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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스트
스테프니 메이어 지음, 윤정숙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밖은 덥고, 시원한 음료만 당기는 폭염. 심장이 쫄깃하거나 아릿한 첩보액션스릴러 장르 소설과 북캉스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오글거리지만 좀 처럼 놓을 수 없었던 <트와일라잇>시리즈의 원작 작가 '스테프니 메이어'의 신작으로 말입니다. 이번 책에서는 늑대인간도 뱀파이어도 소녀도 등장하지 않지만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칫릭' 장르나 '하이틴 로맨스'에 치중한 작가라는 편견과 달리 성인 독자를 위한 첩보 스릴러를 선보여 기대가 되었습니다.
"다시 침대에서 자는 나날들을 상상해 보았다. 약국이 무색할 만큼 많은 독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는 삶을. 매일 같은 이름을 쓰는 것을. 누군가 죽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을.
'믿지 마.'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그런 생각으로 판단력을 잃지 마. 헛된 희망 때문에 멍청해져선 안 돼. "
P60
정부의 비밀 조직으로 6년 동안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쫓기는 몸이 된 줄리아나. 이제 변장과 도피는 지긋지긋합니다. 다양한 변장술과 이름으로 신분을 위장하며 살아야 하는 슬픈 현실 보다 더 괴로운 것은 가까운 동료와 지인들이 하나둘씩 죽어간다는 사실. 외롭고 정말적이지만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현실은 작은 떡밥도 크게 보이는 효과를 줍니다. 매일 죽어야 사는 위태로운 하루를 보낸 던 중 뜻밖에 찾아온 정부의 러브콜. 믿어야 할까 의심해야 할까요?
"지하철 문이 닫히는 동안 천 가지쯤의 나쁜 결말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가득 메웠다. 그녀는 재빨리 대니얼 옆에 서서 그와 같은 기둥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더욱 창백하고 훨씬 기다란 손가락 바로 아래에 자리 잡았다. 누군가 주먹으로 그녀의 심장을 쥐어짜는 듯했다. 타깃과 가까이 있을수록 더욱 고통스러웠다. 지하철이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 창에는 차안의 풍경밖에 비치지 않았는데도 그는 여전히 멍한 눈길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
P73
매력적이고 완벽한 과학자 겸 비밀요원 주인공은 마치 '제이슨 본'의 여자 버전을 연상케 합니다. 또한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대니얼 비치'가 등장하는데요. 그 남자는 늘 그렇듯 주인공과 피할 수 없는 사랑을 시작합니다. 대니얼은 교사라는 대외적인 신분과는 (살인적인 생화학 물질로 인류를 고통에 몰아넣을 사람처럼) 어울리지 않게 무서운 사람이라는 게 함정입니다. 해리성 장애를 갖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줄리아나가 받은 정보와 전혀 다른 모습이 줄리아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봅니다.
제거 대상과의 금기된 사랑이 어떤 파국을 불러올지 예상해 본다면 앞으로의 내용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캐릭터의 대외적인 고난과 터부(금기)에 맞서는 상황은 전통적인 클리셰처럼 보이지만. 납치되었던 인질들이 일정 시간 후에 범인에게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심리 효과인 '스톡홀름 신드롬'의 다른 변주 같았던 두 사람이 자꾸만 관심이 갑니다. 700P가 훌쩍 넘는 두께에도 불구하고 <트와일라잇>의 벨라가 흡혈귀와 늑대인간 사이에 얽히지 않았다면 주인공 줄리아나가 되었을지 누가 압니까? <트와일라잇>의 팬으로서 상상만으로도 즐겁더군요.
작고 다부진 체격인 듯 보이는 외모. 아버지의 피부색을 물려받은 줄리아나는 아버지의 복잡한 유전자 탓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한국, 히스패닉, 웨일스의 유전자가 섞인 세상 어디에도 없는 피부색은 어떤 색일까요? 흔하지 않는 피부색을 가진 탓에 고향이 거의 모든 곳일 수 있다는 말이 아이러니하게 들립니다. 방독면, 부비트랩, 가발과 변장술 도구, 피가 없이는 하루도 편히 잘 수 없는 상황과 대비를 이루죠. 세상 모든 곳이 고향일지도 모르지만 위협을 피해 곳곳을 돌아다니는 떠돌이 줄리아나. 독자는 측은하거나 매력적이거나 캐릭터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제목 '케미스트'는 불가항력 화학작용인 '사랑'과 화약품으로 자백을 받아 내는 '자백제'의 이중적 뜻을 지녔습니다. 캐릭터는 타깃과의 사랑이란 치명적인 실수로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겁니다.
비밀을 간직한 화학물질(자백제)의 제조자이자 걸크러쉬 스파이 '줄리아나(알렉스, 크리스, 케이시, 제시 등등의 가명 중 줄리아나로 통일)'의 등장으로 본격 성인 첩보 스릴러의 등장을 알립니다. 영화화 판권이 팔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리된다면 누가 어울릴지 상상해보는 재미도 있는 소설입니다. 다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훨씬 성숙해진 외모와 영혼을 무장한 채) 맡아 보면 어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