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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의 장르를 뭐라고 규정해야 할까요? 범죄소설, 사회소설, 페미니즘 소설 등등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대만의 소설가 '핑루'는 그동안 꾸준히 대만 사회를 소재로 소설을 써 내려간 작가인데요. 실제 사건이나 유명인과 관련된 기사를 소설로 재구성하는데 탁월하다는 점은 '김별아' 작가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검은강》은 그동안 유명한 역사 속 인물이 아닌, 실제 범죄를 저지른 언론에 의해 '사갈녀(뱀과 전갈처럼 남에게 해를 가하는 여자를 비유한 말)' 꼬리표가 붙은 여성과 피해 여성의 심리를 세밀하게 담습니다. 어떤 사건을 접할 때 한쪽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게 아닌, 마치 재판장의 판사가 된 것처럼 양쪽 이야기 모두를 들어보게 하는 다중 시점을 택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판단을 넘기고 있죠. 소설 속 가해자 '자전'의 속마음과 피해자 '훙타이'의 속마음을 교차해서 보여줌과 동시에 챕터마다 언론, 주변인, 네티즌, 가족, 판사, 검사 등 다양한 입장의 여론을 끼어 넣어 다양한 시점을 제시하죠.
"자전의 내면 깊숙이 깔려 있는 그 혼란한 마음을 건드리면 아저씨든 훙보든, 그가 무엇을 하든 그녀는 순순히 허락했다. "
P147
이로써 독자는 범죄를 저지른 주인공 '자전'의 불우한 어린 시절부터 카페의 점장이 되기까지.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상처뿐인 과거 때문에 어떻게 또 다른 범죄에 빠지게 되었는지 세세히 따라가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은 어머니의 잦은 심리적 학대 속에 자신도 모르는 새 비정상적인 사랑을 배웁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회에 속하지 못한 채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돈에 대한 탐욕과 집착은 자전의 삶을 조금씩 좀먹고 있었던 거죠.
한편, 또 다른 화자인 '훙타이'는 남부러울 것 없이 직업적 성공을 거둔 전문직 교수였지만 나이 많은 남자 훙보와 결혼하며 인생이 하향곡선을 그립니다. 생각해보면 이 결혼은 사기결혼이나 진배없습니다. 재혼이지만 나이차가 나는 부부 사이는 아내 보듬어주고 믿음직할 거란 생각, 그리고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첫날 산산이 무너지고 말죠. 아내를 그저 단순히 보여주기 식으로만 대하는 탓에 아내 또한 남편에게 증오심을 키워오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녀의 순정이 남편의 사랑으로 보답받지는 못했지만 '아내'라는 신분이 이마에 찍힌 주홍글씨 같았다. "
P224
철저히 남 앞에서는 쇼윈도 부부로 살며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도록 규칙을 만들어 삽니다. 아내인 훙타이는 '늙은 남자에게서 나는 지독한 냄새'를 참지 못하며 '남편의 장례는 아내의 진정한 결혼식이다'라는 말을 그려보기까지 합니다.
자전의 삶도 안타까웠지만 이혼도 하지 않고 유지하는 이런 결혼 생활. 완벽한 결혼을 꿈꿔온 훙타이에게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혼났습니다. 어느때 보다도 소설 속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깊게 한 탓에 소설을 덮고서도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심리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차가운 강물 속에서 망상에 빠져 혼잣말하는 훙타이의 영혼은 그래서 더 처절하고 구슬프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검은강》은 '어떻게 젊은 여자는 돈을 목적으로 노인과 그의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하였나'에 포커스를 맞추는 소설이 아닙니다. 소설은 법정에서 심문을 받는 피의자의 모습으로 시작해 사건 당일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법정으로 돌아오는 순환적인 구성을 취하죠. 범인을 추론하고 과정을 맞추고 원인을 분석하는 르포나 논픽션이 아닌,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는 제시하는 소설입니다.
제목 《검은 강》은 오염된 강, 시체를 유기한 단수이허 강, 기레기란 은어까지 생긴 과장된 저널리즘, 그리고 커피를 뜻하는 거대한 은유입니다.
단순히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 범죄소설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챕터 사이사이에 구성된 다양한 집단의 코멘트는 한 여성을 어떻게 사갈녀로 몰아가는지 폐해를 고발하고, 피고를 몰아세운 판사의 짜증 섞인 태도, 진실은 상관없다는 둥 남 이야기하듯 끄적이는 악플러를 상세히 다루죠. 살인을 저지른 죗값을 묻기 전에 누가 가장 나쁜 사람일지 정답 없는 물음을 던지는 소설은 우리 사회가 가진 어두운 민낯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