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책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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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어떻게 서두를 써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힙니다. 방대한 서사 속 살아 있는 듯한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장르를 규정 짖는다는 것 자체가 오류인 것 같아서입니다.  SF 장르라고 해야 할지 종교 소설, 세기말적 묵시록이야 해야 할지, 역사소설이라 해야 할지 모를 복잡하고 흥미로운 책. 심리, 종교, 미술, 한국 역사, 과학, 의학, 고고학, 잡학 등이 총망라되어 밑줄 그어가며 찾아 이해하기도 한 배우면서 보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그래, 사람들은 스스로를 위로해주고, 자기 자신을 동화시킬 수 있는 단 한 줄을 찾아 헤매는 거야. 그럴 때 문장의 진짜 의미가 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모호하고 애매할수록 더 좋아하겠지.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걸 옅은 파스텔 톤으로 덧칠해주고 부드럽게 가려줄 반투명의 휘장 같은 거니까. "

P149


대체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자고? 이렇게 벌려 놓고 마무리 수습은 어떻게? 그래서 왜? 시공간의 초월인가, 망각인가, 편집증인가, 정신분열인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낯선. 원서의 출처, 회고록, 서간문, 희곡, 일기, 메모, 각주, 블로그, 문자메시지 등 다양한 형식을 넘나드는 파격적인 소설입니다. 몇 가닥으로 정리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영화 <옥자>에서 다루고 있는 식량 대량생산을 위한 공장식 도축의 문제점과 전 세계를 향해 자행되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고발하는 등 한 편의 르포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요.

 

 

"시간엔 원래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 따윈 없고 사건은 뒤죽박죽으로 발생하지만, 인간의 기억이 거기에 순차성을 부여하는 거라고. 결과가 원인보다 앞서기도 하는 것 - 그게 진짜 세상이니까. "

P76

 

2015년의 경기도 용인과 2016년 미국 트루데, 1958년 경기도 용인이란 시공간이 정신없이 혼재되었습니다. 정점은 80년 광주와 맞닿아 있죠.  이 세 가지 배경은 하나라도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평행우주로 연결되어 있는데요.

 

2015년 용인의 한 놀이공원에서 이상한 차림새로 발견된 한 소년, 소년을 발견한 다람쥐 탈은 쓴 알바생, 세상의 종말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스티브, 그리고 전직 기자 스티브 와인버그와 T 신부, 파충류와 같은 생김새의 신과 악마 같은 천사까지. 하나같이 허투루 볼 캐릭터가 없어요. 가장 큰 미션을 부여받은 스티브는 인생의 갖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지구 멸망의 절체절명의 상황 앞에 인류를 구하는 영웅이 됩니다.

 

갑자기 전 세계 사람들의 스마트폰에 종말을 알려주는 앱 '계시'가 깔리며 하늘에서 신들이 쏟아져 내려옵니다. 신의 형상은 파충류, 흡사 지구상에 멸종된 공룡 같아 보입니다. 많은 신들이 강림하지만 이들은 특정한 정신적 커넥팅을 가진 여러 신이 자 유일한 존재죠. 성경에 쓰인 대로 인간의 모습이 아버지(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정설, 유일신 사상을 완전히 무시하는 새로운 해석입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확인되지 않은 팩트를 의심하게 만드는  도발과 듣도 보도 못한 상상력이 압권입니다.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1500~1505년경
나무판에 유채, 220cm×389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출처= http://terms.naver.com/imageDetail.nhn?docId=976191&imageUrl=http%3A%2F%2Fdbscthumb.phinf.naver.net%2F3329_000_91%2F20141110084044292_SCZ0TS9I1.jpg%2F2013112111253997.jpg%3Ftype%3Dm4500_4500_fst%26wm%3DN&categoryId=46807&mode=simple|&query=&authorId=&authorId=)


 

새의 몸에 인간 얼굴을 한 괴상한 천사가 등장한다고 해도 하능 이상할게 없는 상황, 끊임없이 제기되는 지구 종말론, 휴거, 예언 등이 신의 강림으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기괴한 모습을 한 신과 천사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네덜란드 화가'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작품들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꽤 두꺼운 볼륨의 외형과 작은 글씨, 빽빽한 자간을 마주하는 순간, '아.. 작가의 근본 중 하나인 이야기 꾼의 자질이 있구나!' 생각했죠. 실증을 통한 자료조사부터 한국뿐만이 아닌 미국과 이탈리아 등 당시 상황과 우리나라의 상황과 맞물려야 한다는 실증까지. 실로 대단한 리얼리즘 소설, 긍정적인 의미의 괴작이 탄생으로 보입니다.

 

'김희선' 작가의 이력은 소설처럼 특이합니다.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약대를 졸업해 현재는 원주의 한 병원 약사. 전업 작가가 아닌 약사와 소설을 병행하고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는데요. 방대한 서사와 약물, 죽음에 대한 선명한 묘사는 팩트체크할 시간을 줄여주죠.  

 

"각각의 순간을 상징하는 시공간들은 이 광대무변한 우주 전체에 비누 거품처럼 둥둥 떠 있어. 그러니까 그야말로 무한에 가까운 순간의 거품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는 뜻인데…… 상상해보라고. 그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일지! "

P417

 

작가의 말에서 “우주를 떠다니던 무형(無形)의 이야기가 책이라는 실재(實在)로 탄생하는 과정은 언제나 내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라고 말했죠.  어쩌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도 힘든 세상에 살짝 미쳐야 즐겁다는 말이  생각나는 건 뭘까요? 책은  명확한 결론을 내어주지도 않은 채 제목처럼 무한 속에서 유영합니다.

 

천명관 작가의 《고래》나  데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새로움의 경계를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 가 앞이고 뒤인지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지'와도 같은 플롯, 시공간을 초월한 타임 패러독스와 절대 뻔하지 않는 이야기를 찾는 독자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스티브, 충고 하나 해줄까? 앞으론 책을 읽을 때, 과연 이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먼저 던지는 게 좋을 거야. 왜냐하면 어떤 책은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하니까. 그래, 이걸 쓴 노인네도 머리가 돌아서 죽어버렸지. 그리고 책을 물려받은 나 역시, 꼭 그 때문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렇게 신세를 망쳤고 말이야. "

P57 

 

'책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미쳐간다'라는 문장처럼 작가와 독자 모두 제정신으로 이 책을 볼 수 없을 듯! 혼란의 시간들이 남긴 상흔이 고통이라기보단 호기심과 경외감이란 묘한 안도감이 드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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