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삶을 다시 한번
도다 세이지 지음, 조은하 옮김 / 애니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추석 특선 영화로 어제 EBS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를 보았습니다. '드니 뵐뇌브'의 최신판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개봉을 앞둔 시점이라 참고 할겸 시청했는데요. 개봉 당시에는 성공한 망작이란 이상야릇한 말로 구설수에 올랐고, 시대를 앞서간 영화는 보기 좋게 흥행에 참패합니다.  그러나 꾸준하게 자신의 세계관을 쌓아간 '리들리 스콧' 감독은 현재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기획을 맡아 관객에게 돌아왔습니다.

 

 

이렇듯 시대를 앞서간  작품들은 현시점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채 후에 재평가 받는 경우가 많은데요. 일본 인디 만화의 새로운 물결을 이끈  '도다 세이지'도 비슷한 반향을 만드는 작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삶을 다시 한번》은 2003년 도다 세이지가 홈페이지에 올린 작품을 모아 만든 만화집인데요. 만화라는 장르, 그것도 단편이란 제약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인생을 담아낼까라는 약간의 기우가 있었지만. 직유와 언어를 넘나드는 그만의 표현력은 컷과 컷 사이의 프레임 속에서도 강한 임팩트를 갖습니다.

 


까도 까도 계속 속이 나오는 양파. 한 겹이 나이 한 살을 뜻하지만 실체가 없는 그런 것.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이 양파와도 닮았으니까요. 결국 실체를 알고 싶어  탐미하고 파고들지만 없어져 버리는 무(無)의 영역에 다다르는 허무.   당신의 인생을 그려보라고 하면 선뜻 떠올리지 쉽지 않다는 것만 봐도 말입니다.


 

책 속의 단편들은 너무나 익숙해져 뜻을 생각해보는 것조차 어색한 '애인'이나 '가족', '인생'이란 단어를 고민하게 합니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니 억지로 사랑할 필요가 없지만 이해하고 노력한 결과 조금씩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아가는 가족처럼. 애인 또한 사전에서 단어를 찾아 볼 만큼 익숙한 말 같지만,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가변성을 갖는 것처럼 말입니다.


「꽃」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커온 주인공이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만화가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는 과정입니다. 무작정해보고 싶은 일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스물여덟에 시작한 만화 어시스턴트 일. 일하면서 점점 깨닫는 것은 창작이란 건 사실 마음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의 특권이란 생각이 드는 겁니다.  만화가는 그림을 그려야만 치유되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직업은 아닐까요? 마치 계시를 받은 무당이 신의 선택을 거부해서 아픈 것과 같이 말이죠.

주인공은 본격적으로 손에 놓았던 만화를 그려보고자 하지만, 여전히 부족함 투성이인 자신을 그렇게 타이르고 있었건 거지요.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이 좋은 작품을 쓰는 일은 힘들 거란 말, 본격적인 작가의 평가 대신 주인공은 화분을 받습니다. 그 후 정말 소중하게 돌보지만 어째 꽃을 피울 기미는 보이지 않네요.

 


그러던 중 갑자기 작가는 입원을 하게 되고, 병세가 악화된 작가를 도와 만화를 그리던 주인공은 죽음에 압도되는 삶의 의지 그 이상의 것을 보게 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통해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숭고한 과정. 그림에 목숨 걸고 매달려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냥 원 없이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인간만의 고유 의지는 모두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이는 자연의 법칙과 유사합니다. 사실 꽃은 척박한 조건에서 마지막 발악같이 꽃을 피운다는 것을요. 그렇게 작가를 돕느라 신경을 전혀 쓰지 못했던 사이,  꽃은 눈이 시릴 정도로 새빨간 꽃을 피워 놓고 있었습니다. 자손을 남기기 위해 영양분이 고갈된 상태에서 죽어가면서도 피웠던 한 떨기 꽃.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본능이 아닌 자유의지, 고매한 정신, 지적 유희를 이루기 위해 참고 노력하는 것과 많이 닮았죠.


어떤 책에서 읽었던 격언이 갑자기 생각납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다'. 이 말을 본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듯,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누군가에 의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수치스러운 일이 되기도 하는 거겠죠. 어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허투루 살 수 없는 게 인생임을 또 한번 알아갑니다.

《이 삶을 다시 한번》에 담긴 서른 편의 단편은  도다 세이지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하는 작품입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는 누구인가? 가족, 결혼, 연인, 이혼, 친구, 삶, 죽음 등 궁금한 것 투성이인 삶을 총망라한 집약체입니다. 긴 연휴는 우리의 삶을 점검해보고 사색하기 좋은 날입니다. 세상이 바라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고 해도 당신의 인생은 그것 자체로 소중한 것입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혹은 오롯이 홀로 인생을 반추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요?

《이 삶을 다시 한번》는 《몇 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를 새롭게 번역하여 재출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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