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봤던 ‘나의 그림자‘가 상징하는 것과 오늘 봤던 ‘너의 그림자‘가 상징하는 것이 약간은 다르게 느껴졌다.

‘나의 그림자‘가 내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진 반면, 오늘 본 ‘너의 그림자‘는 한 사람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일종의 ‘페르소나‘ 같다고나 할까? 쉽게 말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작가가 ‘나와 너의 그림자‘ 를 통해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지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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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어나가다가 p.176~178에 ‘나‘와 ‘나의 그림자‘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읽으면서 ‘나의 그림자‘가 말하는 내용들이 너무나도 공감이 되어서 읽으면서 머릿속 뇌세포 전체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내 마음과 생각이 요동쳤다. 대화 내용의 일부분에 밑줄도 쳤는데, 내가 만약에 이 소설 속 ‘나의 그림자‘로 나왔어도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 같아서 어찌보면 비현실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정이 가는 캐릭터라고 느껴졌다.

"단각수는 그림자가 있어?"
"응, 짐승들은 그림자를 갖고 있어. 그 외 모든 것에도 그림자가 있어. 그림자가 없는 건 인간뿐이야." - P133

그 도시에 가면 나는 진짜 너를 가질 수 있다. 그곳에서 너는 아마 전부를 내게 줄 것이다. 나는 그 도시에서 너를 갖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리라. 그곳에선 너의 마음과 너의 몸이 하나가 되고, 유채기름 램프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나는 그런 너를 품에 꼭 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였다. - P134

"네 것이 되고 싶어"라고 너는 공원벤치에서 말했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
그 말이 그뒤로 계속 내 머릿속에 울리고 있다. 그것이 거짓이거나 과장이거나 일시적인 충동이 아님을 나는 안다. 네가 무슨 말을 꺼낸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특별한 잉크를 써서 특별한 종이에 적은 틀림없는 약속이다. - P135

아니, 네가 나를 간단히 잊을 리 없다. 내가 너를 잊을 리 없는 것처럼 그렇게 거듭 스스로를 타이른다. 나 자신을 납득시키려 한다. 그러나 여자에 대해, 그 심리나 생리에 대해 내가 무얼 얼마나 안단 말인가? 아니, 그런 일반론을 떠나 내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것이 대체 뭐란 말인가? - P136

"여러모로 시간이 걸려"라고 너는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주문처럼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는 양상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았다. 수시로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하루에 몇 번씩 벽걸이 달력을 쳐다보고, 때로는 역사연표까지 펼쳐보았다. 시간은 몹시 느릿느릿하게, 그래도 결코 뒷걸음치지 않고 내 안을 통과해 갔다. 일 분에 정확히 일 분씩, 한 시간에 정확히 한 시간씩. 느리게 나아갈지언정 거꾸로 가는 법은 없다. 그것이 그때 내가 몸으로 깨달은 사실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때로는 그 당연한 것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 P138

인간의 뇌가 좌우로 나뉜 것처럼 도시는 그 강에 의해 남북으로 거의 절반씩 나뉜다. - P139

강에는 이름이 없다. 그저 ‘강‘이다. 도시에 이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 P140

"멀찍이 서서 보기만 할 거야." 나는 너를 설득한다. "어떤건지 궁금해서 그래. 물가에만 가까이 가지 않으면 되잖아."
너는 작게 고개를 젓는다. "아뇨, 아무리 조심해도 그 물이사람을 불러들여요. 웅덩이에는 그런 힘이 있어요." - P141

그건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의도적으로 꾸며내 퍼뜨린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의심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벽 바깥의 세계를 두고 갖가지 무서운 소문이 나돌았지만 대부분 근거 없는 것들이었다. 웅덩이에 대한 이야기(불길한 전승)도 그런 유의 위협이 아닐까. 그 웅덩이는 어쨌거나 벽 바깥의 세계로 통하는 셈이고, 만약 벽 바깥으로 주민이 나가는 걸 도시가 원치 않는다면 접근을 단념케 할 심리적 장치를 깔아두는 것도 있을 법한 얘기다. 그렇게 오싹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웅덩이에 대한 나의 흥미는 더욱 강해졌다. - P141

벽 안에서 짐승들은 몇 가지 세세한 규칙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의 규칙이다. 언제 어떻게 그런 규칙이 확립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아가 규칙의 대다수는 존재 이유나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다. - P143

"무슨 소리지?"
"웅덩이의 물소리예요." 너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하지만 물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내 귀에는 무슨 질환을앓는 거대한 호흡기의 헐떡임으로만 들린다. - P144

"옛 사람들은 웅덩이 바닥에 거대한 용이 산다고 믿었어요" - P144

"봤죠? 바닥에 거센 소용돌이가 있어서 모든 것을 암흑 속으로 끌어들여요." - P146

"문지기 오두막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들었는데, 자네 그림자가 식욕이 통 없고 그나마 먹은 것도 다 토해버린다더군. 요 사흘쯤은 바깥 작업도 못 갔다고 하고. 자네를 만나고 싶어하는 모양이야." - P147

나는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림자는 천장을올려다보며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열이 나는지 말라붙은 입술에 군데군데 딱지가 앉았다. 숨쉴 때마다 목 안쪽에서 작게 색색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문득 그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는 틀림없는 나 자신의 일부였는데. - P148

"몸이 안 좋다고 들었어."
"안 좋네요." 그림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어디가 안 좋은데?"
"어디가 안 좋은 건 아닙니다. 수명이죠. 그림자 혼자서는 오래 살지 못한다고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본체에서 떨어진 그림자는 빈껍데기 같은 겁니다." - P148

"일주일 안에 마음을 정해주세요." 그림자는 말했다. "일주일 안이면, 나와 당신은 다시 하나가 되어 이 도시에서 나갈 수 있어요. 하나가 되면 나도 기운을 차리겠죠. 아직 늦지 않았어요." - P150

"이곳에서 나가는 건 허락되지 않을 거야. 도시에 들어올 때계약을 맺었으니까."
"압니다. 계약에 따르면 이 문으로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남쪽 웅덩이를 통해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죠. 강의 동쪽 입구는 쇠창살로 막혀 있어서 불가능해요. 남은 가능성은 웅덩이뿐입니다."
"남쪽 웅덩이는 바닥에 거센 소용돌이가 있어서 그대로 지하수로에 휩쓸려들어가. 얼마 전에 직접 보고 왔어. 거기로들어갔다가 살아서 밖으로 나가기란 불가능해" - P150

"그건 새빨간 거짓말일걸요. 놈들이 사람들을 겁주려고 지어낸 거라고요. 그 웅덩이를 통해 벽 밑을 빠져나가면 곧바로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게 내 추측이에요. 여기 있는 동안 나름대로 도시의 사정을 조금씩 알아봤어요. 이 오두막엔 간간이 사람들이 찾아오고 문지기도 보기보다 말이 많아서 여러 이야기가 귀에 들리거든요. 지하의 암흑 수로가 어쩌고 하는말은 써먹기 편하도록 지어낸 게 분명해요. 이곳은 온갖 가짜 이야기로 가득하죠. 이 도시로 말할 것 같으면 구성부터가 모순투성이고요." - P151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지도 모른다. 그림자의 말마따나 이 도시는 가짜 이야기로 가득할지도 모르고, 구성은 모순투성이일지도 모른다. 그건 결국 나와 너 둘이서 여름 한 철을들여 만든 상상 속 가상의 도시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도시는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는 이미 우리 손을 떠나 독자적으로 성장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그 힘을 나는 제어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 누구도 할 수 없다. - P151

"하나만 말씀드리죠. 당신은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그녀의 그림자고, 이 도시에 있는 것이 본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글쎄올시다. 실은 반대일지도 모르거든요. 어쩌면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진짜 그녀이고, 이곳에 있는 건 그림자인지도 몰라요. 만약 그렇다면 모순과 가짜이야기로 가득한 이 세계에 머무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은 확신합니까, 이 도시에 있는 그녀가 진짜라고?" - P152

"어디까지나 본체는 본체, 그림자는 그림자예요. 다만 어쩌다가 입장이 역전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죠. 인위적으로 뒤바꾸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고요." - P152

"당신은 나와 다시 한번 하나가 되어 벽 바깥의 세계로 돌아가야 해요. 내가 그저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고요. 들어보세요, 내가 보기엔 저쪽이야말로 진짜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고생하며 나이들고 쇠약해져 죽어가요. 물론 썩 재미있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그 과정을 이어가는 게 순리입니다. 나또한 미흡하게나마 그에 따르고 있고요. 시간은 멈출 수 없고, 죽은 것은 영원히 죽은 겁니다. 사라진 것은 영원히 사라진 겁니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 P153

"당신은 짐승들이 왜 그리 맥없이 픽픽 죽어간다고 생각해요?"
모르겠다고 나는 말했다. "그들은 온갖 것을 떠맡고 아무 말 없이 죽어갑니다. 아마도이곳 주민들을 대신해서요. 도시를 성립시키고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누군가가 그 역할을 떠맡아야 하죠. 그것을 저 불쌍한 짐승들이 짊어진 겁니다." - P154

"물론," 그림자는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좋습니다. 이 도시에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어요. 일주일 안에 어떻게 할지 결정해주세요." - P154

계절이 바뀌고 있어. 주위 풍경이 전과 다르게 보이고 공기의 감촉이 바뀌어가. 아마 나도 조금은 변하고 있겠지. 하지만 어디가 변했는지는 스스로 알 수 없어. 자신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마음을 거울에 비춰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P156

편지를 쓰지 못하면 더는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없으니까. 숨을 쉬지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 P156

벌써 일주일 넘게 그 누구하고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어. 내가 하는(혹은 하려고 하는) 모든 말이 내 의도와 다르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 느껴져. 그래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어. 절대 침묵을 목적으로 한 침묵이 아니야. 하지만 사실이 아닌(여기에 연필로 진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말을 꺼내면 나 자신이 산산이 부서져 보잘것없는 먼지 덩어리가 되어버릴것 같아. - P157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나의 대역에 기나지 않아. 진짜 나의 그림자 같은 존재ㅡ아니, 말 그대로 ‘그림자‘야. 그리고 본체와 떨어진 그림자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해.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한 건 매우 드문 경우야. 평범하지 않은 일이야. - P158

나는 세 살 때 본체와 떨어져 벽 바깥으로 쫓겨나 양부모 밑에서 자랐어. 돌아가신 어머니와 지금도 살아 있는 아버지는 나를 진짜 딸이라고 생각하지만(생각했지만), 물론 잘못된 환상이야. 나는 그저 먼 도시에서 바람에 실려온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이야. 그들은 그 사실을 몰라 (몰랐어). 그리고 나를 자신들의 진짜 자식이라고 믿었어. 누군가가 그렇게 믿게 한 거야. 요컨대 기억을 통째로 바꿔넣은 거지. 그러니까 내가 이 사실로 (내가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들은 상상도 못해. - P158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너를 만날 때까지, 내가 그저그림자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어. 이런얘기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머리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뿐일 테니까. 그러니까 너를 만난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특별한 사건이었지. 그렇게 기적 같은 일이 실제로 내 인생에 일어나리라곤 생각도 못했고, 솔직히 지금도 여전히 잘 믿기지 않아.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났어. - P159

하지만 부디 믿어줘. 내가 지난번에 공원 벤치에서 너에게한 말은 전부 사실이야.
나는 너의 것이야. 만약 네가 원한다면, 나의 모두를 너한테주고 싶어. 하나도 남김없이. 다만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할 뿐이야. 알아주면 좋겠어. - P160

나는 여러모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그때 말했지. 정확한표현은 잊어버렸지만 그런 말을 했던 건 기억해. 너는 기억하니?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지도 물라. 그래서 톡톡톡, 필사적으로 키를 두드리고 있어. 톡톡톡톡....… 어쩌면 통신문을 끝맺지 못할지도 몰라. 바닷물이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밀려들지도 몰라. 차갑고 심술궂고 자디짠, 지극히 치명적인 바닷물이. - P160

"잘 모르겠어. 지금 당장은 그림자와 떨어졌다고 딱히 곤란한 건 없어. 그래도 그림자를 영원히 잃는다면, 그와 함께 다른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ㅡ그런 기분이 들어." - P165

"그래서 당신 그림자가 뭔가를 요구하나요?"
"나와 다시 한번 하나가 되고 싶어해. 그러면 그림자는 원래의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어.
"하지만 그림자와 다시 하나가 되면, 당신은 이 도시에 머무를 수 없어요." - P165

"그렇다면 역시 그림자를 단념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요?"
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림자에겐 안된 일이지만, 당신은 이 도시에서 그림자 없는 생활에 익숙해질 거예요. 조금 있으면 그림자 생각도 잊을 거고요. 누구나 그런 것처럼." - P166

너의 눈동자에 비친 난롯불 빛이 반짝인다. 아니, 그건 난롯불이 아니라 네 안에 내재된 빛인지도 모른다. - P166

"걱정할 건 전혀 없어요." 너는 말한다. "당신은 이곳에 와서 주어진 일을 매우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걸요. 다들 감탄할정도로, 앞으로도 분명 잘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감탄할 정도로. - P166

"그래도 당신의 열성적인 조력이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면밀한 구축물이 완성되지 않았을걸요. 당신이 이 도시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상상력이라는 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해왔어요."
"분명 처음에 이 도시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 태어났을 거야.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스스로 의지와 목적을 갖게 된 것 같아." - P174

"이 도시는 구축물이라기보다 생명을 지니고 움직이는 생물처럼 보일 때가 있어. 유연하고 교묘한 생물이야. 상황에 맞춰 필요에 따라 그 모양을 바꿔나가지. 이곳에 온 뒤로 어렴풋이 느껴왔어." - P175

"그런데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꾼다면 생물보다 세포에 가깝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몰라."
사고하고, 방어하고, 공격하는 세포. - P175

"하지만 당신이 매일 오래된 꿈을 읽는 것이 도시에 무슨 의미인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 P176

"하지만 그 작업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야. 이 도시에서그것을 읽는 특별한 역할이 내게 주어졌고, 도시는 내가 그 작업을 계속하기를 강력히 원하잖아." - P176

그림자는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여기 있는 그녀가그림자고 벽 바깥에 있던 그녀가 본체였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전부터 그게 마음에 걸려서, 여기 오는 사람들의 얘기를듣고 조각조각 정보를 모아 나름대로 생각해봤어요. 그리고이런 가설을 세웠습니다. 실은 이곳이 그림자의 나라가 아닐까. 그림자들이 모여 이 고립된 도시 안에서 서로 도와가며 숨죽이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 P176

"하지만 네 말처럼 여기가 그림자들의 나라라면, 어째서 본체인 내가 도시에 들어가고 그림자인 너는 여기 갇혀 죽어가는 걸까? 반대라면 이해되지만."
"내 생각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림자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에요. 자신들이 본체고 벗겨져나간 그림자가 벽 바깥으로 쫓겨난다고 믿고 있죠.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가 아닐까, 벽 바깥으로 쫓겨난 것이 본체고, 여기 남은 이들이야말로 그림자가 아닐까ㅡ 그게 내 추측입니다." - P177

나는 그 말을 생각해봤다. "그리고 벽 바깥으로 추방된 본체들은 자신들이 그림자라고 믿고 있다. 그런 건가?"
"그렇죠. 제각기 가짜 기억을 주입당한 겁니다." - P177

"오래된 꿈이란, 이 도시가 성립하기 위해 벽 바깥으로 추방당한 본체가 남겨놓은 마음의 잔향 같은 것 아닐까요. 본체를 추방하더라도 송두리째 모조리 들어낼 순 없고, 아무래도 뒤에 남는 게 있어요. 그 잔재들을 모아 오래된 꿈이라는 특별한 용기에 단단히 가둔 겁니다." - P178

"마음의 잔향?"
"여기서는 아직 어릴 때 본체와 그림자를 떼어내죠. 그리고본체는 불필요한 것, 해로운 것으로 치부당해 벽 바깥으로 추방돼요. 그림자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설령 본체를 쫓아내도 그 영향이 말끔히 지워지진 않아요. 미처 제거하지 못한 마음의 작은 씨앗 같은 게 뒤에 남고, 그것이 그림자의 내부에서 은밀히 성장해가죠. 도시는 그것을 재빨리 찾아내서 긁어낸 뒤 전용 용기에 가둬버리는 겁니다." - P178

"마음의 씨앗?"
"그래요.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이죠.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랑. 이 도시에서 그런 감정은 무용한것. 오히려 해로운 것이죠. 이른바 역병의 씨앗 같은 겁니다."
"역병의 씨앗." 나는 그림자의 말을 되풀이했다.
"네. 그러니 남김없이 긁어내 밀폐용기에 담아서 도서관 깊숙이 넣어두는 거예요. 그리고 일반 주민의 접근을 금지하죠." - P178

"그럼 내 역할은?"
"아마 그 영혼을 혹은 마음의 잔항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는 일이겠죠. 그림자들이 할 수 없는 작업이에요. 공감이란 진짜 감정을 가진 진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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