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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평점 :
《편의점 인간》으로 깊게 각인된 '무라카 사야카'의 신작 《소멸세계》는 제목처럼 현 인류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관념들이 소설 속 평행세계에서 비정상이 되는 대혼란을 겪습니다. 성(性), 사랑, 결혼, 가족, 출산이란 가치에 균열을 내며 디스토피아적 인류의 미래를 상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또 모르죠. 100년 뒤 우리가 맞는다고 여기는 가치가 도저히 쓸모조차 없는 낡은 가치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소설을 읽으며 내내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고, 만약 이런 세계가 온다면 어떨까 암울한 생각마저 들었던 소설. 심히 정신건강에 좋지 않았던 소설이기도 합니다.
"요즘 시대에 결혼은 아이를 갖고 싶거나 경제적 동반자가 필요하다거나 일에 집중하고 싶으니 집안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합리적인 이유로 결정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중략) 가족이라는 시스템이 살아가는 데 편리하다면 이용하고 필요 없다면 이용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족과 결혼은 그런 제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
P 82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남성들이 징집되면서 출산율이 하락한 일본의 평행세계입니다. 대안으로 성관계 없이 오로지 인공수정으로만 아이를 출산하는, 사랑도 육체적 욕망도 사라져가는 소멸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결혼 또한 원하는 조건의 상대를 프로그램에 넣기만 하면 매칭해주는 시스템이 배우자를 골라줍니다. 당연히 결혼은 필요와 불필요의 문제. 라이프 스타일과 가사노동 분담, 경제적 지원, 정자와 남자를 기증해 가족을 이루고 싶다면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오로지 가족은 (종족 번식이란) 인간 본능에 따라 내 인생이 얽혀 있고, 노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상황입니다. 얼마나 끔찍한가요. 연애와 욕망은 밖에서 해결하고 돌아오는 게 관례, 부부 사이는 남매 사이와 같아서 가족끼리의 잠자리는 불결하다고 느끼는 세계. 그래서 이혼 사유가 되는 사회가 되었지요.
"내가 널 낳은 건...... 사랑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았어. 태어났을 때부터 이 세상은 미쳐 돌아갔어, 나만은 정상이고 싶었지. (중략) 엄마는 말이지, 네가 이 미친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도록, 무엇이 올바른 세상인지 어린 너에게 가르쳤단다. 네 영혼에 똑똑히 새겨 넣었어. 태어나서 처음 본 세상이 우리 영혼에서 지워지는 일은 절대로 없어. 지금은 이 세상에 물들어 있어도 언젠가 반드시..... "
P158-159
한편, 서로를 사랑한 부모님의 성관계(소설 속에서는 교미)를 통해 세상에 나온 주인공 '아마네'는 지겹도록 엄마에게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엄마가 믿는 올바른 세상이란 사랑하는 사람끼리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어 아이를 출산하는 것. 하지만 딸 아마네는 미쳐 돌아가는 건 엄마의 구시대적 사상일 뿐 세상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며 반박합니다. 엄마가 정상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다음 세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도중'이라면, 예전과 다른 지금의 제도를 누군가가 심판할 권리는 없다고 여깁니다. 세상은 늘 도중으로 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과도기의 혼란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뿐이라 믿습니다.
엄마의 저주가 통한 걸까요? 좀처럼 없어지지 않고 들끓는 성욕을 섹스와 마스터베이션으로 해결하며 애써 부정하려 하는 아마네. 하지만 부정하려 하면 할수록 진짜 섹스를 할 줄 아는 마지막 인류가 되어, 결국 무엇을 위한 행동인지 알 수 없을 지경으로 치닫습니다.
아마네는 그리스 신화 속 디오니소스와 닮았는데요. 대지와 포도주의 신, 풍요의 신으로 아버지 본능의 상징인 생식기 가까운 넓적다리를 자궁 삼아 태어난 디오니소스. 제우스가 인간을 사랑해 낳은 자식이란 점이 금기된 것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는 점이 아마네의 혼란과 비등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