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배경이 어느덧 요즘 날씨와 같은 추운 겨울로 접어든다. ‘나‘가 도서관 관장으로 일하는 집무실이 추위를 견디기에 부족한 곳이라 전임 관장에게 도움을 받아 미지의 한 장소를 소개받게 되는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다. 예전에 ‘나‘가 있었던 ‘그 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있었다. 주인공인 ‘나‘는 잠시 회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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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곁길로 나와서, 위의 내용과는 약간 결이 다른 얘기긴 한데, ‘나‘가 현실에서 도서관 관장업무를 하는 것과 관련된 실무적인 내용들이 간간이 나와서 도서관에서 어떤 업무를 하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어서 좋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서관에 주로 책을 빌리는 이용자 입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갈 때마다 마주치게 되는 실무 직원들이나 직급이 좀 더 높은 관리자 분들은 어떤식으로 일을 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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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야기가 쭉 이어지는데 위에서 말했던 매개체(난로) 외에도 마치 ‘데자부‘ 같이 예전에 ‘그 도시‘ 에서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장면이나 물건들이 하나 둘씩 등장한다. 또한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도 ‘그 도시‘에 있었던 인물들과 지금 ‘나‘가 있는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이 묘하게 대칭적으로 들어맞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 일일이 그 구조를 써보는건 자칫 ‘스포일러‘ 가 될 수 있기에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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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쭉 읽다가 p.341에 고야스 씨가 큰맘먹고 털어놓은 말을 읽는 순간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야기의 맥락을 아예 모르면 이게 뭐 온 몸에 전율까지 일어날 일인가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마 내 말에 어느정도 공감하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래 나는 책 읽는 집중력이 그닥 좋은 편이 아니라 한 번에 수많은 텍스트를 쉬지 않고 읽는 것을 힘겨워하는 사람인데, 내 몸에 전율을 일으키기 시작한 이 부분부터 대략 30 page 정도를 한 숨도 쉬지 않고 완전히 이야기에 몰입해서 읽어나갔다. 이런 표현이 어떨진 모르겠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동안 무뎌져서 그 자리에 계속 잠자코 머물러 있던 내 뇌세포들을 정말 수도 없이 깨워내고 또 깨워냈던 것 같다. 독자마다 감상의 정도에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 수야 있겠지만, 지금까지 읽은 부분 중에서는 가장 임팩트 있게 느껴졌던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이런 맛에 이런 소설을 읽는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아, 이래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유명하기도 하고 베스트 셀러 작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썼던 페이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책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다는 개인적인 고백을 한 적이 있는데, 오늘 읽은 부분의 임팩트가 너무나도 강력하게 느껴져서 앞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쓴 작품들을 의식적으로 찾아읽어 볼 지도 모르겠다.

얼마전에 이 책과 관련한 다른 독자들의 리뷰를 잠깐 봤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스토리나 어떤 특징 같은 것들이 그간 출간되어 온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오버랩되는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이 얘기를 듣다보니 자연스레 무라카미 하루키가 출간해왔던 그간의 작품들에도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호기심이 마구마구 샘솟아 흘러넘칠듯 하다.

그 의문은 전부 가슴속에 담아두고 소에다 씨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왠지 몰라도 이 자리에서는 그런 질문을 하지않는 게 좋겠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 P316

네 개의 말없는 벽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 P317

나는 그 형용할 수 없는 풍미를 그리워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 쓴맛을 다시 느끼고 싶다고.
그래도 침묵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난로와, 해질녘을 생각나게 하는 어둑한 방과, 이따금 달가닥 소리를 내는 오래된 주전자가 어느 때보다 그 도시를 가깝게 불러들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잃어버린 도시의 환상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다. - P318

그리고 되도록 그 도시와 그 도서관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건 위험하다. 순식간에 깊은 환상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만다. 퍼뜩 정신이 들면 책상 위에 팔꿈치를 짚고서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손에 쥐고 있던 연필은 어느새 사라졌다) 사고의 미로를 정처없이 헤매고 있다. 왜 나는 여기 있을까, 왜 나는 저쪽에 없는 것일까・・・・・・ 그렇게. - P319

이곳에서 나는 도서관장으로서 사회적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팽개치고 개인적인 환상의 세계에 몰입해 있을 순 없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어느새,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로 나도 모르게 돌아가 있었다. 단각수들이 발굽 소리를 내며 도로를 걷고, 하얀 민지가 앉은 오래된 꿈이 선반에 쌓여 있고, 냇버들의 가느다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바늘 없는 시계탑이 광장을 내려다보는 세계로. 물론 이동하는 건 나의 마음뿐이다. 혹은 의식뿐이다. 실제 나의 육체는 늘 이쪽 세계에 남아 있다ㅡ아마도. - P320

"사과나무 향이 아주 근사하죠? 네, 희한하게도, 향긋하지요." 나는 그 말에도 동의했다. 장작에 불을 붙이면 이윽고 방안에 어렴풋한 사과 향이 감돈다. 그러나 그건 기분좋은 동시에 내게는 다소 위험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 향기가 나를 알게 모르게 깊은 몽상의 세계로 이끄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어떤 틀을 벗어난 세계로 끌고 들어가는 기척이 있었다. - P322

그러고 보니 그 도시의 문 바깥에 사과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지, 나는 생각했다. 문지기가 사과를 따서 도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문밖으로 나가는 일이 허락된 자는 문지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도서관의 소녀는 그 사과로 과자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아직도 그 맛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적당히 달고 찌르듯이 새콤한, 깊은 자연의 맛이 서서히 몸에 스며들었다. - P322

이 작은 정사각형 반지하 방에서 이렇게 고야스 씨와 단둘이 있는 것이 나는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에 바늘이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 P323

처음에는 내 눈이 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일시적으로 그림자가 져서 바늘이 보이지 않은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티내지 않으며 눈을 비비고서 다시 보았지만, 그가 왼손에 차고 있는 오래된 손목시계ㅡ아마 수동식일 것이다—의 문자반에는 바늘이 없었다. 시를 가리키는 짧은 바늘도, 분을 가리키는 긴 바늘도, 초를 가리키는 가는 바늘도, 그 외 다른 어떤 종류의 바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숫자를 새겨넣은 문자반이 있을 뿐이다. - P324

하마터면 고야스 씨에게 물어볼 뻔했다. 왜 당신 손목시계에는 바늘이 없습니까, 라고. 그러면 고야스 씨는 그 이유나사정을 선선히 설명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그렇게 물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가 나에게 그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알리고 있었다. 나는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몇 번 더 넌지시 그 왼 손목에 눈길을 주었을 뿐이다. - P324

혹시 몰라 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에 총체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건 아닌지 불현듯 걱정스러워져서. 하지만 내 왼손목 위 시계 문자반에는 여느 때처럼 모든 바이 달려 있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시각은 오후 두시 삼십육분사십오초였다. 이내 사십육초가 되고, 사십칠초가 되었다.
시간은 이 세계에 아직 무사히 존재했고, 쉼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적어도 시계만 봐서는ㅡ그렇다는 말이지만. - P325

그 시계탑과 똑같다. 나는 생각했다.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의 강가 광장에 서 있던 시계탑과 똑같다. 문자반은 있지만 바늘은 없다. - P325

시공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며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와 무언가가 뒤섞인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경계의 일부가무너지고, 혹은 모호해지고, 현실이 여기저기서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 혼란이 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초래한 것인지 아니면 고야스 씨가 초래한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혼돈 속에서도 어떻게든 침착함을 되찾고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해야 할 말을 잃었고, 대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 P325

문득 고야스 씨가 무언가를 떠올린 것 같았다. 아니편 갑자기 기억해냈는지도 모른다. 눈동자가 확 밝아지고 길게 뻗은 눈썹이 딱 한 번 꿈틀거렸다. 그리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제부터 할 발언의 예행연습을 하는 것처럼, 작은 입술이 움직에 몇 마디 소리 없는 말을 했다. 어렴풋이, 그러나 뚜렷한 의사를 지니고. 그렇다, 그는 나를 향해 무언가를 알리려 했다ㅡ아마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내용을. 나는 책상 맞은 편에서 그 말을 기다렸다. - P326

그런데 마침 그때 난로 안에서 장작이 허물어지며 와르르 소리를 냈다. 동시에 그에 호응하듯 난로 위 검은색 주전자가 하얀 김을 세차게 피워올렸다. 고야스 씨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쪽을 보고(평소 같지 않게 재빨랐다), 날카로운 눈길로 불꽃의 상태를 살펴 이변이 없음을 확인한 후 다시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P326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가 하려던 말이ㅡ그게 무엇이었는지 몰라도ㅡ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눈동자에 여느 때처럼 느긋한 기색이 돌아왔다. 해야 하는 말은 이제 없었다.
원래는 있었지만 붉은 난롯불이 남김없이 빨아들인 것 같다. - P326

시곗바늘이 없는 오래된 손목시계를 차고, 늘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한 노인ㅡ그 수수께끼 같은 존재는 무슨 의미일까.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마 나 개인을 향한 메시지가・・・・・・ - P327

"고야스 씨?" 그녀는 희미하게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삼십 분 전까지 반지하 방에서 같이 말씀을 나눴는데요. 오신건 두시가 안 돼서고요."
"글쎄요. 저는 못 봤습니다"라고 그녀는 묘하게 삐걱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볼펜을 들고 하던 일로 돌아갔다. 희한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소에다씨는 자기 자리인 카운터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거니와 주의력이 날카롭기에 사람이 들고 나는 걸 놓칠 리 없다. 그런 사람이다. - P328

고야스 씨는 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왜 하필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장작이 와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졌을까? 꼭 그 발언을 가로막으려는 것처럼. 발언자에게 경고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생각을 굴려봤지만, 내 모든 사고와 추론은 번번이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했다. - P328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는 소녀가 항상 나를 위해 미리난롯불을 지펴주었다. 내가 저녁 무렵 도서관 문을 열면 방은 딱 알맞은 정도로 훈훈했고, 난로 위에서 커다란 주전자가 우호적인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런 준비를 해주지 않는다. 내손으로 직접 시작해야 한다. 도서관 가장 안쪽에 있는 반지하 방은 이른아침이면 차갑게 식어 있었다. - P331

책상 앞에 앉아 따뜻한 홍차를 맛보면서, 높은 벽에 둘러인 그 도시와 도서관에 있던 소녀 생각에 빠져든다. 어찌됐건 그 생각을 막을 순 없다. 그렇게 겨울 아침의 약 삼십 분이 막연하게 흘러간다. 나의 의식은 두 세계 사이를 정처 없이 오가고 있다. - P332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몇 차례 심호흡을 한 다음, 쇠바퀴에 갈고리를 고정하듯 의식을 이쪽 세계에 묶어둔다. 그리고 이 도서관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한다. 나는 이제 ‘오래된 꿈‘을 읽지 않는다. - P332

나는 독서할 때 쓰는 오래된 안락의자(고야스 씨가 어디선가 구해다준 것)에 앉아, 플로어스탠드 불빛 아래 플로베르의《감정 교육》을 재독하고 있었다. 오래된 활자에 눈이 피곤해져 슬슬 잘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ㅡ평소와 별다를 것 없이. - P333

"전화로 말해도 될 만큼 간단한 용건이 아닙니다. 전화는 원래부터 썩 믿을 만한 게 못 되고요." - P333

그 정경은 어릴 적 읽었던 그림책의 한 장면 같았다. 무언가가 지금부터 바뀌려 한다ㅡ그런 예감이 들었다. 길모퉁이를 돌면 그곳에서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소년 시절 내가 종종 느꼈던 감각이다. 그 무언가는 내게 중요한 사실을 알리고 그 사실은 또 내게 응분의 변용을 재촉하리라. - P337

"저는 이 방의 난로가, 네, 그 무엇보다 좋답니다." 이윽고 고아스 씨는 그렇게 말했다.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이 불꽃이, 희미한 사과나무 향이, 저의 몸과 마음을 안쪽부터 천천히 덥혀줍니다. 제게 그 따뜻함은 귀중하답니다. 이 덧없는 영혼을 덥혀주니까요. 이러는 게ㅡ제가 여기 찾아오는게ㅡ당신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만." - P339

"아뇨, 소에다 씨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묘하게 단호한 투로 고야스 씨는 말했다. "그 사람은 제가 밤중에 여기 온다는 걸 모릅니다. 앞으로도 모를 테고,
굳이 말씀드리자면, 네, 알 필요도 없답니다." - P339

알 필요가 없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사정을 설명하려면 얘기가 길어집니다." 고야스 씨는 말했다. "실은 더 빨리, 조금씩이나마 당신에게 진실을 말씀드려야했습니다. 하지만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하고 이렇게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저의 불찰이겠지요." - P340

"제가 해드릴 이야기가 상당히 기묘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아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울 테죠. 하지만 당신이라면 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어주리라 확신합니다. 당신에게는 그것을 믿을 자격이 갖춰졌기 때문입니다." - P340

"자격이라는 건, 네, 다소 어울리지 않는 말인지도 모르겠군요. 뭐랄까, 다분히 형식적인 표현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것말고 적절한 표현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처음 당신을 만난 순간부터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말하려는 것을, 또한 말해야 하는 것을 올바로 알아듣고 이해해줄 거라고, 그런 자격을 갖췄다고."
난로 안에서 파삭 하고 장작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물이 자세를 바꾸며 내는 듯한 작고 갑작스러운 소리다. - P341

"큰맘먹고 털어놓겠습니다." 고야스 씨가 말했다. "저는 그자가 없는 인간입니다."
"그림자가 없다?"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고야스 씨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림자를 잃어버린 인간입니다. 그림자라는 게 없지요. 언젠가 알아차리시겠거니 했습니다만." - P341

그 말에 나는 방의 흰 벽에 눈길을 던졌다. 아닌 게 아니라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벽에 비친 건 나의 검은 그림자뿐이다. 천장에 매달린 전구의 노란 빛을 받아 약간 비스듬히 벽 위로 늘어져 있었다. 내가 움직이면 그것도 움직인다. 그러나 나란히 있어야 할 고야스 씨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네, 보시다시피 제게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고야스 씨는 말했다. 그리고 확인시키듯 한 손을 전구 앞에 내밀어 벽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제 그림자는 제게서 떨어져 어딘가로 가버렸답니다." - P341

"제가 죽었을 때입니다. 그때 저는 그림자를 잃고 말았어요.아마도 영원히."
"당신이 죽었을 때요?"
고야스 씨는 작고 확고하게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네, 지금으로부터 일 년 하고도 조금 더 전에. 그뒤로 저는 그림자없는 인간이 되었답니다."
"즉, 당신은 이미 죽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얼어붙은 쇠못 못지않게, 고스란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 P342

"오해를 무릅쓰고 익숙하면서 편의적인 표현을 쓰자면, 지금 저는 유령이라고 해도 될 존재입니다." - P344

세상에는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하거나 남을 놀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고야스씨는 그런 농담을 즐길 타입이 아니다. 게다가 어찌됐건 그에게는 정말로 그림자가 없다. 당연한 소리지만, 농담을 하기 위해 그림자를 잠깐 지워버릴 순 없다. - P345

"네, 저도 모르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답니다." 고야스 씨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제가 죽어서 왜 무로 돌아가지 않고, 이렇게 의식을 가지고 일시적인 형태를 띤 채 계속 이 도서관에 머무를 수 있는지, 저도 잘은 모릅니다." - P345

"의식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죽은 뒤에도 의식이 있다는 건, 네, 한층 불가사의한 일이랍니다. ‘의식이란 뇌의 물리적 상태를 뇌 자체가 자각하는 것이다‘라는 설명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 있습니다. 글쎄, 어떨까요. 그게 과연 올바른 정의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P346

"네. 그렇다면 제게는 아직 뇌가 존재하는 셈입니다. 그렇죠? 의식이 있으면, 네, 필연적으로 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육체가 없는데 뇌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고야스 씨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그 전개가 일상적 수준을 크게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 P346

"네. 제 몸은 이제 이 세계에 없습니다. 지금은 일단, 네, 생전의 제 모습을 이렇게 빌려 쓰고 있지만, 장시간 유지하진 못합니다.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져 무가 됩니다. 어디까지나 잠시잠깐의 일시적인 모습이지요." - P346

"네, 의식은 그대로 확고하게 존속합니다. 육체가 없어도 의식은 멀쩡합니다. 저도 그게 큰 수수께끼랍니다. 육체가 없는데, 그리고 육체가 없으면 필연적으로 뇌도 없어야 하는데, 보다시피 의식이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이, 네에, 이렇게 죽어서도 여전히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게 왠지 기묘하답니다." - P347

"뇌와 육체 말고, 그것과 별개로 영혼이라는 존재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까요?" - P347

"많은 이들이 ‘영혼‘이라는 말을 흔히 쓰지요. 그러나 영혼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알기 쉽게 정의하고 설명해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 단어가 워낙 빈번하게 여러 국면에서 사용되는지라. 다들 영혼이라는 것이 우리 몸안에 엄연히 존재한다고 막연하게나마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죽어보면 알 수 있는 게, 영혼이란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답니다. 그걸 이용해 무슨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무엇보다 실제로 의지할 수 있는 건 의식과 기억뿐입니다." - P348

"제 경험으로 말씀드리자면,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대개 예상도 못했을 때 일어난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죽음이란, 인생에서 제법 중요한 일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 P349

"네. 소에다 씨는 제가 유령이 된 사실을 기본적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저와 소에다 씨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며 어떤 면에선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데다, 그녀는 제가 유령이 된 사실을 이른바 자연 현상으로, 그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적잖이 놀랐던 모양입니다만." - P352

"당신이 면접을 보러 이리로 오셨을 때, 저는 보자마자 첫눈에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아아, 그렇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특별하다. 이 사람은 나의 존재를 일시적인 육체를 동반한 의식으로서의 나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오롯이 받아들일 것이 분명하다고. 뭐랄까요. 생각지도 못한 기적적인 해후였습니다." - P354

"하지만 저는 조심 또 조심하며 한동안 당신의 언동을 신중히 관찰했습니다. 사실을 털어놓아도 될지 나름대로 주저하고 있었지요. 사람의 생과 사에 관한 대단히 미묘한 문제니까요. 이해하시겠지만, 사실 저는 유령이랍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가 그리 간단하진 않으니까요. 마땅한 시간의 경과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나고, 산간지방의 짧은 가을이 지나고, 이처럼 혹독한 겨울이 찾아와 이 방 난로에 불을 지피는 계절이 오자 마침내 마음속 깊이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받아들여주기에 실로 마땅한 상대라고요." - P354

"당신은 그림자를 잃었던 경험이 있지요." 이윽고 그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러고는 등을 펴고서 눈을 뜨고 내 얼굴을 보았다.
"어떻게 아십니까? 제가 그림자를 한 번 잃은 적 있다는 걸요." - P355

"저는 유령입니다. 생명이 없는 의식이지요. 그런고로 보통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한 번 그림자를 잃은 적 있다는 건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 P356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잃는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고야스 씨는 눈부신 것을 보려고 할 때처럼 실눈을 떴다.
"아아, 당신은 그걸 모르는군요?"
"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거스르지 않고 따랐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판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제 그림자와 일시적으로 떨어져 분리되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그림자가 없는 도시에서." - P356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렇게 죽은 몸이 되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네, 살아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유감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이 죽었다고 갑자기 똑똑해지진 않더군요. 그러니 아쉽지만 당신 질문에 똑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하겠어요. 또한 이 세계에는 간단히 설명해선 안되는 일도 있답니다."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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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에 관한 다양한 연구와 실제 실험을 통해 편향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그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 혹은 대안들을 끊임없이 제안한다.

이 책의 구성자체가 어떤 한 줄기의 이야기가 쭉 이어진다기보다는, 병렬적으로 각각의 이야기(연구, 실험)들을 그냥 쫙 나열하고 그 안에서 문제제기부터 문제 해결 혹은 대안 제시같은 결론에까지 이르기에 호흡이 짧은듯 하면서도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례들의 양에 압도되어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나가는게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은듯 하다.

그래도 어쨌든 책에서 제기하는 편향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보게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의 목적이 일정부분 달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네가 할 일을 하고 말썽을 부리지 마라.

멘토링과 롤 모델은 주변적 집단의 성공을 북돋는 입증된 길이다.

그녀에게 요구된 역할은 실제 변화는 하지 않으면서 다양성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 그녀는 역겨워졌다.

편향은 사람들이 단순히 자신의 일을 하는 것도 힘들게 만들 수 있다.

편향이 적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집단의 다양성을 키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인적 자원 연구 교수 사리사 니시이Lisa Nishii는 20년간의 조사를 바탕으로 포용적 설정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공정하고 편향 없는 실천,
사람들의 ‘온전한 자아‘에 대한 환영받는 태도와 존중, 그리고 다른 관점을 추구하고 싶은 열망이다.

일부 연구자는 포용적 환경에서 사람들은 소속감을 느끼고 목소리를 낸다고 설정한다.

많은 연구에서 포용을 평가하는 방법은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당신은 환영받는다고 느끼는가? 당신의 생각이 중요시 되는가? 당신은 어딘가에 속해 있는가?

환영받는다는 기분, 소속된다는 느낌. 이런 것은 중요하다. 생각의 공유도 그렇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래도 자기들이 항상 해온 대로 계속할 수 있습니다"

"전 생일 축하 카드를 받고 싶은 게 아니에요. 진정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은 거지요"

진짜 질문은 사람들이 환영받는 느낌을 받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영향력을 갖는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들을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납득시키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불공정성을 인지하면 사람들은 직장에 헌신하지 않게 된다.

회사의 남자들이 성차별적 발언을 하면 그는 그들을 조용히 데리고 나가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학생이었더라면 그런 농담이 통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여기는 학교가 아닙니다. 그만 하세요."

차이를 부富로 보고 이런 차이에서 기꺼이 배우려는 태도는 사람들이 갈등을 피해야 할 지뢰가 아니라 성장의 기회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다양성의 맥락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모른다‘는 작업 가정working assumption 을 세워야 한다."

차이를 헤쳐나가는 데 가장 숙련된 사람은 타인에 대한 지식을 새로이 쌓을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사람

다양성이 존재하는 상황에는 모두 갈등과 혼란이 잠재되어 있다. 배우려는 태도는 그런 긴장을 해소해 유용한 재료로 변환시킨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뭔가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이 그를 자유롭게 했다.

그러나 이 접근법에는 중요한 책략이 있다고 사회심리학자이블린 카터 Evelyn Carte는 말한다. 그것은안전한 환경에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주변적 집단 출신 사람이 방어막을 거두기 위한 필수 조건은 모두가 해를 끼치지 않는 분위기를 창출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에서 뭔가를 배울 만큼 개방되지 않고도 생산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들은 일을 완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본질적으로 취약하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런 상황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다양성이 가져다주는 풍부한 직관의 혜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또 갈등이 생길 때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겪을지도 모르는  도전을 줄이고 싶기때문에 자신들과 똑같은 인물을 밀어준다

가장 중요한 채용 대상은 바로 당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당신에게 가장 많이 도전할 사람들이고, 비판과 방어를 겪은 아이디어에서 더 나은 결정이 나온다.

"당신이 옳거나, 내가 당신을 설득시킨다면 내가 옳습니다. 당신이 내적으로 더 많이 도전받을수록 외적으로 받는 도전은 줄어듭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공정한 환경이란 일하기에 더 즐거운 직장이다.

조직 내 다양성에 대한 40년간의 연구에 대한 어떤 리뷰는 다양한 집단이 동종집단보다 창의적일때가 더 많지만, 마틴 데이비드슨이 주장했듯 갈등과 소통불능에 빠지기 쉬운 성향도 생길 수 있음을 밝혔다.

마사 메즈네프스키Martha Maznevski는 다양한 집단이 동종적 집단보다 수행 성적이 더 좋지만 그렇게 되려면 아주 특정한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구축할 수 있다는 조건 말이다. 그것은 곧 그들이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안전하다고 느끼면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새 정보를 흡수하고 성장할 여유를 얻는다.

받아들여진다고 느끼고 소속감을 갖는 것ㅡ포용의 등록상표―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버틸 수 있게 도와주며, 그들의 성취를 증진시킨다. 또 그 분야에 남아 있을 동기를 갖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체계적으로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는 문화를 창출하려면 차이를 편안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내가 했던 인터뷰 가운데 많은 수가 타인들이 각자의 고유한 배경을 인정한 순간을 진정한 포용의 순간으로 설명했다.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무시는 심각한 소외 행태로 느껴질 수 있다.

포용적 환경을 양성하려면 또한 지도자들이 올바른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

그는 사람들이 편안해하지 않을 때 그들더러 털어놓으라고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전부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들이 환영받는다는 신호를 보냈다.
언어를 통해, 계급 정책을 통해, 존중과 호기심과 상호 격려하는 환경을 통해 그는 모두가 성공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그는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공개하라고 강제하지 않았고, 열린 태도로 대하면서 그들이 경험을 공개할 때는 존중과 관심을 갖고 귀담아들었다.

사람들의 마음, 심장, 습관을 변형하는 것은 편향을 바꾸는 방식 중 하나다. 또 다른 방식은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조직의 운영 절차와 구조와 문화를 바꾸는 것이다. 물론 두 방식은 서로 뒤엉켜 있다.

절차, 구조, 조직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개인이며, 이런 것들은 개인의 사유와 행동을 형성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더 큰 문화, 우리가 살고 있는 더 넓은 환경의 산물이기도 하다. 변화는 이 세 번째 출발점에서 또다시 시작될수 있다.

‘우리의 공통점은 우리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이다‘.

고정관념이란 한 집단의 구성원은 모두 동일한 특징을 지닌다는 생각에 의거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집단의 구성원을 동종적 존재로 볼수록 그들에 대해 더 많은 편향을 갖고 보게 된다는 것이 연구에서 밝혀진다.

이와 반대로, 어떤 집단이 서로 큰 차이가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졌음이 더 많이 인지될수록 사람들이 그들을 고정관념화할 확률은 낮다.

포스터들이 효과가 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랍인이 모두 똑같지 않다고 주장한 데 있다. 그들을 고정관념화하려는 사람들의 능력을 포스터가 손상시킨 것이다.

구성원들이 서로 달라 보인다면, 그들 모두를 똑같은 존재로 느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포스터가 긍정적 성격과 부정적 성격 양쪽 모두를 열거했다는 사실은 특히 중요해 보인다. 포스터의 또 다른 버전―‘낙관적‘, ‘따뜻함‘, ‘솔직함‘ 같은 긍정적 속성만 포함시킨 버전ㅡ은 그만큼 효과가 없었다.

이 접근법―어떤 집단 정체성 내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ㅡ은 통상의 다문화적 인식 캠페인에 역행한다. 그 캠페인은 전형적으로 어떤 집단을 다른 집단과 구별하는 요소를 강조한다.

차이에만 관심을 갖는 태도는 스테레오타이핑을 촉진할 수 있다. 다른 집단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공포와 증오로 이어지게 된다. 어떤 존재를 ‘타자‘로 만드는 것을 너무 강조하면 편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화를 내고, 모두 웃어요.

사랑하는 관계가 편향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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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 1부가 끝나고 2부를 들어갔다. 1부는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면 2부는 아직 초반부이긴 하지만 1부에 비해 현실로 좀 돌아온듯한 느낌이었다.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1부에 나왔던 내용이나 배경들과 2부에 나오는 것들이 교묘하게 조금씩 오버랩되는 느낌을 받았다. 등장인물들이 그러했고, 어떤 배경이나 맡은 직책 같은 것도 살짝 다른듯 하면서 앞서 나왔던 내용에서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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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아는 후배의 도움을 받아 지방의 비교적 한적한 어느 도서관에 관장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나‘는 그곳 일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데 1부에 나왔던 ‘그 도시‘에서 맡았던 ‘꿈 읽는 이‘라는 직책으로 했던 일들과 무언가 비슷한 느낌의 일들을 하게 된다. 그때와 지금 하는 일이 약간은 다르지만 무언가 살짝 겹치는 듯한 느낌이 드는건 나만의 느낌은 아닐듯 하다.

그 강줄기가 복잡한 미로가 되어 암흑의 땅속 깊은 곳을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실 또한 우리 내부에서 몇 갈래 길로 나뉘어 나아가는 듯하다. 몇 가지 다른 현실이 섞이고 다른 선택지가 얽혀, 그로부터 종합체로서의 현실이ㅡ 우리가 현실로 인지하는 것이ㅡ완성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 느낌이고 견해일 뿐이다. - P223

‘현실은 이것 하나뿐이고 다른건 없다‘고 한다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침몰하는 범선의 선원이 배의 메인 마스트에 매달리듯, 우리는 단 하나인 현실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말고는 다른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좋고 싫고를 떠나. - P223

어둡고 긴 밤, 벽까지 늘어지는 나의 검은 그림자를 언제가지고 가만히 바라본다. 그 그림자는 이제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내가 말을 걸고 질문을 해도 반응하지 않는다. 나의 그림자는 원래대로 말없고 납작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림자를 향해 자꾸 말을 걸고 만다. 내가 종종 그의 지혜를, 그의 격려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물음에 답이 없다. - P224

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지금 왜 여기 있을까? 나는 그 점이ㅡ지금 이렇게 나를 포함하고 있는 ‘현실‘의 양상이ㅡ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었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그림자에게 작별을 고하고,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 홀로 남았을 터였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세계에 돌아와 있을까? 계속 여기 있었고, 어디에도 가지 않았고, 그저 기나긴 꿈을 꾸었을 뿐일까? - P224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림자가 있다. 나의 이 몸에 그림자가 붙어 있다. 내가 가는 곳 어디나 그림자가 따라온다. 내가 걸음을 멈추면 그림자도 멈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한다. 나와 그림자가 말 그대로 일심동체라는 사실에 그런 기분은 한번 그림자를 잃어본 인간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 P225

그 약속은 이뤄졌는가? 아니면 이뤄지지 못했는가? - P225

나는 어떤 힘에 의해 어느 시점에서 둘로 나뉘어버렸는지도모른다. 그런 생각을 떨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또하나의 나는 지금도 그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고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 저녁 그 도서관을 드나들며 그녀가 만들어준 쑥색 약초차를 마시고, 두꺼운 책상 앞에서 하염없이 오래된 꿈을 읽고 또 읽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장 논리적이고 말이 되는 추측이란 생각을 지울수 없다. - P226

어느 포인트에서 나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이쪽 선택지를 고른 나다.
그리고 또 한편, 서쪽 선택지를 고른 내가 어딘가에 있다. 어딘가ㅡ아마 높은 벽돌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 P226

‘이쪽 ‘현실세계‘에서 나는 중년으로 불리는 나이에 접어든이렇다 하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는 한 남자다. 더는 그 도시에 있던 때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아니다. 눈에 상처를 내지도 않았고, 오래된 꿈을 읽을 자격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거대한 사회를 구성하는 몇 가지 시스템 중 하나, 그톱니바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매우 작고 대체가능한 톱니바퀴다. 그 사실을 얼마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올 수 없다. - P226

이 현실이 나를 위한 현실이 아니다, 라고 피부로 느끼는 감각은, 그 깊은 위화감은, 아마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리라. - P228

관성을 박탈당하고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어 지면에 방치된 무거운 쇠공이 된 기분이었다. 결코 나쁜 감각은 아니었지만. - P229

모두 아귀를 맞추기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무대배경으로, 교묘하게 입체를 가장한 평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P229

그렇다. 나는 이 지상에 정지한 쇠공일 뿐이다. 매우 묵직하고 구심적인 쇠공이다. 나의 사념은 그 안에 단단히 갇혀 있다. 겉보기는 볼품없지만 중량만은 충분히 갖추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힘껏 밀어주지 않으면 어디도 갈 수 없다.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
나는 몇 번이고 나의 그림자를 향해 묻는다. 이제부터 어디로 가면 좋을까. 그러나 그림자는 대꾸해주지 않는다.
  - P230

적어도 그곳에서 나는 더이상 한곳에 묵직하게 정지한 쇠공이 아니다. 조금씩이나마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듯하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결코 나쁜 감각은 아니다. - P233

긴 꿈에서 깬 건 날이 밝기 전이었다. 주위는 아직 어둑하다. 그것이 꿈이었음을 인식할 때까지 그 꿈의 세계에서 내 몸을 완전히 걷어내어 이쪽 현실로 가져올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미묘한 중력의 조정 같은 것이 필요했다. - P234

그 꿈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려 했다. 마치 친한 사람들 사이에 마음을 담은 메시지가 오갈 때처럼, 무척 친절하고 구체적이고 알기 쉽게.
이윽고 창밖이 완전히 밝아오고 새들이 활기차게 지저컬 무렵, 나는 한가지 결론을 얻었다.

‘나에게는 새 직장이 필요하다‘ - P235

이제는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무겁게 머물러 있을 순 없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직장이란, 그렇다. 도서관 말고는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도서관 말고 내가 가야 할 장소는 없다. 이토록 간단한 사실을 왜 지금껏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나는 드디어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관성을 얻어 차츰 전진한다. 생생하고 또렷한 꿈의 강력한 후원을 받으며. - P235

"실은 저도 선배에겐 이 후쿠시마현의 마을 도서관이 잘 맞지 않을까 했어요."
"어째서?"
"여긴 형식상 마을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이지만 실질적으로마을이 운영에 관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방공무원이 지켜야 하는 귀찮은 제약 같은 게 없을 거예요."
"마을 운영 도서관인데 마을이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네, 그런 얘깁니다." - P245

오키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괜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저한테 선배는 예전부터 좀 신기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예측 불허라고 할까, 종잡을 수 없다고 할까…… 이번 일도 그래요. 잘 다니던 직장을 왜 갑자기 그만두고, 이름도 못들어본 시골 도서관에서 조건도 좋지 않은 일을 한다는 건지, 도통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언젠가 내키시거든 그얘기나 좀 해주시면 좋고요." - P247

"고마워." 나는 말했다. 그리고 큰맘먹고 물어봤다.
"그런데 혹시 자기 그림자의 존재가 신경쓰인 적 있나?" - P247

"나는 내 그림자가 아무래도 신경쓰여. 특히 최근 들어서.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
"저기...... 그것도 이번 이직을 고려한 이유 중 하나일까요?"
"그런지도 몰라." - P248

머릿속을 텅 비워야 한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직감을ㅡ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방향감각을ㅡ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라고 오키는내게 말했다.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을 테지, 라고. - P251

어쩌면 나라는 인간에 대해 정말로 당혹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 P252

시곗바늘은 언제나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시간을 쌓아갔지만, 나에게 진짜 시간은ㅡ마음의 벽에 박힌 시계는ㅡ그대로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로부터 삼십년 가까운 세월은 그저 공허를 메우는 데 소비해온 것이나 다름없다. 텅 빈 부분을 무언가로 채울 필요가 있기에 주위에 보이는 것으로 그때그때 메워갔을 뿐이다. 공기를 들이마실 필요가 있기에 사람은 자면서도 무의식중에 호흡을 계속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 P254

"그런 설명을 하는 사이, 나는 문득 알아차렸다ㅡ큼직한 책상 구석에 모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남색 베레모였다.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부드럽게 길이 들었다. 게다가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ㅡ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ㅡ베레모였다. 놓여 있는 위치까지 똑같다. 나는 숨을 멈췄다.

‘무언가와 무언가가 이어져 있다.‘

시간이 거기서 뚝 멎어버린 것 같았다. 시곗바늘은 먼 과거의 중요한 기억을 열심히 찾는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바늘이 다시 움직이기까지 한동안 시간이 걸렸다. - P263

삼십 분쯤 걸려서 대강 이야기가 정리되자 고야스 관장은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남색 베레모를 집어 머리에 썼다. 볼일이 있어 슬슬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니 좀 기묘한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워낙에 약간 특이한 어휘를 구사하는 사람인 듯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모자가 멋지군요." 나는 슬쩍 떠보았다. - P267

이윽고 나는 고야스 관장의 옷차림에 관해 또하나 평범하지않은ㅡ특이하기로 말하면 베레모 이상인ㅡ사실을 발견했다. 고야스 관장은 바지가 아니라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훗날 고야스 씨는 자신이 왜 일상적으로 스커트를 입는지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첫째로는, 이렇게 스커트를 입고 있으면, 네, 왠지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랍니다." - P268

고야스 씨에 대해서는 무언가 알려지지 않은ㅡ적어도 내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ㅡ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았다. - P275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 - P280

생각할수록 고야스 씨에 대해 알아야 할 점이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유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P281

수호신을 모신 숲속의 사당 문을 함부로 열고 들여다봐선 안 된다, 하는 것처럼. 소박한ㅡ그러나 의식의 심층까지 굳게 배어 있는ㅡ종류의 터부다. - P282

몰라도 될 일은 계속 모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마도. - P283

"글쎄요. 연애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정신질환이다, 라고 말한 게 누구였더라?" - P287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 나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상당히 근사한 표현이다. - P292

가끔 도스토옙스키나 토머스 핀천, 토마스 만, 사카구치 안고, 모리 오가이, 다니자키 준이치로,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이 대출되기도 했다. - P294

‘뭐 어때, 곧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겠지‘라고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고야스 씨 말마따나 모든 것이 차차 선명해질 것이다.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흘러드는 것처럼. - P297

"신경쓰지 마세요. 이게 제 일이니까요." 먼저 퇴근하면서 미안한 내색을 하는 나에게 소에다 씨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소에다 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벽에 둘러싸인 도시의 도서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도서관에서도 출입문을 열고 잠그는 건 ‘그녀‘의 역할이었다. 그 소녀는 커다란 열쇠 다발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다. 단 하나 다른 점은, 그 도서관에서 출입문을 닫은 뒤 내가 나란히 길을 걸어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는 것이다. - P298

하지만 그 방의 공기는 이상하게 매캐하고, 잊혀버린 시대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커튼과 소파의 천색깔이 왠지 모르게 불온한 분위기를 풍겼다. 과거 이곳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의 부적절한 비밀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설령 지독한 졸음이 덮쳐온다 해도 여기서 낮잠을 자고 싶을 것 같진 않다. - P301

그는 늘 스커트를 입고 있었지만 허리 위쪽으로는 일반적인, 오히려 보수적이라 할 남성복을 걸치고 있었다. 단추를 목까지 잠근 흰색 셔츠와 반듯함 그 자체인 트위드 재킷, 무늬없는 진녹색 베스트,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언제나 흐트라짐 없는, 조금은 고풍스러워 보여도 더없이 청결한 옷차림이었다. 그렇게 지극히 중장년 남성다운 옷과 스커트(그리고 타이츠)의 조합은 아무리 봐도 조화롭다고 하기 힘들었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눈곱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 마을 사람들도 오랫동안 그 모습에 익숙해져 일일이 눈길을 주지 않는 듯했다. - P304

내리는 눈은 어쩔수없이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의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겨울이 되면 그 도시에도 자주 눈이 내렸다. 그리고 눈 속에서 많은 단각수들이 죽어갔다.
그런데 그 도시에서, 나는 어떤 신발을 신고 다녔던가? - P305

그 도시에 대해 잘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그 외에도 많았다.
어떤 건 지나칠 만큼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어떤 건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신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것 중 하나다. 그렇게 기억이 띄엄띄엄하다는 사실이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기억을 잃은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기억하는 것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일까? 어디까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어디부터가 가짜일까? - P306

게다가 나는 굳이 말하자면 적당한ㅡ그럭저럭 참을 수 있을 정도의ㅡ추위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벽에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맛보았던 것이니까. 주위를 감싸는 냉랭한 공기는 그 도시에서의 생활을 다시금 내 마음에 되살려주었다. - P307

우리가 앞으로 지나가도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마치 우리 모습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왠지 불가사의한 광경이었다. 꼭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다. - P309

원래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쓰던 방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정사각형 방에는 어딘가 수수께끼 같은 의미심장한 공기가 감도는 듯 느껴졌다. 저 옛날 이곳에서 누군가가 중요한 비밀을, 누군가에게 남몰래 소리 죽여 털어놓았을 것같은......
그리고 나는 보았다. 방 한쪽에 새카맣고 고풍스러운 장작난로가 놓여 있는 것을. - P311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숨을 고른뒤 다시 눈을 떠서 그것이 실제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확인했다. 틀림없다. 환영 같은 게 아니다. 벽에 둘러싸인 그도시의 도서관에 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ㅡ혹은 똑같다고 밖에 볼 수 없는ㅡ난로였다. 검고 둥근 연통이 벽으로 이어져있었다. 나는 말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그 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P311

"나는 제자리에 선 채 여전히 난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실제로 사용할 수 있고요?"
"아무렴요. 사용할 수 있다마다요." 고야스 씨는 눈을 반짝이며 단언했다. "실은 해마다 겨울이 되면 불을 지펴서 잘 써왔답니다. 장작은 부지 내 다른 장소에 넉넉하게 쌓여 있습니다. 장작 걱정은 전혀 없지요. 근처의 사과 농가가 폐업하게되어 오래된 사과나무를 베어내면서 인심 좋게 내주셨답니다. 가깝게 지내는 제재업자가 장작으로 쓰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었고요. 태우면 무척 좋은 사과 향이 나지요. 네, 이게 또 실로 향긋하답니다. 어때요, 지금 한번 장작을 가져다 불을 붙여볼까요?" - P312

"원래는 어떤 용도로 쓰던 방일까요?"
고야스 씨는 고개를 가볍게 기울이고 귓볼을 긁적였다. "글쎄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이 건물은 예전에 양조장이었어요. 도서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절반 넘게 개축했습니다만 나머지 부분. 요컨대 이 언저리는 손대지 못하고 남겨졌습니다. 이 방이 과거에 어떻게 사용됐는지는, 네, 유감스럽지만 옛날 일이라 저도 알 수 없군요." - P313

고야스 씨와 나는 그 정사각형 방을 나와 어둑한 복도를, 소에다 씨가 앉아 있는 카운터 앞을 사람이 뜸한 열람실을 통과해 2층 관장실로 돌아갔다. 아까 방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앞을 지나가도 누구 하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그 정사각형 방과 검은색 구식 장작 난로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다음날도. - P313

12월에 접어들어 그 겨울 첫 한파가 닥쳤다. 눈발이 흩날렸다. 나는 시험삼아 관장실을 정사각형 반지하방으로 옮겨보기로 했다. 소에다 씨에게 그렇게 전하자 몇초동안 말이 없었다. 짧지만 묘하게 깊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호숫바닥에 가라앉은 작은 저울추처럼. - P314

그때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에다 씨가 건물 내부를안내했을 때는 그 방을 본 기억이 없었다. 만약 보았다면 틀림없이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방은 기묘할 정도로 반듯한 정사각형이고 장작 난로도 놓여 있었다. 내가 그 광경을 놓칠 리 없다.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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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내용에 이어 맨처음 밑줄친 p.179에 나오는 내용도 어제와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는 문장이라 내 마음에 어떤 강력한 울림과 의미심장한 메시지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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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계속 쭉 이어지다가 ‘나‘와 ‘나의 그림자‘가 다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이 도시를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탈출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탈출이 어디 호락호락하던가. 어김없이 장애물이 나타난다. 그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벽이 느닷없이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는데... 여기서 ‘나의 그림자‘가 의미심장한 말을 ‘나‘에게 건낸다. 벽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저 환영에 불과하다고. (p.206 참조)

아직 뒷 이야기들이 한참 남아있기에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의 전개와는 별개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장애물이나 방해물들. 그것이 사람일 수도 혹은 어떤 사물이 될 수도 있는데, 이러한 고난과 역경이 닥쳤을 때 멘탈을 꽉 붙잡고 용기있게 전진해 나갈 수 있는 강한 마음의 힘을 이 책에 나오는 ‘나의 그림자‘가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뭔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길 때 내 마음에 일어나는 두려움을 깨부수고 앞으로 용기있게 나아갈 수 있는 멘탈은 단지 이 책의 등장인물인 ‘나‘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우리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좋은 귀중한 걸 이 소설 속 이야기를 통해 몸소 느낄 수 있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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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이어 읽다가 갑작스런 반전이 일어났다. p.213에서 ‘나‘가 ‘나의 그림자‘에게 이제까지 대화의 흐름과는 상반되는 얘기를 한 거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거지??

"그런데 왜 그걸 굳이 가라앉혀야 하지? 밀폐용기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면 그대로 둬도 될 것 같은데."
"아무리 단단히 갇혀 있어도 존재 자체가 위협이니까요. 그것들이 어떤 계기로 힘을 얻어 일제히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ㅡ그게 이 도시의 잠재적 공포가 아닐까요. 만약 그런 사태가 빚어지면 도시는 순식간에 와해될테죠.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고 싶은 겁니다. 누군가가 오래된 꿈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꿈을 같이 꿔줌으로써 잠재된 열량이 달래진다ㅡ그들은 아마 그런걸 원하는 거겠죠.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당신 한 사람뿐이에요." - P179

어느 세계에 속해야 할까? 나는 아직 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 P180

이 세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이 은밀히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길모퉁이에는 생각지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 P182

나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어째서 이곳에 있고,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어째서 이곳에는늘 이렇게 세찬 바람이 불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묻는다. 물론 대답은 없다. - P184

오래된 꿈ㅡ그것은 내 그림자가 추측하듯 긁어내어져 밀폐보존된 사람들 마음의 잔재일까? 나로서는 그 가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내가 보는 한 눈앞에 있는 건 병조림처럼 가둬진 ‘혼돈의 소우주‘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란 이토록 불명료하고 일관성이 결여된 것인가? 혹은 오래된 꿈이 이처럼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메시지밖에 내보낼 수 없는 건, 그것이 결속된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남은 부스러기‘를 모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까? - P186

내 꿈에 나왔던 하사관은 메마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때로는 의식을 죽이는 게 가장 편한 길로 여겨지니까요." - P186

"벽 바깥의 세계에서, 아주 오래전에 너를 만난 적 있어."
너는 걸음을 멈추고 초록색 머플러를 목에 단단히 고쳐 맨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본다. "나를요?"
"또다른 너ㅡ즉 벽 바깥에 있는 너를."
"내 그림자를 말하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아."
"내 그림자는 한참 옛날에 죽었어요." 너는 말한다. 오늘밤은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선언했을 때처럼 단호하게.
너의 그림자는 한참 옛날에 죽었다, 나는 그 말을 속으로 되된다. 동굴에 울리는 메아리처럼. - P187

나는 묻는다. "그림자들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너는 고개를 젓는다. "몰라요. 내게는 도서관 일이 주어졌고, 그 역할을 다할 뿐이에요. 매일 도서관 문을 열고, 추운 계절에는 난로에 불을 피우고, 약초를 따서 차를 만들고………… 그렇게 당신 일을 도우면서요." - P188

"당신은 벽 바깥의 세계에서 내 그림자를 좋아했다. 그곳에서그녀는 열다섯 살이었다"라고 너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해불가능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하듯이. - P188

나는 말한다. "나는 그녀를 간절히 원했고, 마찬가지로 그녀도 나를 원해주길 바랐어. 그런데 일년 후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사라져버렸어. 예고도 없이, 설명다운 설명도 없이."
너는 다시 한번 초록색 머플러를 가느다란 목덜미에 고쳐맨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어쩔 수 없죠. 그림자는 언젠가 죽기 마련이니까." - P189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서 이 도시에 왔어. 여기 오면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동시에 너도 만나고 싶었어. 그것도 내가 벽 안쪽으로 들어온 이유 중 하나야."
"나를요?" 너는 미심쩍은 듯한 얼굴로 말한다. "어째서죠?
왜 나를 만나고 싶었어요? 나는 당신이 좋아했던 열다섯 살 소녀가 아니에요. 우리가 원래 하나였는지 몰라도 어릴 적에 떨어져 벽 안과 바깥으로 갈라졌고 서로 다른 존재가 됐어요.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산속 맑은 샘의 밑바닥을 살피듯이, 그리고 말한다. "너는 그녀가 아니야 잘 알고 있어.
여기서 너는 꿈을 꾸지 않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도 없지." - P189

아아,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 라고.
이대로 살면 몸도 마음도 닳고 해져서 혹시 언젠가 네가 나에게 돌아와도 온전히 받아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 사태만은 피해야 한다. - P191

누군가를 위한 비밀 공간을 확보해둔 채 다른 사람과 연인관계가 된다―그런 게 가능할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어가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그 결과나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더욱 고독해진다. - P192

독신 생활에는 규칙성을 중시하는 것이 제일이다ㅡ규칙성과 단조로움 사이에 선을 긋기가 가끔 어렵다 해도. - P194

삼십대가 끝나고 마흔 살 생일을 맞았을 때는 어쩔 수 없이작은 동요가 일었다. 결국 누구와도 맺어지지 않고 이대로 평생을 외톨이로 보내는 걸까? 앞으로 나는 착실히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그리고 더욱 고독해질 것이다. 이윽고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신체 능력도 점점 약해진다. 지금껏 별생각없이 간단히 해왔던 일들이 쉽지 않아질 것이다. 그런 미래의 내 모습을 아직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으리란 건 쉽게 상상이 된다. - P194

마흔 살……… 생각해보면 나는 열일곱 살 때부터 벌써 이십삼 년에 걸쳐 너를 기다리는 셈이다. 그사이 너에게선 전혀 연락이 없다. 침묵과 무는 변함없이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이제는 그들의 존재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이미 나의 일부다. 침묵과 무..... 그들을 빼고서는 나라는 인간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 P195

그렇게 마흔 살 생일을 별일 없이(누구의 축하도 없이) 통과한다. 회사 일은 안정적이다. 직급도 그럭저럭 올라갔고 수입도 부족하지 않다(사실 무언가를 열렬히 갖고 싶어할 때가 거의 없다). 고향의 연로한 부모님은 내가 결혼해서 자식을 갖기를 간절히 바란다.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내게 그런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 P195

변함없이 너를 생각한다. 마음속 깊은 곳, 작은 방에 들어가너의 기억을 더듬는다. 너에게서 받은 편지 다발, 손수건 한장, 그리고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면밀하게 기록한 공책. 나는 작은 방 안에서 그것들을 집어들고 하염없이 쓰다듬고 바라본다(마치 열일곱 살 소년처럼). 그 방에는 내 인생의 비밀이 담겨 있다. 아무도 모르는 나에 대한 비밀이다. 오직 너만이 그곳에 있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
하지만 너는 없다.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길은 없다. - P195

"결심이 선 거죠?" 그림자가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지금 같이 이곳에서 나가자." - P199

그들이 어딘가에 알릴까? ‘꿈 읽는 이‘가 그림자와 다시 한몸이 되어 도시에서 도망치려 한다고. 혹은 그런 건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일까? - P201

그림자를 업고 남쪽 언덕의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기는 쉽게않았다. 그러나 일단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다. 도중에 약한 소리를 할 순 없다. 더욱이 그림자의 말마따나 도시는 마음먹으면 한도 끝도 없이 위험해질 수 있다. 나는 코트 아래로 땀을 흘리면서 쉬지 않고 비탈길을 올랐다. 어찌어찌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는 두 다리가 돌처럼 딱딱해지고 종아리가 덜덜 떨렸다. - P202

그림자는 설명했다. "뿔피리를 불면 그 소리를 듣고 짐승들이 이 문으로 몰려오죠. 그러면 문지기는 문을 열어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야 해요. 짐승들이 전부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문을 닫아요. 그게 규칙으로 정해진 그의 임무입니다. 짐승들을 남김없이 밖으로 내보내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요. 그만큼 우리는 시간을 벌 수 있는 거죠."
나는 감탄해서 그림자를 보았다. "머리를 쓸 줄 아는구나." - P204

"그거 알아요? 이 도시는 완전하지 않아요. 벽 역시 완전하지 않고요. 완전한 것 따위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것에나 반드시 약점이 있고, 이 도시의 약점 중 하나는 저 짐승들이에요. 그들을 아침저녁으로 출입시킴으로써 도시는 균형을 유지하죠. 우리는 방금 그 밸런스를 무너뜨린 겁니다."
"분명 도시가 화를 낼 테지."
"아마도." 그림자는 말했다. "만약 도시에 감정 같은 것이 있다면요." - P204

"이만큼 왔으면 괜찮겠죠." 그림자가 뒤에서 말했다. "저 덤불을 가로지르면 바로 웅덩이가 나와요. 이제 문지기가 따라잡지 못해요."
나는 그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어찌어찌 잘 헤쳐온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우리 눈앞에 벽이 우뚝치솟았다. - P205

벽은 아무런 전조 없이 순식간에 우리 앞에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그 높고 견고한 도시의 벽이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삼켰다. 왜 이런 곳에 벽이 있지? 지난번 이 길에 왔을 때는 물론 이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말을 잃고 그저 높이 8미터의 그 장벽을 올려다보았다.
[놀랄 것 없다.] 벽은 묵직한 목소리로 내게 알렸다. [네가 만든 지도 따위는 아무 쓸모 없다. 종잇조각에 그려진 한낱 선일 뿐이지.] - P205

벽은 자유자재로 모양과 위치를 바꿀 수 있다. 나는 그걸 깨달았다. 언제든 마음대로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벽은 우리를 바깥에 내보내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 P206

"들으면 안 돼요." 그림자가 등뒤에서 속삭였다. "보는 것도안 됩니다. 그저 환영이에요. 도시가 우리에게 환영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을 감고 이대로 돌파하는 겁니다. 상대의 말을 믿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으면, 벽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그림자의 말대로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전진했다. - P206

벽은 말했다. [너희는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무슨 짓을 하든 결과는 똑같아.]
"듣지 마요." 그림자가 말했다. "두려워해선 안 돼요. 앞을 향해 달리는 겁니다. 의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믿고." [그래, 달리거라], 벽이 말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얼마든지 멀리 달려가려무나. 나는 언제나 거기 있을 테니.] - P206

벽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똑바로 달려 그 앞에 있을 벽으로 돌진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림자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 의심을 버리고 나 자신의 마음을 믿었다. 그리고 나와 그림자는 단단한 벽돌로 이뤄져 있을 두꺼운 벽을 반쯤 헤엄치다시피 통과했다. - P207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물컹거리는 장해물을 돌파했다.
"내가 뭐랬습니까." 그림자가 귓가에서 말했다. "전부 환영이에요." - P207

머릿속에서 현실과 비현실이 격렬히 싸우며 뒤엉켰다. 나는바야흐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경계에 와 있다. 이곳은 의식과 비의식의 얇은 접면이고, 나는 어느 세계에 속해야 할지 지금 바로 선택해야 한다. - P209

그림자는 말했다. "이 웅덩이는 벽 바깥의 세계로 곧장 이어져요. 밑바닥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벽 아래를 헤엄쳐 빠져나가면 바깥세계로 나갈 수 있습니다."
"웅덩이는 석회암 땅 밑의 수로와 이어져서, 동굴에 빨려들어간 자는 예외 없이 그 암흑 속에서 익사한다고 해." - P209

"그건 사람들을 겁주려고 도시가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지하 미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 P210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느니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웅덩이를 높은 담이나 울타리로 둘러싸버리는 편이 손쉬울 텐데, 굳이 공들여 거짓말을 꾸미는 것보다."
그림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머리를 쓴 거예요. 도시는이 웅덩이 주위에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 엄중하게 둘러쳐됐지요. 담이나 울타리보다 훨씬 효과적이에요. 한번 공포가 마음에 뿌리내리면 그걸 극복하기란 간단하지 않으니까." - P210

"너는 어째서 그토록 확신하지?"
그림자는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도시는 구성부터 많은 모순을 안고 있어요. 도시를 존속시키려면 그 모순점을 원만하게 해소해야 하죠. 그러기 위해 몇 가지 장치가 만들어져 제도로 기능하고요. 공들인 시스템이에요." - P210

"장치 중 하나는 불쌍한 짐승들입니다. 짐승들을 날마다 문으로 드나들게 함으로써, 또한 계절에 맞춰 번식시키고 도태시킴으로써 도시는 잠재적인 에너지를 밖으로 방출해 처리하는 거예요. 당신이 도서관에서 했던 꿈 읽기 일도 장치 중 하나입니다. 오래된 꿈으로 집적된 정신의 조각이 그 작업에 의해 승화되어 허공으로 사라지지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도시가 대단히 기교적이고 인공적인 장소란 겁니다. 모든 존재의 균형이 정묘하게 지켜지고, 그걸 유지하기 위한 장치가 빈틈없이 움직이고 있어요." - P211

"그리고 그 밸런스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도시는 공포심을 이용한다. 그 말인가?"
"바로 그겁니다. 도시는 남쪽 웅덩이가 위험한 장소라는 정보를 사람들 머릿속에 심었어요. 도시 주민이 벽 바깥으로 나갈 수단은 이 웅덩이가 유일하니까요. 북문에선 문지기가 눈을 번득이고 있고, 동문은 폐쇄되었고, 강 입구는 튼튼한 쇠창살로 막혀 있어요. 벽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인간이 이 도시에 그리 많진 않겠지만, 그래도 도시는 탈출 가능성을 봉쇄하려는 겁니다." - P211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다행히당신은 아직 영혼을 빼앗기지 않았어요. 우리는 여기서 하나가 되어 웅덩이를 빠져나가 바깥세계로 돌아갈 겁니다."
귓속에서 조금 전에 들은 벽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드높은 웃음소리. - P211

"물론 무섭습니다. 생각만 해도 오싹해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마음먹었잖아요. 애당초 이 도시를 만들어낸 건 당신 아닙니까. 당신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어요. 실제로 조금 전 눈앞에 우뚝 선 단단한 벽을 무사히 통과했고요. 그렇죠? 중요한건 공포를 이겨내는 겁니다. 게다가 수영은 당신 특기 아니던가요. 숨도 오랫동안 참을 줄 알고." - P212

"그렇지만 너는? 수영할 줄 알아?"
그림자는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양손을 펼쳤다. "난처하네보세요. 난 당신 그림자예요. 당신이 헤엄칠 때 나도 옆에서똑같이 헤엄쳤다고요. 같은 페이스로 같은 거리를. 못할 리가 없잖아요." - P212

"설득력 있는 주장이야." 나는 그림자에게 말했다.
그림자는 그 말을 듣고 힘없이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영광이네요. 하지만 어찌 보면 이건 당신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기도 해요. 뭐니 뭐니 해도 나는 당신의 그림자니까." - P212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잠시 침묵했다. 다시 한번 두꺼운 눈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림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똑바로 보았다. 결심을 굳힌 뒤 큰맘먹고 말했다.
"그래도 나는 이 도시를 나갈 수 없어. 미안하지만 너 혼자가줘." - P213

"신중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겠죠?" 그가 말했다. "막상 뛰어들자니 무서워서, 뭐 그런 이유는 아니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무섭진 않아. 조금 전까진분명 공포를 느꼈지만 지금은 아니야. 네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 진실일 거야. 마음먹으면 우리가 함께 이 벽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P215

"그래도 역시 당신은 이곳에 남겠다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죠?"
"우선 첫째,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의미를 도저히 찾을 수없어. 나는 그 세계에서 더더욱 고독해질 테지.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깊은 어둠에 직면할 거야. 내가 그 세계에서 행복해지기는 불가능에 가까워. 물론 이 도시도 완전한 장소라고는 할수 없어. 네가 지적했듯 이 도시는 수많은 모순을 안고 성립되어 있어. 그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아귀를 맞추기 위해 여러가지 복잡한 조작이 이뤄지고 있고. 그리고 영원이라는 건 긴시간이야. 그사이 한 개체로서의 내 의식이 점점 엷어지고, 나라는 존재가 이 도시에 삼켜질지도 몰라. 하지만 설령 그렇다해도 괜찮아. 이곳에서 나는 적어도 고독하진 않아. 이 도시에서 내가 당장 무엇을 하면 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걸알고 있으니까." - P215

"그래도 그것이 당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 중 하나다." - P216

"아니면 바깥세계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나의 대역 노릇을할 수 있을지도 몰라. 보아하니 네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고지혜도 충분해. 그러다보면 어느 쪽이 그림자고 어느 쪽이 본체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르지." - P216

"우린 아무래도 가설에 가설을 더하고 있는 것 같네요. 뭐가가설이고 뭐가 사실인지, 점점 구별하기 힘들어져요."
"그런지도 몰라. 하지만 무언가가 필요해. 행동을 결단하는데 필요한, 기댈 수 있는 기둥 같은 것이." - P216

"솔직히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 자신이 어느 쪽을 선택할지확실히 몰랐어. 이 웅덩이 앞에 직접 와서 설 때까지는." 나는 말했다. "하지만 이젠 마음을 정했고, 결심이 흔들릴 일은 없어ㅡ나는 혼자 이 도시에 남겠어. 너는 여기서 나갈 테고." - P217

그림자는 오른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잡았다. 자기 그림자와 악수하다니 왠지 묘했다. 자기 그림자가 평험한 악력과 체온을 지니고 있다니 그 또한 묘했다.
그는 정말로 내 그림자일까? 나는 진짜 나일까? 그림자의말처럼, 무엇이 가설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점점 구별하기 힘들어진다. - P217

소리 없는 어둠이 방을 감싸기 시작할 때, 나는 모자를 깊이눌러쓰고 코트 깃을 세운 뒤 강변길을 걸어 도서관으로 향했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우산은 쓰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가야 할 곳이 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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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봤던 ‘나의 그림자‘가 상징하는 것과 오늘 봤던 ‘너의 그림자‘가 상징하는 것이 약간은 다르게 느껴졌다.

‘나의 그림자‘가 내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진 반면, 오늘 본 ‘너의 그림자‘는 한 사람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일종의 ‘페르소나‘ 같다고나 할까? 쉽게 말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작가가 ‘나와 너의 그림자‘ 를 통해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지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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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어나가다가 p.176~178에 ‘나‘와 ‘나의 그림자‘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읽으면서 ‘나의 그림자‘가 말하는 내용들이 너무나도 공감이 되어서 읽으면서 머릿속 뇌세포 전체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내 마음과 생각이 요동쳤다. 대화 내용의 일부분에 밑줄도 쳤는데, 내가 만약에 이 소설 속 ‘나의 그림자‘로 나왔어도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 같아서 어찌보면 비현실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정이 가는 캐릭터라고 느껴졌다.

"단각수는 그림자가 있어?"
"응, 짐승들은 그림자를 갖고 있어. 그 외 모든 것에도 그림자가 있어. 그림자가 없는 건 인간뿐이야." - P133

그 도시에 가면 나는 진짜 너를 가질 수 있다. 그곳에서 너는 아마 전부를 내게 줄 것이다. 나는 그 도시에서 너를 갖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리라. 그곳에선 너의 마음과 너의 몸이 하나가 되고, 유채기름 램프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나는 그런 너를 품에 꼭 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였다. - P134

"네 것이 되고 싶어"라고 너는 공원벤치에서 말했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
그 말이 그뒤로 계속 내 머릿속에 울리고 있다. 그것이 거짓이거나 과장이거나 일시적인 충동이 아님을 나는 안다. 네가 무슨 말을 꺼낸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특별한 잉크를 써서 특별한 종이에 적은 틀림없는 약속이다. - P135

아니, 네가 나를 간단히 잊을 리 없다. 내가 너를 잊을 리 없는 것처럼 그렇게 거듭 스스로를 타이른다. 나 자신을 납득시키려 한다. 그러나 여자에 대해, 그 심리나 생리에 대해 내가 무얼 얼마나 안단 말인가? 아니, 그런 일반론을 떠나 내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것이 대체 뭐란 말인가? - P136

"여러모로 시간이 걸려"라고 너는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주문처럼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는 양상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았다. 수시로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하루에 몇 번씩 벽걸이 달력을 쳐다보고, 때로는 역사연표까지 펼쳐보았다. 시간은 몹시 느릿느릿하게, 그래도 결코 뒷걸음치지 않고 내 안을 통과해 갔다. 일 분에 정확히 일 분씩, 한 시간에 정확히 한 시간씩. 느리게 나아갈지언정 거꾸로 가는 법은 없다. 그것이 그때 내가 몸으로 깨달은 사실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때로는 그 당연한 것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 P138

인간의 뇌가 좌우로 나뉜 것처럼 도시는 그 강에 의해 남북으로 거의 절반씩 나뉜다. - P139

강에는 이름이 없다. 그저 ‘강‘이다. 도시에 이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 P140

"멀찍이 서서 보기만 할 거야." 나는 너를 설득한다. "어떤건지 궁금해서 그래. 물가에만 가까이 가지 않으면 되잖아."
너는 작게 고개를 젓는다. "아뇨, 아무리 조심해도 그 물이사람을 불러들여요. 웅덩이에는 그런 힘이 있어요." - P141

그건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의도적으로 꾸며내 퍼뜨린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의심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벽 바깥의 세계를 두고 갖가지 무서운 소문이 나돌았지만 대부분 근거 없는 것들이었다. 웅덩이에 대한 이야기(불길한 전승)도 그런 유의 위협이 아닐까. 그 웅덩이는 어쨌거나 벽 바깥의 세계로 통하는 셈이고, 만약 벽 바깥으로 주민이 나가는 걸 도시가 원치 않는다면 접근을 단념케 할 심리적 장치를 깔아두는 것도 있을 법한 얘기다. 그렇게 오싹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웅덩이에 대한 나의 흥미는 더욱 강해졌다. - P141

벽 안에서 짐승들은 몇 가지 세세한 규칙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의 규칙이다. 언제 어떻게 그런 규칙이 확립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아가 규칙의 대다수는 존재 이유나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다. - P143

"무슨 소리지?"
"웅덩이의 물소리예요." 너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하지만 물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내 귀에는 무슨 질환을앓는 거대한 호흡기의 헐떡임으로만 들린다. - P144

"옛 사람들은 웅덩이 바닥에 거대한 용이 산다고 믿었어요" - P144

"봤죠? 바닥에 거센 소용돌이가 있어서 모든 것을 암흑 속으로 끌어들여요." - P146

"문지기 오두막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들었는데, 자네 그림자가 식욕이 통 없고 그나마 먹은 것도 다 토해버린다더군. 요 사흘쯤은 바깥 작업도 못 갔다고 하고. 자네를 만나고 싶어하는 모양이야." - P147

나는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림자는 천장을올려다보며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열이 나는지 말라붙은 입술에 군데군데 딱지가 앉았다. 숨쉴 때마다 목 안쪽에서 작게 색색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문득 그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는 틀림없는 나 자신의 일부였는데. - P148

"몸이 안 좋다고 들었어."
"안 좋네요." 그림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어디가 안 좋은데?"
"어디가 안 좋은 건 아닙니다. 수명이죠. 그림자 혼자서는 오래 살지 못한다고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본체에서 떨어진 그림자는 빈껍데기 같은 겁니다." - P148

"일주일 안에 마음을 정해주세요." 그림자는 말했다. "일주일 안이면, 나와 당신은 다시 하나가 되어 이 도시에서 나갈 수 있어요. 하나가 되면 나도 기운을 차리겠죠. 아직 늦지 않았어요." - P150

"이곳에서 나가는 건 허락되지 않을 거야. 도시에 들어올 때계약을 맺었으니까."
"압니다. 계약에 따르면 이 문으로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남쪽 웅덩이를 통해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죠. 강의 동쪽 입구는 쇠창살로 막혀 있어서 불가능해요. 남은 가능성은 웅덩이뿐입니다."
"남쪽 웅덩이는 바닥에 거센 소용돌이가 있어서 그대로 지하수로에 휩쓸려들어가. 얼마 전에 직접 보고 왔어. 거기로들어갔다가 살아서 밖으로 나가기란 불가능해" - P150

"그건 새빨간 거짓말일걸요. 놈들이 사람들을 겁주려고 지어낸 거라고요. 그 웅덩이를 통해 벽 밑을 빠져나가면 곧바로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게 내 추측이에요. 여기 있는 동안 나름대로 도시의 사정을 조금씩 알아봤어요. 이 오두막엔 간간이 사람들이 찾아오고 문지기도 보기보다 말이 많아서 여러 이야기가 귀에 들리거든요. 지하의 암흑 수로가 어쩌고 하는말은 써먹기 편하도록 지어낸 게 분명해요. 이곳은 온갖 가짜 이야기로 가득하죠. 이 도시로 말할 것 같으면 구성부터가 모순투성이고요." - P151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지도 모른다. 그림자의 말마따나 이 도시는 가짜 이야기로 가득할지도 모르고, 구성은 모순투성이일지도 모른다. 그건 결국 나와 너 둘이서 여름 한 철을들여 만든 상상 속 가상의 도시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도시는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는 이미 우리 손을 떠나 독자적으로 성장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그 힘을 나는 제어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 누구도 할 수 없다. - P151

"하나만 말씀드리죠. 당신은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그녀의 그림자고, 이 도시에 있는 것이 본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글쎄올시다. 실은 반대일지도 모르거든요. 어쩌면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진짜 그녀이고, 이곳에 있는 건 그림자인지도 몰라요. 만약 그렇다면 모순과 가짜이야기로 가득한 이 세계에 머무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은 확신합니까, 이 도시에 있는 그녀가 진짜라고?" - P152

"어디까지나 본체는 본체, 그림자는 그림자예요. 다만 어쩌다가 입장이 역전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죠. 인위적으로 뒤바꾸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고요." - P152

"당신은 나와 다시 한번 하나가 되어 벽 바깥의 세계로 돌아가야 해요. 내가 그저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고요. 들어보세요, 내가 보기엔 저쪽이야말로 진짜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고생하며 나이들고 쇠약해져 죽어가요. 물론 썩 재미있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그 과정을 이어가는 게 순리입니다. 나또한 미흡하게나마 그에 따르고 있고요. 시간은 멈출 수 없고, 죽은 것은 영원히 죽은 겁니다. 사라진 것은 영원히 사라진 겁니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 P153

"당신은 짐승들이 왜 그리 맥없이 픽픽 죽어간다고 생각해요?"
모르겠다고 나는 말했다. "그들은 온갖 것을 떠맡고 아무 말 없이 죽어갑니다. 아마도이곳 주민들을 대신해서요. 도시를 성립시키고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누군가가 그 역할을 떠맡아야 하죠. 그것을 저 불쌍한 짐승들이 짊어진 겁니다." - P154

"물론," 그림자는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좋습니다. 이 도시에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어요. 일주일 안에 어떻게 할지 결정해주세요." - P154

계절이 바뀌고 있어. 주위 풍경이 전과 다르게 보이고 공기의 감촉이 바뀌어가. 아마 나도 조금은 변하고 있겠지. 하지만 어디가 변했는지는 스스로 알 수 없어. 자신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마음을 거울에 비춰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P156

편지를 쓰지 못하면 더는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없으니까. 숨을 쉬지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 P156

벌써 일주일 넘게 그 누구하고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어. 내가 하는(혹은 하려고 하는) 모든 말이 내 의도와 다르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 느껴져. 그래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어. 절대 침묵을 목적으로 한 침묵이 아니야. 하지만 사실이 아닌(여기에 연필로 진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말을 꺼내면 나 자신이 산산이 부서져 보잘것없는 먼지 덩어리가 되어버릴것 같아. - P157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나의 대역에 기나지 않아. 진짜 나의 그림자 같은 존재ㅡ아니, 말 그대로 ‘그림자‘야. 그리고 본체와 떨어진 그림자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해.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한 건 매우 드문 경우야. 평범하지 않은 일이야. - P158

나는 세 살 때 본체와 떨어져 벽 바깥으로 쫓겨나 양부모 밑에서 자랐어. 돌아가신 어머니와 지금도 살아 있는 아버지는 나를 진짜 딸이라고 생각하지만(생각했지만), 물론 잘못된 환상이야. 나는 그저 먼 도시에서 바람에 실려온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이야. 그들은 그 사실을 몰라 (몰랐어). 그리고 나를 자신들의 진짜 자식이라고 믿었어. 누군가가 그렇게 믿게 한 거야. 요컨대 기억을 통째로 바꿔넣은 거지. 그러니까 내가 이 사실로 (내가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들은 상상도 못해. - P158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너를 만날 때까지, 내가 그저그림자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어. 이런얘기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머리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뿐일 테니까. 그러니까 너를 만난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특별한 사건이었지. 그렇게 기적 같은 일이 실제로 내 인생에 일어나리라곤 생각도 못했고, 솔직히 지금도 여전히 잘 믿기지 않아.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났어. - P159

하지만 부디 믿어줘. 내가 지난번에 공원 벤치에서 너에게한 말은 전부 사실이야.
나는 너의 것이야. 만약 네가 원한다면, 나의 모두를 너한테주고 싶어. 하나도 남김없이. 다만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할 뿐이야. 알아주면 좋겠어. - P160

나는 여러모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그때 말했지. 정확한표현은 잊어버렸지만 그런 말을 했던 건 기억해. 너는 기억하니?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지도 물라. 그래서 톡톡톡, 필사적으로 키를 두드리고 있어. 톡톡톡톡....… 어쩌면 통신문을 끝맺지 못할지도 몰라. 바닷물이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밀려들지도 몰라. 차갑고 심술궂고 자디짠, 지극히 치명적인 바닷물이. - P160

"잘 모르겠어. 지금 당장은 그림자와 떨어졌다고 딱히 곤란한 건 없어. 그래도 그림자를 영원히 잃는다면, 그와 함께 다른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ㅡ그런 기분이 들어." - P165

"그래서 당신 그림자가 뭔가를 요구하나요?"
"나와 다시 한번 하나가 되고 싶어해. 그러면 그림자는 원래의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어.
"하지만 그림자와 다시 하나가 되면, 당신은 이 도시에 머무를 수 없어요." - P165

"그렇다면 역시 그림자를 단념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요?"
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림자에겐 안된 일이지만, 당신은 이 도시에서 그림자 없는 생활에 익숙해질 거예요. 조금 있으면 그림자 생각도 잊을 거고요. 누구나 그런 것처럼." - P166

너의 눈동자에 비친 난롯불 빛이 반짝인다. 아니, 그건 난롯불이 아니라 네 안에 내재된 빛인지도 모른다. - P166

"걱정할 건 전혀 없어요." 너는 말한다. "당신은 이곳에 와서 주어진 일을 매우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걸요. 다들 감탄할정도로, 앞으로도 분명 잘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감탄할 정도로. - P166

"그래도 당신의 열성적인 조력이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면밀한 구축물이 완성되지 않았을걸요. 당신이 이 도시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상상력이라는 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해왔어요."
"분명 처음에 이 도시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 태어났을 거야.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스스로 의지와 목적을 갖게 된 것 같아." - P174

"이 도시는 구축물이라기보다 생명을 지니고 움직이는 생물처럼 보일 때가 있어. 유연하고 교묘한 생물이야. 상황에 맞춰 필요에 따라 그 모양을 바꿔나가지. 이곳에 온 뒤로 어렴풋이 느껴왔어." - P175

"그런데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꾼다면 생물보다 세포에 가깝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몰라."
사고하고, 방어하고, 공격하는 세포. - P175

"하지만 당신이 매일 오래된 꿈을 읽는 것이 도시에 무슨 의미인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 P176

"하지만 그 작업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야. 이 도시에서그것을 읽는 특별한 역할이 내게 주어졌고, 도시는 내가 그 작업을 계속하기를 강력히 원하잖아." - P176

그림자는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여기 있는 그녀가그림자고 벽 바깥에 있던 그녀가 본체였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전부터 그게 마음에 걸려서, 여기 오는 사람들의 얘기를듣고 조각조각 정보를 모아 나름대로 생각해봤어요. 그리고이런 가설을 세웠습니다. 실은 이곳이 그림자의 나라가 아닐까. 그림자들이 모여 이 고립된 도시 안에서 서로 도와가며 숨죽이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 P176

"하지만 네 말처럼 여기가 그림자들의 나라라면, 어째서 본체인 내가 도시에 들어가고 그림자인 너는 여기 갇혀 죽어가는 걸까? 반대라면 이해되지만."
"내 생각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림자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에요. 자신들이 본체고 벗겨져나간 그림자가 벽 바깥으로 쫓겨난다고 믿고 있죠.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가 아닐까, 벽 바깥으로 쫓겨난 것이 본체고, 여기 남은 이들이야말로 그림자가 아닐까ㅡ 그게 내 추측입니다." - P177

나는 그 말을 생각해봤다. "그리고 벽 바깥으로 추방된 본체들은 자신들이 그림자라고 믿고 있다. 그런 건가?"
"그렇죠. 제각기 가짜 기억을 주입당한 겁니다." - P177

"오래된 꿈이란, 이 도시가 성립하기 위해 벽 바깥으로 추방당한 본체가 남겨놓은 마음의 잔향 같은 것 아닐까요. 본체를 추방하더라도 송두리째 모조리 들어낼 순 없고, 아무래도 뒤에 남는 게 있어요. 그 잔재들을 모아 오래된 꿈이라는 특별한 용기에 단단히 가둔 겁니다." - P178

"마음의 잔향?"
"여기서는 아직 어릴 때 본체와 그림자를 떼어내죠. 그리고본체는 불필요한 것, 해로운 것으로 치부당해 벽 바깥으로 추방돼요. 그림자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설령 본체를 쫓아내도 그 영향이 말끔히 지워지진 않아요. 미처 제거하지 못한 마음의 작은 씨앗 같은 게 뒤에 남고, 그것이 그림자의 내부에서 은밀히 성장해가죠. 도시는 그것을 재빨리 찾아내서 긁어낸 뒤 전용 용기에 가둬버리는 겁니다." - P178

"마음의 씨앗?"
"그래요.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이죠.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랑. 이 도시에서 그런 감정은 무용한것. 오히려 해로운 것이죠. 이른바 역병의 씨앗 같은 겁니다."
"역병의 씨앗." 나는 그림자의 말을 되풀이했다.
"네. 그러니 남김없이 긁어내 밀폐용기에 담아서 도서관 깊숙이 넣어두는 거예요. 그리고 일반 주민의 접근을 금지하죠." - P178

"그럼 내 역할은?"
"아마 그 영혼을 혹은 마음의 잔항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는 일이겠죠. 그림자들이 할 수 없는 작업이에요. 공감이란 진짜 감정을 가진 진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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