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그걸 굳이 가라앉혀야 하지? 밀폐용기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면 그대로 둬도 될 것 같은데." "아무리 단단히 갇혀 있어도 존재 자체가 위협이니까요. 그것들이 어떤 계기로 힘을 얻어 일제히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ㅡ그게 이 도시의 잠재적 공포가 아닐까요. 만약 그런 사태가 빚어지면 도시는 순식간에 와해될테죠.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고 싶은 겁니다. 누군가가 오래된 꿈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꿈을 같이 꿔줌으로써 잠재된 열량이 달래진다ㅡ그들은 아마 그런걸 원하는 거겠죠.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당신 한 사람뿐이에요." - P179
어느 세계에 속해야 할까? 나는 아직 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 P180
이 세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이 은밀히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길모퉁이에는 생각지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 P182
나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어째서 이곳에 있고,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어째서 이곳에는늘 이렇게 세찬 바람이 불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묻는다. 물론 대답은 없다. - P184
오래된 꿈ㅡ그것은 내 그림자가 추측하듯 긁어내어져 밀폐보존된 사람들 마음의 잔재일까? 나로서는 그 가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내가 보는 한 눈앞에 있는 건 병조림처럼 가둬진 ‘혼돈의 소우주‘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란 이토록 불명료하고 일관성이 결여된 것인가? 혹은 오래된 꿈이 이처럼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메시지밖에 내보낼 수 없는 건, 그것이 결속된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남은 부스러기‘를 모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까? - P186
내 꿈에 나왔던 하사관은 메마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때로는 의식을 죽이는 게 가장 편한 길로 여겨지니까요." - P186
"벽 바깥의 세계에서, 아주 오래전에 너를 만난 적 있어." 너는 걸음을 멈추고 초록색 머플러를 목에 단단히 고쳐 맨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본다. "나를요?" "또다른 너ㅡ즉 벽 바깥에 있는 너를." "내 그림자를 말하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아." "내 그림자는 한참 옛날에 죽었어요." 너는 말한다. 오늘밤은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선언했을 때처럼 단호하게. 너의 그림자는 한참 옛날에 죽었다, 나는 그 말을 속으로 되된다. 동굴에 울리는 메아리처럼. - P187
나는 묻는다. "그림자들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너는 고개를 젓는다. "몰라요. 내게는 도서관 일이 주어졌고, 그 역할을 다할 뿐이에요. 매일 도서관 문을 열고, 추운 계절에는 난로에 불을 피우고, 약초를 따서 차를 만들고………… 그렇게 당신 일을 도우면서요." - P188
"당신은 벽 바깥의 세계에서 내 그림자를 좋아했다. 그곳에서그녀는 열다섯 살이었다"라고 너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해불가능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하듯이. - P188
나는 말한다. "나는 그녀를 간절히 원했고, 마찬가지로 그녀도 나를 원해주길 바랐어. 그런데 일년 후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사라져버렸어. 예고도 없이, 설명다운 설명도 없이." 너는 다시 한번 초록색 머플러를 가느다란 목덜미에 고쳐맨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어쩔 수 없죠. 그림자는 언젠가 죽기 마련이니까." - P189
"그녀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서 이 도시에 왔어. 여기 오면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동시에 너도 만나고 싶었어. 그것도 내가 벽 안쪽으로 들어온 이유 중 하나야." "나를요?" 너는 미심쩍은 듯한 얼굴로 말한다. "어째서죠? 왜 나를 만나고 싶었어요? 나는 당신이 좋아했던 열다섯 살 소녀가 아니에요. 우리가 원래 하나였는지 몰라도 어릴 적에 떨어져 벽 안과 바깥으로 갈라졌고 서로 다른 존재가 됐어요.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산속 맑은 샘의 밑바닥을 살피듯이, 그리고 말한다. "너는 그녀가 아니야 잘 알고 있어. 여기서 너는 꿈을 꾸지 않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도 없지." - P189
아아,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 라고. 이대로 살면 몸도 마음도 닳고 해져서 혹시 언젠가 네가 나에게 돌아와도 온전히 받아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 사태만은 피해야 한다. - P191
누군가를 위한 비밀 공간을 확보해둔 채 다른 사람과 연인관계가 된다―그런 게 가능할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어가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그 결과나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더욱 고독해진다. - P192
독신 생활에는 규칙성을 중시하는 것이 제일이다ㅡ규칙성과 단조로움 사이에 선을 긋기가 가끔 어렵다 해도. - P194
삼십대가 끝나고 마흔 살 생일을 맞았을 때는 어쩔 수 없이작은 동요가 일었다. 결국 누구와도 맺어지지 않고 이대로 평생을 외톨이로 보내는 걸까? 앞으로 나는 착실히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그리고 더욱 고독해질 것이다. 이윽고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신체 능력도 점점 약해진다. 지금껏 별생각없이 간단히 해왔던 일들이 쉽지 않아질 것이다. 그런 미래의 내 모습을 아직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으리란 건 쉽게 상상이 된다. - P194
마흔 살……… 생각해보면 나는 열일곱 살 때부터 벌써 이십삼 년에 걸쳐 너를 기다리는 셈이다. 그사이 너에게선 전혀 연락이 없다. 침묵과 무는 변함없이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이제는 그들의 존재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이미 나의 일부다. 침묵과 무..... 그들을 빼고서는 나라는 인간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 P195
그렇게 마흔 살 생일을 별일 없이(누구의 축하도 없이) 통과한다. 회사 일은 안정적이다. 직급도 그럭저럭 올라갔고 수입도 부족하지 않다(사실 무언가를 열렬히 갖고 싶어할 때가 거의 없다). 고향의 연로한 부모님은 내가 결혼해서 자식을 갖기를 간절히 바란다.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내게 그런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 P195
변함없이 너를 생각한다. 마음속 깊은 곳, 작은 방에 들어가너의 기억을 더듬는다. 너에게서 받은 편지 다발, 손수건 한장, 그리고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면밀하게 기록한 공책. 나는 작은 방 안에서 그것들을 집어들고 하염없이 쓰다듬고 바라본다(마치 열일곱 살 소년처럼). 그 방에는 내 인생의 비밀이 담겨 있다. 아무도 모르는 나에 대한 비밀이다. 오직 너만이 그곳에 있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 하지만 너는 없다.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길은 없다. - P195
"결심이 선 거죠?" 그림자가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지금 같이 이곳에서 나가자." - P199
그들이 어딘가에 알릴까? ‘꿈 읽는 이‘가 그림자와 다시 한몸이 되어 도시에서 도망치려 한다고. 혹은 그런 건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일까? - P201
그림자를 업고 남쪽 언덕의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기는 쉽게않았다. 그러나 일단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다. 도중에 약한 소리를 할 순 없다. 더욱이 그림자의 말마따나 도시는 마음먹으면 한도 끝도 없이 위험해질 수 있다. 나는 코트 아래로 땀을 흘리면서 쉬지 않고 비탈길을 올랐다. 어찌어찌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는 두 다리가 돌처럼 딱딱해지고 종아리가 덜덜 떨렸다. - P202
그림자는 설명했다. "뿔피리를 불면 그 소리를 듣고 짐승들이 이 문으로 몰려오죠. 그러면 문지기는 문을 열어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야 해요. 짐승들이 전부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문을 닫아요. 그게 규칙으로 정해진 그의 임무입니다. 짐승들을 남김없이 밖으로 내보내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요. 그만큼 우리는 시간을 벌 수 있는 거죠." 나는 감탄해서 그림자를 보았다. "머리를 쓸 줄 아는구나." - P204
"그거 알아요? 이 도시는 완전하지 않아요. 벽 역시 완전하지 않고요. 완전한 것 따위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요. 어떤 것에나 반드시 약점이 있고, 이 도시의 약점 중 하나는 저 짐승들이에요. 그들을 아침저녁으로 출입시킴으로써 도시는 균형을 유지하죠. 우리는 방금 그 밸런스를 무너뜨린 겁니다." "분명 도시가 화를 낼 테지." "아마도." 그림자는 말했다. "만약 도시에 감정 같은 것이 있다면요." - P204
"이만큼 왔으면 괜찮겠죠." 그림자가 뒤에서 말했다. "저 덤불을 가로지르면 바로 웅덩이가 나와요. 이제 문지기가 따라잡지 못해요." 나는 그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어찌어찌 잘 헤쳐온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우리 눈앞에 벽이 우뚝치솟았다. - P205
벽은 아무런 전조 없이 순식간에 우리 앞에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다. 그 높고 견고한 도시의 벽이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삼켰다. 왜 이런 곳에 벽이 있지? 지난번 이 길에 왔을 때는 물론 이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말을 잃고 그저 높이 8미터의 그 장벽을 올려다보았다. [놀랄 것 없다.] 벽은 묵직한 목소리로 내게 알렸다. [네가 만든 지도 따위는 아무 쓸모 없다. 종잇조각에 그려진 한낱 선일 뿐이지.] - P205
벽은 자유자재로 모양과 위치를 바꿀 수 있다. 나는 그걸 깨달았다. 언제든 마음대로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벽은 우리를 바깥에 내보내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 P206
"들으면 안 돼요." 그림자가 등뒤에서 속삭였다. "보는 것도안 됩니다. 그저 환영이에요. 도시가 우리에게 환영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을 감고 이대로 돌파하는 겁니다. 상대의 말을 믿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으면, 벽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그림자의 말대로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전진했다. - P206
벽은 말했다. [너희는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무슨 짓을 하든 결과는 똑같아.] "듣지 마요." 그림자가 말했다. "두려워해선 안 돼요. 앞을 향해 달리는 겁니다. 의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믿고." [그래, 달리거라], 벽이 말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얼마든지 멀리 달려가려무나. 나는 언제나 거기 있을 테니.] - P206
벽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똑바로 달려 그 앞에 있을 벽으로 돌진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림자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 의심을 버리고 나 자신의 마음을 믿었다. 그리고 나와 그림자는 단단한 벽돌로 이뤄져 있을 두꺼운 벽을 반쯤 헤엄치다시피 통과했다. - P207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물컹거리는 장해물을 돌파했다. "내가 뭐랬습니까." 그림자가 귓가에서 말했다. "전부 환영이에요." - P207
머릿속에서 현실과 비현실이 격렬히 싸우며 뒤엉켰다. 나는바야흐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경계에 와 있다. 이곳은 의식과 비의식의 얇은 접면이고, 나는 어느 세계에 속해야 할지 지금 바로 선택해야 한다. - P209
그림자는 말했다. "이 웅덩이는 벽 바깥의 세계로 곧장 이어져요. 밑바닥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벽 아래를 헤엄쳐 빠져나가면 바깥세계로 나갈 수 있습니다." "웅덩이는 석회암 땅 밑의 수로와 이어져서, 동굴에 빨려들어간 자는 예외 없이 그 암흑 속에서 익사한다고 해." - P209
"그건 사람들을 겁주려고 도시가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지하 미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 P210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느니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웅덩이를 높은 담이나 울타리로 둘러싸버리는 편이 손쉬울 텐데, 굳이 공들여 거짓말을 꾸미는 것보다." 그림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머리를 쓴 거예요. 도시는이 웅덩이 주위에 공포라는 심리적 울타리를 엄중하게 둘러쳐됐지요. 담이나 울타리보다 훨씬 효과적이에요. 한번 공포가 마음에 뿌리내리면 그걸 극복하기란 간단하지 않으니까." - P210
"너는 어째서 그토록 확신하지?" 그림자는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도시는 구성부터 많은 모순을 안고 있어요. 도시를 존속시키려면 그 모순점을 원만하게 해소해야 하죠. 그러기 위해 몇 가지 장치가 만들어져 제도로 기능하고요. 공들인 시스템이에요." - P210
"장치 중 하나는 불쌍한 짐승들입니다. 짐승들을 날마다 문으로 드나들게 함으로써, 또한 계절에 맞춰 번식시키고 도태시킴으로써 도시는 잠재적인 에너지를 밖으로 방출해 처리하는 거예요. 당신이 도서관에서 했던 꿈 읽기 일도 장치 중 하나입니다. 오래된 꿈으로 집적된 정신의 조각이 그 작업에 의해 승화되어 허공으로 사라지지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도시가 대단히 기교적이고 인공적인 장소란 겁니다. 모든 존재의 균형이 정묘하게 지켜지고, 그걸 유지하기 위한 장치가 빈틈없이 움직이고 있어요." - P211
"그리고 그 밸런스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도시는 공포심을 이용한다. 그 말인가?" "바로 그겁니다. 도시는 남쪽 웅덩이가 위험한 장소라는 정보를 사람들 머릿속에 심었어요. 도시 주민이 벽 바깥으로 나갈 수단은 이 웅덩이가 유일하니까요. 북문에선 문지기가 눈을 번득이고 있고, 동문은 폐쇄되었고, 강 입구는 튼튼한 쇠창살로 막혀 있어요. 벽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인간이 이 도시에 그리 많진 않겠지만, 그래도 도시는 탈출 가능성을 봉쇄하려는 겁니다." - P211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다행히당신은 아직 영혼을 빼앗기지 않았어요. 우리는 여기서 하나가 되어 웅덩이를 빠져나가 바깥세계로 돌아갈 겁니다." 귓속에서 조금 전에 들은 벽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드높은 웃음소리. - P211
"물론 무섭습니다. 생각만 해도 오싹해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마음먹었잖아요. 애당초 이 도시를 만들어낸 건 당신 아닙니까. 당신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어요. 실제로 조금 전 눈앞에 우뚝 선 단단한 벽을 무사히 통과했고요. 그렇죠? 중요한건 공포를 이겨내는 겁니다. 게다가 수영은 당신 특기 아니던가요. 숨도 오랫동안 참을 줄 알고." - P212
"그렇지만 너는? 수영할 줄 알아?" 그림자는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양손을 펼쳤다. "난처하네보세요. 난 당신 그림자예요. 당신이 헤엄칠 때 나도 옆에서똑같이 헤엄쳤다고요. 같은 페이스로 같은 거리를. 못할 리가 없잖아요." - P212
"설득력 있는 주장이야." 나는 그림자에게 말했다. 그림자는 그 말을 듣고 힘없이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영광이네요. 하지만 어찌 보면 이건 당신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기도 해요. 뭐니 뭐니 해도 나는 당신의 그림자니까." - P212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잠시 침묵했다. 다시 한번 두꺼운 눈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림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똑바로 보았다. 결심을 굳힌 뒤 큰맘먹고 말했다. "그래도 나는 이 도시를 나갈 수 없어. 미안하지만 너 혼자가줘." - P213
"신중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겠죠?" 그가 말했다. "막상 뛰어들자니 무서워서, 뭐 그런 이유는 아니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무섭진 않아. 조금 전까진분명 공포를 느꼈지만 지금은 아니야. 네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 진실일 거야. 마음먹으면 우리가 함께 이 벽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P215
"그래도 역시 당신은 이곳에 남겠다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죠?" "우선 첫째,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의미를 도저히 찾을 수없어. 나는 그 세계에서 더더욱 고독해질 테지.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깊은 어둠에 직면할 거야. 내가 그 세계에서 행복해지기는 불가능에 가까워. 물론 이 도시도 완전한 장소라고는 할수 없어. 네가 지적했듯 이 도시는 수많은 모순을 안고 성립되어 있어. 그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아귀를 맞추기 위해 여러가지 복잡한 조작이 이뤄지고 있고. 그리고 영원이라는 건 긴시간이야. 그사이 한 개체로서의 내 의식이 점점 엷어지고, 나라는 존재가 이 도시에 삼켜질지도 몰라. 하지만 설령 그렇다해도 괜찮아. 이곳에서 나는 적어도 고독하진 않아. 이 도시에서 내가 당장 무엇을 하면 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걸알고 있으니까." - P215
"그래도 그것이 당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 중 하나다." - P216
"아니면 바깥세계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나의 대역 노릇을할 수 있을지도 몰라. 보아하니 네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고지혜도 충분해. 그러다보면 어느 쪽이 그림자고 어느 쪽이 본체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르지." - P216
"우린 아무래도 가설에 가설을 더하고 있는 것 같네요. 뭐가가설이고 뭐가 사실인지, 점점 구별하기 힘들어져요." "그런지도 몰라. 하지만 무언가가 필요해. 행동을 결단하는데 필요한, 기댈 수 있는 기둥 같은 것이." - P216
"솔직히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 자신이 어느 쪽을 선택할지확실히 몰랐어. 이 웅덩이 앞에 직접 와서 설 때까지는." 나는 말했다. "하지만 이젠 마음을 정했고, 결심이 흔들릴 일은 없어ㅡ나는 혼자 이 도시에 남겠어. 너는 여기서 나갈 테고." - P217
그림자는 오른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잡았다. 자기 그림자와 악수하다니 왠지 묘했다. 자기 그림자가 평험한 악력과 체온을 지니고 있다니 그 또한 묘했다. 그는 정말로 내 그림자일까? 나는 진짜 나일까? 그림자의말처럼, 무엇이 가설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점점 구별하기 힘들어진다. - P217
소리 없는 어둠이 방을 감싸기 시작할 때, 나는 모자를 깊이눌러쓰고 코트 깃을 세운 뒤 강변길을 걸어 도서관으로 향했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우산은 쓰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가야 할 곳이 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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