히 판단할 수 없는 미묘한 장소에,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확인하려고 한다. 내가 정말 어느 쪽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이라는 인간의 어느 쪽에 있는지를. - P495

그 지도가 내 마음을 미세하게 떨게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그것은 내 마음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덜덜 떨도록 만들었다. 지진이 멈추지 않는 땅 위의 젤리 상태 물체처럼. - P496

그 지도를 바라보는 사이, 내 마음은 알게 모르게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갔다. 눈을 감으면 나는 실제로 그곳을 흐르는강물의 소리를 듣고, 밤꾀꼬리의 애달픈 우짖음을 들을 수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문지기가 뿔피리를 불고, 단각수들의 발굽이 달각달각 돌길을 밟는 메마른 소리가 거리를 감쌌다. 내 옆에서 나란히 걷는 소녀의 노란색 레인코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세계의 귀퉁이를 맞비비는 듯한 소리다. 현실이 내 주위에서 살짝 삐걱이며 미세하게 흔들린 것 같았다ㅡ만약 그것이 진짜 현실이었다면 말이지만. - P496

"사나홀, 그냥 조용히 누워 있는다."
"네,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처럼요." 소에다 씨는 말했다. - P498

실제로 충전과 비슷한 원리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지난 능력(거의 인지를 초월한 능력이다)을 너무 활발히 가동한 나머지 신체 시스템의 용량을 넘어버린 건지도. 전력 과부하를 감지한 배전반 브레이커가 자동으로 내려가는 것처림. 그러면 한동안 누워서 오버워크 상태의 열원을 식히고, 신체 기능의 자연 회복을 꾀할 필요가 있다. 시기적으로 보아 어쩌면(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 도시의 지도를 작성한 것이ㅡ특별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그 작업이ㅡ이번 시스템 다운의 원인 중 하나인지 모른다. - P498

나는 꼭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지금(오전의 햇살이 흘러드는 밝은 도서관 카운터에서) 소에다 씨에게 서슴없이 그 질문을 던지는 게 과연 타당한 행동인지는 조금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큰맘먹고 물어보기로 했다. 최대한 간결한 표현을 사용해서.
"저기, 소에다 씨는 그 두 사람이 고야스 씨가 돌아가신 후에도 만난 것 같습니까?" - P500

지도는 저쪽 세계에서 내가 보았던 정경 하나하나를 놀랍도록 선명히 떠올리게 했다. 그 지도는 특수한 환각 장치처럼 내 기억을 활성화하며 세부를 정밀하고 입체적으로 발굴해갔다. 들이마신 공기의 질감, 희미하게 감돌던 냄새까지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 P502

아주 심플하게 그린 지도였지만 아무래도 거기에는 무언가특수한 힘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나흘 내내 혼자 방에 틀어박혀 지도를 앞에 두고 이곳이 아닌 세계를 떠돌았다. 내가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지 점점 혼란스러워질 정도로 깊이 그 환각 장치(같은 것)에 빠져 있었다. 순수한 환상을 얻기 위해 아편을 상용하는 18세기의 탐미주의 시인처럼. 내 손에 들런건 얇은 A4용지 한 장에 볼펜 같은 것으로 그린 간단한 지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 P502

의문은 많고 확실한 대답은 보이지 않는다. 의미를 모를 일 투성이다. 눈앞에 수없이 늘어선 수수께끼의 문, 그러나 열 수 있는 열쇠는 수중에 없다.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혹은 어렴풋이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지도에 예사롭지 않은 특수한 힘이 작용하는 듯하다는 점 정도다. 단지 내가 과거에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수수께끼 같은 장소의 지도에 그치지 않고 다가올 세계의 지세를 보여주는 도면으로 기능하는 것 같기도 했다―지도를 보면 볼수록 나는 그 안에 개인적으로 의탁된 무언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P503

어느 것이나 비교적 소소한 차이점이고 도시를 구성하는 큰 얼개에 연관된 것도 아니니 굳이 고칠 필요는 없을 테지만(게다가 내 기억이라는 것도 어디까지 맞을까?), 소년은 아주 작은 차이라도 잡아내어 정확하게 세부를 표현하는 걸 무엇보다 중시할 거라고 나는 예상했다. 또한 ‘어떠한 표현 행위에도 비평이 필요하다‘는 일반 원칙도 있다. 그에 더해 내게는 어떤 형태로든 소년과 접촉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쪽으로 서브된 공은 받아 쳐내야 한다. 그것이 규칙이다. - P503

"그런데 그애는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던가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서간집이에요." 소에다 씨는 곧바로 대답했다.
"재밌을 것 같네요."
소에다 씨는 그 말에는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눈썹을 살짝찡그렸을 뿐이다. 그녀는 말보다 표정이나 몸짓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다. - P505

기묘한 표현인지 몰라도, 고야스 씨는 생각해보면 내 주위에 살아 있는 어떤 사람보다 내게 생생한 생명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이 마을뿐 아니라 지금껏 내가 지내온 모든 장소를 통틀어. - P507

고야스 씨에게 운명은 결코 친절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그인생을ㅡ자신에게나 주위 사람에게나ㅡ유익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했다.
상당히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마음을 교류하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 P507

늘 그렇듯 오래된 재즈가 작게 흘러나왔다. 폴 데즈먼드가 알토색소폰을 연주했다. 그러고 보니 이 가게에 처음 왔을 때는 데이브 브루벡 쿼텟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 곡에서도 데즈먼드가 솔로를 연주했다.
"유 고 투 마이 헤드."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P508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도시에서는 음악을전혀 듣지 않았다고. 그런데도 허전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음악을 듣고 싶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음악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정도다. 어째서일까? - P509

요즘은 자기 생일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구글에서 검색하면 누구나 십초도 안 되어 간단히 알 수 있다. 소년은 그것을 단 일 초만에 알아맞힐 수 있다지만, 서부극의 결투도 아닌데 십 초와 일 초 사이에 얼마나 실리적인 차이가 있을까? 나는 소년을 위해, 그 사실을 조금 쓸쓸하게 여겼다. 이 세상은 날로 편리한, 그리고 비로맨틱한 장소가 되어간다. - P512

"좀 신경쓰이는데, 수요일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수심이가득하다는 얘기, 설마 정말로 그런 건 아니겠죠?"
"괜찮아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나는 말했다. 확실히 보장할 순 없지만, 아마도. - P513

입은 옷이 달라져도 행동 패턴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항상 앉는 열람실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그건 활짝 핀 꽃에서 한 방들도 남김없이 꿀을 빨아들이려는 나비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꽃에게나 나비에게나, 서로 유익한 행위다. 나비는 영양을 얻고 꽃은 교배에 도움을 받는다. 공존공영,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것이 독서라는 행위의 훌륭한 점 중 하나다. - P513

그렇다. 소년이 그린 도시 지도에는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자극하는ㅡ혹은 혼란스럽게 하는ㅡ특수한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A4용지에 검은색 볼펜으로 그린 단순한 지도만은 아니었다. 보는 이의 마음속(평소에는 안쪽에 잘 감춰져 있는)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기동력 같은 것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날은 봉투에서 지도를 꺼내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든 이쪽 세계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ㅡ아마 ‘현실 세계‘라고 불러야 할 곳에. 그럼에도 내 시선은 알게 모르게, 새어드는 바람에 한데 휘날리는 나뭇잎처럼, 책상 위에 놓인 그 커다란 서류봉투 쪽으로 향하고 말았다. - P514

이따금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서머리를 식혔다. 바다거북이나 고래가 호흡을 위해 주기적으로 수면에 얼굴을 내밀듯이. 그러나 이렇게 추운 겨울날ㅡ 게다가 방안도 전혀 따뜻하지 않은데ㅡ왜 바깥공기까지 맞으며 머리를 식혀야 하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나에겐 꼭 필요한 행위였다. 내가 지금 ‘이쪽 세계‘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 - P515

손을 뻗어 머핀을 집어들더니 그대로 크게 베어물었다. 포크도 쓰지 않았다. 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접시를 받치지도 않았다. 당연히 가루가 부슬부슬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소년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나중에 청소하면 그만이다. - P521

입가에 푸른 얼룩이 묻었지만 그것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나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렴 페인트가 묻은 것도 아니다. 그저 블루베리 과즙이다. 나중에 티슈로 닦으면 그만이다. - P521

어쨌거나 나는 전부 그대로 두었다. 이 소년 앞에서는 뭐든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블루베리 머핀에 흥미를 느끼고 직접 손으로 들고 먹어준 것만으로도, 나와 그의 관계에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P522

"머핀이 꽤 맛있지?" 나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입술에 묻은 블루베리를 혀로능숙하게 핥았을 뿐이다. 고양이들이 식후에 흔히 그러듯이. - P522

소년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몫의 빈 접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홀로 데크에 서서 해가 떨어진 뒤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고독한 선객처럼. - P523

지금 책상 위에 놓인 건 지도가 든 봉투뿐이었다. 마침 고야스 씨가 항상 남색 베레모를 내려놓던 자리다. - P523

"네가 그린 지도를 봤어." 내가 말했다. 그리고 봉투에서 지도를 꺼내 나란히 놓았다. "무척 정확하더구나. 거의 실물 그대로야. 감탄했어..... 아니, 솔직히 놀랐어. 내가 거의라고 한전, 정확한 진짜 형태는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그건 물론 네 탓이 아니지." - P524

"나는 말했다. "한때 그 도시에 살았어. 이 지도에 그려진 도시 말이야. 그곳에서도 역시 도서관에서 일했어. 하지만 그도서관에는 책이 한 권도 없었지. 단 한 권도. 과거에 도서관이었던 곳・・・・・・ 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몰라. 내게 주어진 일은, 책 대신 서고에 쌓인 ‘오래된 꿈‘을 매일 밤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것이었어. ‘오래된 꿈‘은 큰 달걀 같은 모양이야. 그리고 하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지. 크기는 대략 이 정도."
나는 양손으로 크기를 가늠해 보였다. 소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정보로서 수집했을 뿐이다. - P524

"얼마나 오래 그곳에서 살았는지는 나도 몰라. 계절이 바뀌긴 했지만 그곳에서 시간은 계절의 변화와 별개로 흘렀던 기분이 들어. 어쨌거나 그곳에서 시간은 전혀 의미가 없어. 아무튼 그곳에 사는 동안 나는 매일 그 도서관을 오가며 ‘오래된 꿈‘을 읽었어. 얼마나 많은 ‘오래된 꿈‘을 읽었는지 정확한 수를 기억하진 못해. 하지만 숫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야. 왜냐하면 오래된 꿈은 거의 무한히 있는 것 같았거든. 내가 일하는 시간은 해가 진 뒤였어. 해질녘에 시작해서 대개 자정이 못 되어 작업을 마쳤지. 정확한 시간은 몰라. 그 도시에는 시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 P525

소년은 반사적으로 자기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각이 표시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내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소년에게 시간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는 모양이었다. - P525

"‘꿈 읽는 이‘가 되려면 두 눈에 상처를 내야 했고, 도시에 들어갈 때 문지기가 그 처치를 해주었지." - P525

역병을 막기 위해 - P526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지?"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소년은 입을 다문 채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건 지금 여기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일 테다. - P526

"하지만 역병은 언젠가 끝났을 텐데." 나는 소년에게 말했다. "어떤 역병도 영원히 이어지진 않아. 그런데도 벽은 변할없이 엄중하게 폐쇄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 아무도 안에 들이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아. 그 이유는 뭘까?" - P527

"끝나지 않는 역병." 나는 소리 내어 읽었다. "그게 대체 뭐길래?"
역시 대답은 없다. 나는 스스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했다.
수수께끼 문답을 하는 기분이다. 심지어 매우 어려운 수수께끼다. 문제의 심오함에 비해 힌트가 턱없이 부족하다. 어쨌거나 서브된 공은 상대편 코트로 쳐내야 한다. 그것이 게임의 규칙이다. 만약 이걸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면. - P528

"혹시, 영혼이 앓는 역병 같은 것일까?"
소년이 다시 끄덕였다. 꾸벅, 하고 확실하게. - P528

소년은 말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예스도 노도 아니다. - P529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큰 소리는 아니다. 메마르고 간결한 소리ㅡ현실세계에서 들려오는 현실의 소리. 두 번, 조금 뜸을 들이고 다시 두 번.
"네." 나는 말했다. 내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로. - P529

그 도시에 가야 해요 - P530

"너는 그 도시에 가기를 원하는구나." 나는 확인하듯 말했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사람들에게 그림자가 없고, 도서관에는 한 권의 책도 없는 그 도시에."
소년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것처럼. - P531

"만약 그쪽에 가면 이쪽에는 있을 수 없게 되어도?"
소년이 다시 한번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소년이 문을 통과해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그곳은 아마 소년에게 ‘페퍼랜드‘일 것이다. 영화 <옐로 서브마린>에 나오는 컬러풀한 이상향, 페퍼랜드. 이 열여섯 살 소년은 자신을 받아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세계에서 계속 살아가기보다,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 세계로 이행하기를 원한다ㅡ마음속 깊은 곳에서, 더없이 진지하게. 소년과 마주앉아 있자니 얼마나 진지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 P531

"‘오래된 꿈‘을 읽을 거예요. 저는 그럴 수 있어요."
소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너는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소년의 말을 자동적으로 되풀이했다.
"그곳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을 거예요. 언제까지나." - P532

그렇다. 이 소년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 도서관에서 매일 행하는 일과와 거의 똑같은 생활이니까. 그리고 그곳에는 그 도서관 안쪽에는 그가 읽어야 할 ‘오래된 꿈‘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높게 쌓여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마도 무한히. 또한 그 제각각의 모든 꿈은 세계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도시에 가야 해요." 소년은 아까보다 한결 또렷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 P532

그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페퍼랜드가아니다. 페퍼랜드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이상향이다. 그곳에서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생활을 한다. 즐거운 음악이 흐르고 컬러한 꽃이 만발했다. 1960년대 드러그 컬처의 냄새가 어렴풋이 감도는 한때의 몽상 속 세계다. 그러나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그렇지 않다. - P533

그곳에서는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짐승들이연이어 목숨을 잃는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가난하고 과묵하게살아간다. 간소하고 적은 식사에 만족하며, 의복은 낡고 해질때까지 입는다. 책도 없고 음악도 없다. 운하는 말라붙었고,
많은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사는 공동주택은 어두컴컴하고 다 쓰러져간다. 개도 고양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눈에 띄는 생물이라면 벽 위를 넘나들 수 있는 새 정도다. 이상향과는 한참 거리가 먼 세계다. 소년은 그 도시의 현실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을까? - P534

나는 그 얘기를 소년에게 자세히 해줄까 하다가 생각을 고쳤다. 아마 그런 사정도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모두를 감수하더라도 그 도시에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면밀히 고심한 끝에 내린, 변경의 여지가 없는 결론이다. 소년의 망설임 없는 얼굴을 보니 그 결의가 얼마나 굳은지 알 수 있었다. - P534

"그 도시에 들어가려면 그림자를 버리고 두 눈에 상처를 내야 해. 그 두 가지가 문을 통과하기 위한 조건이야. 떨어져 나간 그림자는 머지않아 목숨을 잃을 테고, 그림자가 죽으면 넌 다시는 그 도시에서 나올 수 없어. 그래도 상관없니?"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세계의 누구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상관없어요." 소년은 소리 내어 말했다. - P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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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샤드 나폴리탄 다크 72 초콜릿 - 132g

평점 :
절판


이번에 먹어본 다크 초콜릿은 지난번에 먹어본 카라멜&씨솔트에 비해 달달함은 확실히 덜하지만 너무 달달한 초콜릿보다는 좀 담백한(?) 맛을 원하시는 분들이 좋아할만한 초콜릿이다. 오히려 건강적인 측면을 생각한다면 이 초콜릿이 더 바람직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무난한 초콜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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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2023-12-23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콜릿이지만 너무 달기만 하면 전 별로더라구요 ㅋㅋ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2-23 09:41   좋아요 1 | URL
아 그러시면 아마도 이 초콜릿이 홍합님 취향에 딱 맞으실듯 합니다!
 

암호같이 되어있는 문구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전혀 반대의 성향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서 협력하는 가운데 한 글자 한 글자의 의미가 풀려나가는데, 이런 것들의 특징이 다들 그렇듯 알고나면 별 것도 아닌데, 알기 전에는 뭐가 뭔지 몰라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각해보고 추정해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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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은하수와 성진, 소희 부부 이렇게 세 사람의 대화가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역사 이야기에 대한 어떤 관점의 차이(?)같은 것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역사학자들을 추가로 더 만나본 은하수는 역사학계의 완고한 태도에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은하수는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생각에 조금씩 색을 입혀나갔다. 흩어져 있는 정보를 취합해 하나의 가설을 세운 뒤 논리를 발전시켜 답을 찾아내는 끈기가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은하수는 스스로 변했다고 느꼈다.
그 변화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형연.
그와 만나고서부터 그녀는 계속 변화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옳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회신령의 키워드는 역사, 역사의 은어인 셈이지."

"하지만 이건 은어야. 대놓고 저주를 내릴 장소가 어디인지 드러난다면 바로 발각될 테니까 이 은어 안에 실체를 숨긴거지."

"그래. 대단한 게 아니었어. 나이파이한필베마냥 주문처럼 보이게 만들어진 말이지. 우리는 다이이치가 주는 무게감에 너무 어렵게만 생각해서 멀리 돌아왔어."
"회와 신."

알고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만큼 간단한 일에 영 닿지 못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더 말해 볼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도서관으로 뛰어가서 회와 선으로 시작하는 지명들을 검색했어. 당장 가까운 회기동 신설동부터 시작해서 회현동, 회현리, 회령군, 신철원, 신포, 신의주 등 회와 신으로 시작하는 남북한의 모든 지명을 다 찾아냈어."

"모든 지명의 짝을 지어 회신이라는 합성어를 계속 만들어 보던 중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 좀 전에 얘기했었지. 다이이치의 명을 받은 이케다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면 반드시 고려와 조선의 국경선에다 무슨 짓이든 했을거라고."

수백 개의 빨간색 가위표 사이에 파란 동그라미 두개.
"회양군과 신고산면."
회양은 함경남도 안변과 맞붙은 강원도 최북단의 지역이고 신고산은 고산의 신시가지로 철도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지명이었다.

"그래. 그 두 곳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바로 험한 고개가 하나 나오더라."
"철령."

"회신령집만축고선淮新嶺摯萬縮高鮮, 철령집 만축고선."
"형연아?"
"철령에 매어놓아라 고려와조선이 영원히 줄어들도록."

"철령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나오는 그 철령위? 교과서에서 본 거 같은데."

정해져 있는 코스를 따라가는 일과 아무 단서도 없는 백지에 토대를 쌓아 나가는 일에 소모되는 정신력의 차이는 차원이 달랐다.

"철령은 어디지?"
"함경남도, 강원도 사이 야, 너!"

"네 장점은 논리야. 합리에 어긋나는 건 받아들이지않지. 그런 네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있는지 잘 생각해봐. 왜 평소처럼 그 뛰어난 머리로 생각하지 않는 거지?"

"은하수. 이케다와 조선사편수회를기억해. 다이이치가 저주를 내려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을 생각해."

"그래 철령은 뒤바뀐거야. 두 개의 같은 지명이 있었고 북서쪽의 철령은 동남쪽의 철령으로 둔갑해버렸지. 바로 다이이치와 조선사편수회에 의해서."

회신령집만축고선淮新嶺繁萬縮高鮮. 고려와 조선의 국경을 철령에 잡아매어 영토를 줄여라, 요통의 철령을 강원도의 철령으로 잡아매어 역사로 가르쳐라!

"당시 우리나라 학자들은 일제강점기였으니만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아니 오히려 일본인 학자 밑에서 그들의 연구를 도왔어. 따르지 않으면 파멸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해방 이후 그들이 우리 역사학계의 거목이 된거야."

"그게 80년 넘게 이어져 고려의 국경선이 의주에서부터 원산까지로 그려져 있는 이유야."

어두운 곳에 숨어서 고려의 국경을 잘라내 버리는 자들과 그들의 음모를 그대로 가르치는 처참한 현실이 가슴에 사무쳤다.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보다 수백 배는 갑갑한 현실이 다가와 있었다.

"왜 지금까지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 역사학자들은 뭐하고 있는 거야? 다이이치의 저주를 몰랐다고 해도 철령위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잖아."

"누가 80년이나 가르쳐 내려오는 교과서를 의심할수 있겠어. 게다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학자들을 따르던 사람들이 학계의 거두가 되었으니."

예전같으면 공허한 정의로 치부하고 넘겼을 일들이 이제는 반드시 맞서야만 할 과제로 다가와 있었다.

스스로를 깊숙이 돌아보면 반드시 역사를 마주치게 돼.
그러나 마주칠때마다 보이는건 중국과 일본에 의해 형편없이 구부러지고 축소된 모습이지. 싫을 수밖에 없어 외면하고 싶은게 당연해.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다 정신 나간 사람들입니다. 정공법으로 나가려니까 증명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흥미나 끌려는 잡배들이에요."

"출처는 자기들끼리 다 돌려쓰고 유튜브에 얼굴이나 비춰 인기몰이하는 사기꾼들이죠. 인용도 자기들끼리 해요. 누가 그랬다더라, 어디서 봤다더라, 다 인터넷에만 떠도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역사는 전문가에게 얘기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그럴듯 하게 말한다고 진짜 역사가 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덜 여문 사람들 상대하지 않아요. 무시하고 말죠. 그런 거 하나하나 들어주다 보면 정말 한도 끝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일제강점기로 인해 우리역사가 많이 왜곡된 건 사실이잖아? 그걸 바로잡겠다는 은하수의 말이 나는 좋게 들리는데?"

몇 명의 역사학자들을 더 만난 은하수는 오히려 성진이 말이 통하는 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친절하게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던 학자들은 몇 마디 듣기도 전에 대다수가 불쾌한 표정으로 변해 입을 닫아버렸고 어느 노학자는 모욕적이라며 대화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일조차 있었다.

그제야 은하수는 학자들을 설득하여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기대였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퍼즐의 수많은 조각 중 그들이 허용하고 원하는 조각만 선별해 맞추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필요로 하지않는 조각은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저도 이번에 많이 느꼈습니다. 세상엔 다양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단지 머리에 든 게 많다거나 말주변이 좋다고 대단한 게 아니더군. 말로 내뱉은 걸 지킬 수 있는 진짜 힘이 있어야 해."

"혹자는 그깟 기록과 역사가 무엇이 중요하냐 하겠지만 우리의 오늘은 내일의 역사이기도 해요. 결코 좌시해서는 안될 문제지."

"학계에도 자꾸만 새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그들의 무거움 또한 존중해요. 신념을 위해서 때때로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학자니까."

돈을 무한히 찍어낼 수 있다면 세상에 그 무엇이 문제가 될까.

"너는 왜 도를 닦느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깨달음이란 아무것도 아니야. 밥만 안먹으면 다다를 수 있어."

"나는 번쩍하는 순간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부처? 그건 같잖은 착각이었어. 나는 부처는커녕 그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야. 왜 못 따라가는지 아나?"

"부처는 부처의 시대에 도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처야. 만약 부처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어도 황야에서 수십일 굶고 부처가 되었을까? 절대 안 돼."

"워낙 난 양반이니 뭐 다른 길을 찾아도 찾았겠지. 지금 세상에 다 비우고 다 버리고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이놈아, 밥이나 처먹고 똥이나 싸면서 살아. 그러다가 심심하면 남이나 돕든지."

"부처나 예수나 결국 남을 위해 살라는 거잖아. 뭘 깨치려 들고 그래. 그러니까 설익은 놈들이 헛짓거리나 해대고 그러는 거야. 다 헛것이야. 나쁜 일 안하고 남 돕고 같이 잘 사는게 열반이야."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제 자리를 찾아갈 터인데 뭘 자꾸 하려고 하고 그래?"

"그건 진혼이야.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잊었는가. 그나마 죄를 씻는 중인데 그걸 막으면 원한만 쌓일 뿐이지."

"기운은 왔다 갔다 하는 것이네. 사람이 잡아맬 것이 아니라는 말이야."

말 타고 지나는 십여리 길에 병풍을 온통 깔아놓고 그 내용을 외지 못하면 세상에 허명을 떨친 죄로 죽이겠다 했으나 병풍에 눈길조차 준 적없었던 사명당이 막힘없이 글을 모두 외었던 일화,

백 사람이 먹을 음식을 내어놓고 모두 먹지 못하면 성의를 무시한 죄로 죽이려 했으나 사명당은 맛있게 그음식을 모두 비웠다는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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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22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운 날 감기 조심하시고요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 드립니다 ㅎㅎ 좋은 오후 보내세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2-22 15:20   좋아요 1 | URL
서곡님 고맙습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는데 건강 관리 잘하시고 얼마남지 않은 23년 한 해 마무리도 잘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몇일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도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크리스마스 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