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양장) - 개정증보판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세기 초 영미문학을 이끈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100여 년 전 미국의 소설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피츠제럴드의 섬세하면서도 풍자적인 문체와 1920년대 미국의 사회층 직접 보는 듯한 문장의 시각화,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가미된 소설이기 때문일 겁니다.

 

번역의 중요성은 두말하면 잔소리! 맨부커상의 수상을 안겨준 한강의 《채식주의자》 또한 '데보라 스미스'라는 번역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한데요. 단순한 번역인지 (또 하나의 창작이란) 의역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번역본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위대한 개츠비》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나라에 번역된 60여 종 중 민음사에서 나온 '김욱동' 번역가 버전과 문학동네에서 나온 '김영하'작가 버전을 으뜸으로 치고 있습니다. 이정서 버전의  《위대한 개츠비》는 두 번역본에  빅퀘스천을 던집니다.

 

 

《이방인》과 《어린왕자》의 번역 오류를 면밀히 지적한  '이정서' 번역의 《위대한 개츠비》. 오역 76군데를 조목조목 따지며 《이방인》에 이은 제2차 고전번역 논쟁을 예고하고 있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작가의 순수한 원문과 번역가의 의역 사이에서 독자는 철저히 번역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데요.  이정서 번역가가 지적한 오역을 대조해보면 그 차이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1920년대 미국의 사회상을 이해하지 못한 문제점과 높임말이 없는 영어의 관계의 오류가 작가와의 의도를 훼손시키는 경우가 됩니다. 'a weatherbeaten cardboard bungalow'는 앞 문장의 '한 달에 80달러'라는 싸다는 느낌을 '비바람에 바랜 허름한 방갈로'라고 번역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922년 당시 80달러는 지금의 1,000달러 수준으로 싸다는 뉘앙스를 살리고 'cardboard bungalow'를 '허름한 방갈로'라고 그대로 번역할 게 아닌 '미국의 단층집'이라는 일반명사인 합성어임을 이해하지 못한 오류라는 것이죠.

 

 《위대한 개츠비》에서 단순하게 알려진 캐릭터들을 분해 수준의 번역으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줍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무모한 짓이라도 불사르는 사랑꾼 개츠비와 상류층의 속내를 간직한 백치 데이지, 그들을 바라보는 화자 캐러웨이와 둘을 이어주는 친구 조던, 속물 귀족 남편 톰과 그의 정부 머틀까지. 살아움직이는 듯한 캐릭터의 꿈과 욕망, 사랑 이야기는 원서를  읽지 않는 한 오로지 전달받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모국어가 아닌 이상 정확한 말의 의미를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모국어 수준의 외국어를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만의 미묘한 차이, 1세기라는 문화. 사회적 간극을 매워가며 해석한다는 일이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이해하는 데는 다양한 출판사와 영화, 연극 파생된 장르를 두루 익혀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누구의 번역이 맞다 틀리다를 판단하는 몫은 오로지 독자에게 돌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김영하, 이정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봤으니 스탠다드로 불리는 김욱동 버전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봐야겠습니다. 참고로 '바즈 루어만'감독이 연출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위대한 개츠비>를 감상 후 읽어본다면 번역의 묘미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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