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읽은 마지막 부분에 이어서 오늘 읽은 초반부에서는 ‘나‘가 도서관 직원에게 ‘그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그 소년‘의 가정형편이 어떻고 부모님이나 형제들과의 관계는 어떤지 같은 것들이다.

‘나‘는 얘기를 듣고 난 뒤 ‘그 소년‘의 심정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에 어떤 확고한 기준 같은 것이 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될 듯 하다. 여기서 일일이 말하기엔 말이 너무 길어지기도 할 뿐더러 자칫 ‘스포‘가 될 수도 있기에 이정도로만 한다. 다만 독자인 내가 여기 밑줄 그은 것만 읽어봐도 대략적인 유추는 가능할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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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나‘가 고야스 씨의 무덤에 다녀오는 일을 마치고 습관적으로 들르는 카페가 있다. 앞에서도 이 카페와 관련된 간단한 이야기들이 잠깐잠깐씩 나왔었는데 그 때는 이야기의 포커스가 위에서 말한 ‘소년‘에게 가 있었다면, 이제는 카페를 운영하는 ‘한 여자‘ 에게로 포커스가 옮겨지는 듯 하다. 갑자기 ‘나‘와 이 ‘여자‘의 관계가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한 층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뒷 내용을 아직 몰라서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갈진 모르겠지만, 독자인 나의 촉(?)으로 봤을 땐 뭔가 이야기 상 그냥 스쳐지나가는 인물일 것 같지는 않은 느낌이다.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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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연결고리(?)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소년은 이 현실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의미로는 뿌리내리지 않은 것이다. 임시로 매어둔 기구같은 존재. 지상에서 살짝 떠오른 상태로 살고 있다. 그리고 주위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그러니 매어둔 고리를 풀고 이 세계를 영원히 떠나버리는 일에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 P535

나는 무심결에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 지상 어딘가에단단히 이어져 있을까? 그곳에 뿌리내리고 있을까? 나는 블루베리 머핀을 생각했다. 역 앞 커피숍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폴 데즈먼드의 알토색소폰 음색을 생각했다. 꼬리를 세우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야위고 고독한 암고양이를 생각했다. 그것들은 내 정신을 이 세계에 조금이라도 붙들어매주고 있을까? 아니면 너무도 하찮아서 논할 가치도 없는 존재들인 걸까? - P535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 도시로 갈 생각이니?"
소년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이어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그 손가락을 허공으로 향했다.
나는 그 제스처를 나의 언어로 치환했다. "내가 너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그 뜻이야?"
‘제러미 힐러리 붑 박사‘가 프린트된 파카를 입은 소년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예스. - P536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나도 내 의지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그 도시에 갈 수 있는 건 아냐. 하물며 너를 그곳까지 안내하는 건 도저히 자신이 없어. 나는 에떤 우연으로, 어쩌다가 그곳에 다다랐을 뿐이야." - P536

내가 그 문을 통과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다. 이미 그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으니까. 소년을 배웅하고, 문이 다시 닫히는 걸 지켜본 뒤, 나는 혼자 이쪽 세계로 돌아올 것이다. - P537

소에다 씨에게 소년이 지금 읽는 책의 제목을 물으면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소년이 빠져 있는 책은 『아이슬란드 사가saga』『비트겐슈타인, 언어를 말하다』 『이즈미 교카 전집』 『가정의학백과』 등이었다.
하나같이 꽤 두꺼운 책이다. 보아하니 내용을 따지기보다 무건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얇은 책은 성에 차지 않는 것이리라. 식욕이 왕성한 사람이 식당에서 가장 두툼한 스테이크를 주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 P538

우리는ㅡ소년과 나는ㅡ이 지상의 현실세계에서 각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 P538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로 가기그곳의 주민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이쪽 세계에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이쪽 세계에 그를 붙잡아둘 만한 힘을 지닌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분명하다. 그러나 소년의 힘만으로는 그 도시에 갈 수 없다. 나의 ‘안내‘를 필요로 한다. 그 도시로 통하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은ㅡ혹은 한 번이라도 그 길을 밟아본 사람은ㅡ나 하나 뿐이니까. - P539

하지만 나 역시 그 도시로 향하는 길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진 못한다. 예전에 간 적이 있을 뿐이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무의식중에 그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같은 식으로 다시 가보라고 한들 방법을 모른다.
그리고 또하나, 내가 판단하기 힘든 것이 있다. 소년을 저쪽세계로 데려가는 일이 과연 올바른 행위인가 하는 문제다. 그건 도덕적으로 용인되는 일인가? 만약 소년이 그 도시에 들어가 ‘꿈 읽는 이‘로 정착한다면, 그 결과 아마 이 현실세계에서는 그의 존재가 소멸할 것이다. - P539

나는 그림자가 죽지 않았기에, 그리고 그림자를 벽 바깥으로 도망시켰기에 이쪽 세계로 복귀할 수 있었고(좀더 정확히 말하면 돌려보내졌고), 결과적으로 이 세계에서 존재가 지워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다. - P539

그러나 만약 소년이 자신의 그림자와 떨어지고 그 그림자가목숨을 잃는다면, 소년의 존재는 이쪽 세계에서 영원히 결정적으로 상실된다. - P539

아무리 소년 스스로가 진지하게 원한다 해도 또한 그것이 소년의 인생에서 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인다 해도, 그건 인간으로서 도의에 반하는 행위가 아닐까? - P540

"M**이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지 저는 물론 알 길이 없어요. 감정을 겉으로 거의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맞아요. 집이 결코 편하지 않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아버지, 지나치게 간섭하는 어머니. 어느 쪽도 그애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도 없는 듯하죠." - P543

소에다 씨의 얘기를 듣고 소년의 가정 사정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되어서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해졌다.
그 소년에게는 집을 떠나기를, 이 세계에서 나가기를 간절히 원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리면 어머니는 틀림없이 비탄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소년을 위해서는 어머니와 떨어지는 편이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새끼고양이들이 어느 시점에 어미에게서 떨어져 자립하는 것처럼, 새끼를 잃은 어미고양이는 한동안 주위를 필사적으로 찾아다니지만 이윽고 단념하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다음 사이클로 들어간다. 동물들에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계절이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 P544

또한 소년에게는 친구라고 할 만한 상대가 한 명도 없다. 이 세계에서 어디까지나 고립된 존재다. 사라진다 해도 그 공백은 순식간에 메워질 것이다. 소리도 없이, 눈에 띄는 파문도 일으키지 않고, 매우 조용히. - P545

가령 내가 그 소년의 입장이라면ㅡ소에다 씨가 말했다시피그에 입장에서 감정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지만ㅡ역시 이 마을에 머무르기보다 다른 세계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싶다고생각할 것이다.
이를테면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 P545

아마 고야스 씨의 영혼은 이미 이 세계를 벗어났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 대화한 지 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 역시 이 지상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 두 사람이 실제로(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나는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건 분명 무미건조한 세계일 것이다. 나는 그 두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호감과 공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 P548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어요. 봐요, 지난번에 그 남자애도 말했잖아요, 수요일에 태어난 아이는 수심이 가득하다고."
"그애가 말한 게 아니에요. 제가 그랬죠. 그런 동요 가사가 있다고. 그애는 ‘당신은 수요일에 태어났다‘고만 했고요."
"그랬던가."
그애는 기본적으로 사실만 말해요."
"사실만 말한다." 그녀는 감탄한 듯 되풀이했다. "대단한 걸요." - P551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무언가가 나를 붙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가게로 돌아가, 카운터 안쪽에서 커피를 내리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P552

나는 가게를 나와 집까지 걸었다. 걸으면서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을 하나하나 떠올려보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그녀에게 식사를 권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거의 자동적으로 내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여자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한건 생각해보면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대체 무엇이 나를 그러도록 만들었을까? 혹시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 P553

설령 그렇다 해도 그녀의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지는 알 수 없다. 전부터 막연한 호감은 있었지만 딱히 무언가를 보다ㅡ친밀한 유대 같은 것을ㅡ원하는 유의 호감은 아니었다. 매주 월요일 오전, 내게 커피와 머핀을 내주는 인상 좋은 삼십대중반의 여자, 그게 다였다. 체격이 늘씬하고, 혼자서 기민하게 움직인다. 미소에는 자연스러운 따뜻함이 담겨 있다. - P553

그날 그녀의 어딘가에 특별히 마음이 끌려서 식사를 권하게된 것이리라. 그녀와 나눈 짧은 대화 속의 무언가가 내 마음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저 내가 혼자 지내는 것에  지쳐서, 하룻저녁 기분좋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았을 뿐인지도. 하지만 아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직감이 그렇게 알렸다. - P553

어쨌거나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반쯤무의식적으로,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식사를 권했고, 그녀는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면 많은 일이 그렇듯 당사자의 의도나 계획과 무관하게, 자연스럽고 멋대로 나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좀더 생각해보면 지금 내게는 의도나 계획 따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 P554

"안토니오 비발디는 1678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생전에 육백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작곡가로도 인기를 누렸고 명바이올리니스트로 화려하게 활약했지만, 그후 오랜 세월 전혀 회고되지 않아 잊힌 과거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에 재평가의 기회가 왔고, 특히 협주곡집  <사계>의 악보가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면서, 사후 이백 년이 넘어서야 단번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이백 년 넘게 잊힌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백 년은 긴 세월이다. ‘전혀 회고되지 않고 잊힌‘ 이백년. 이백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 아니, 이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 P555

하지만 전부 내 멋대로 해본 추측일 뿐이다. 소년의 뇌속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그 자신밖에 모르는 일이다. - P556

그럼에도 나는 눈을 감고서 고독한 소년의 내부에 세워진 지의 기둥 (이라고 해야 할 것)의 모습을 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땅속 저 아래 솟구친 거대한 종유동의 기둥 같은 것이리라. 사람이 아직 발을 들인 적 없는 칠흑의 암흑 속에,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고 당당히 기립해 있다. 그 어둠 속에서 이백 년은 하찮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 P556

어쩌면 그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들어감으로써 그 ‘지의기둥‘을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지의 적절한 아웃풋 통로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 P556

옐로 서브마린 소년……… 그 자신이 그대로 하나의 자립한 도서관이 될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궁극의 개인 도서관. - P557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말을 했다. "혹시 싫지 않다면, 우리집에 가지 않겠어요? 간단한 요리는 바로 해줄  수 있는데." - P559

"난 이 년 전쯤에 이혼했어요." 그녀는 노면이 얼마나 열어붙었는지 확인하듯 조심스레 발밑을 살피면서 말했다. "그 과정에서 좀 시달리느라 한동안 기분이 우울했죠. 아무런 의욕도 안 생기고. 그래서 어디든 좋으니 삿포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보자 싶었어요.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라도 좋았고." - P561

"여기 온 뒤로 이렇게 개인적인 얘기를 하는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아무한테도."
"깊은 구덩이를 파고, 밑바닥을 향해 죄다 털어놓은 적은?"
"없어요. 당신은?"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있을지도." - P562

서로의 처지가 조금은 비슷하다는 데서 친밀감 가까운 감정이 싹텄는지도 모른다. 도호쿠 지방의 작은 산속 마을에 바람에 실려오듯 다다른 홀몸의 외지인들이다. 원래 알던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앞으로 이곳에 뿌리를 내릴지 어떨지. 그것도 확실치 않다. - P562

누군가와 식사 자리를 함께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마지막으로 다른 사람과 같이 식사한 게 언제였을까?). 그리고 제법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짝을 맞춘 식기를 테이블에 내놓고, 편한 대화를 나누면서 저녁을 먹는 것. 우리는 음식을 조금씩 입으로 가져가고 와인잔을 기울이면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었으므로 그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다. - P564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작게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무튼 언제 어디선가 중요한 무언가가 망가져버린 것처럼, 뭘해도 미묘하게 엇갈렸어요. 대화가 자꾸 어긋나고, 이런저런 취향이나 사고방식의 차이가 점점 드러났고, 그리고 섹스도.... 음, 대충 뭔지 알겠죠?" - P566

"결국엔 그 사람이 회사 동료와 외도 비슷한 걸 했고, 그걸 나한테 들킨 게 이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어요. 뭘 숨기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랬군요." 나는 말했다.
"그래도 그 여자와 그렇게 깊은 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얼결에 그랬다고 할까,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할까. 그 사람도 반성하고 진지하게 사과했죠.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뭐, 흔한 얘기예요.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죠." - P566

"제일 힘들었던 건 그 사람과의 이혼 자체보다. 내 마음에 확신을 품을 수 없게 됐다는 거였어요." 그녀는 손에 든 와인잔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앞으로 어떤 남자를 알아도, 그리고 결혼 같은 걸 해도 상대방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예전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 P567

"혹시 고등학교 동창회 나가본 적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동창회는 한 번도 나간 적 없는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옛날 일을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꼭 그런 건 아니고, 우리 학교, 우리 반이라는 것에 솔직히 큰 소속감을 못 느꼈어요. 같은 반이었던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 P568

"같은 반에 좋아하던 애 없었어요? 멋지다고 생각했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었지 싶어요."
"옛날부터 고독을 좋아했나?"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아마 어디에도." 나는 말했다. "다들 무언가를, 누군가를 원해요. 원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러게. 그럴지도 몰라요." - P568

"추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문제니까."
"더 추운 밤도 있었어요?" 그녀가 물었다.
"더 추운 곳도 있었어요." - P569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강변길을 걸었다. 그녀의 부츠 급이 군데군데 얼어붙은 지면을 밟으며 까드득까드득 딱딱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도서관의 소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던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물소리가 들리고, 이따금 밤꾀꼬리가 지저귀고, 냇버들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가 걸친 오래된 레인코트는 바스락바스락 메마른 소리를 냈다.
내 안에서 시간이 뒤섞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끄트머리가 미묘하게 포개지고 있다. 만조 때 하구에 바닷물과 강물이 사방으로 섞여드는 것처럼. - P569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추위를 환영했다. 그게 내 안에 있는 혼란을 조금쯤 잠재워주었다. - P570

"그래도 궁금해요.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당신이 완성됐는지, 그걸 알고 싶은데."
"그렇게 흥미로운 과정은 아니에요.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서 평범한 일을 하며 혼자 조용히 살았지. 흔하디흔한 인생이에요."
"하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도저히 흔하디흔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녀가 말했다. "결혼 생각은 해본 적 있어요?"
"몇 번." 내가 말했다. "나도 평범한 인간이니까. 남들처럼 생각해본 적도 있죠. 그런데 그런 가능성이 생길 때마다 이상하게 잘 풀리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또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는 게 귀찮아졌고."
"사랑하는 게?"
그 말에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은 백지의 입김이라는 형태를 띠고 허공에 떠 있었다. - P570

"또 만나자고 해도 될까요?" 나는 출입문 안쪽에 서서 그녀 에게 물었다. 그 말 역시 거의 무의식중에 자연히 입에서 튀어 나왔다. 마치 숙련된 복화술사가 어딘가에서 내 입을 멋대로 움직여 말을 시키는 것처럼. - P572

"가게는 무슨 요일에 쉬죠?"
"매주 수요일이 휴일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다른 날은 아침 열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열고, 도서관은요?"
"매주 월요일이 휴관일. 다른 날은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예섯시까지 개관하고."
"아무래도 우린 해가 진 뒤에 만나는 수밖에 없겠네요."
"두 마리 부엉이처럼."
"어두운 숲속 깊은 곳, 두 마리 부엉이처럼." 그녀가 말했다.
"정기휴일을 월요일로 바꾸면 어때요. 당신이 주인이니 무슨 요일에 가게를 닫건 당신 자유니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렇네요. 조금 생각해봐야겠어요." - P572

죽은 자의 영혼에 어느정도 능력이 있는지, 살아 있는 나는 짐작할 수 없다. - P576

추운 밤 붉게 빛나는 불에는 유전자에 깊이 새겨진 집합적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었다. - P576

뭐가 어찌됐건 그녀의 모습이 내 마음 한구석(그러나 시선이 틀림없이 닿는 장소)에 머무른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내게 떠올리게 하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모습은 다른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그녀 자신, 독자적인 존재로 내 안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 P578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가?
대답은 아마 노일 것이다. 내 생각에, 나는 그 커피숍 여자를 사랑하진 않는다. 자연스러운 호감을 느끼지만 사랑과는 다르다. 사랑을 하기 위한 내 심신의 기능은 상대에게 나 자신을 고스란히 내주고 싶다는 종합적 충동 같은 것은 아주오래전에 다 타버린 듯하다. 언젠가 고야스 씨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인생의 아주 이른 단계에서 최고의 상대를 만났던겁니다. 만나버렸다, 라고 해야 할까요." - P579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거친 몇 번의쓰라린 경험이 명료하게 알려주었다. 주입시켰다, 고 해야 할까. 그렇다, 나는 몸으로 그 사실을 배웠다………… 적지 않은 수업료를 내고. 가능하다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본의 아니게 남에게 상처를 주고, 그 결과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는 경험은. - P579

과거의 성욕과 현재의 성욕을 정확히 가려낼 수 없었다.
그 두 가지가 내 안에서 맞닿아 하나로 뒤엉켰다. 그것이 나를 적지 않은 혼란에 빠트렸다.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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