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솔지 소설
손솔지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휘》. 이 한 글자에서 들리는 소리.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동그랗게 입술을 오므린 휘파람 소리 같습니다. 의뭉스러운 표지와 함축적인 한 글자가 망설임 없이 책을 집어들게 합니다.  장편 소설 《먼지 먹는 개》를 펴낸 바 있는 '손솔지'작가의 소설집입니다.

휘,종,홈,개,못,톡,잠,초. 이렇게 여덟 가지 한 글자는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단어만 들어서는 그 뜻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은데, 빨려 들어갈 듯 흡입력 있는 문장과 직선적인 표현이 작가의 나이를 의심케합니다. 세상 풍파를 겪을 대로 겪은 불혹 이상의 연륜미가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세상의 작은 시선에서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은 연인, 가족, 친구, 불면증, 학교, 반려동물, 세월호 참사, 죽음을 통해 마법을 부린 듯 책 속에서 유유자적합니다.


누이는 더럽다. 그녀가 나의 누이란 이유로 나를 조롱하 것을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누이를 둔 죄목은 무엇일까. 알몸으로 화장실 칸막이 안에 갇혀 깊이 생각했다. 어머니는 우릴 버렸고 누이는 우릴 욕보였다. 계집들의 잘못이다. 그에 상처받고 아버지는 떠돌이 광견처럼 사나워진 것이다.

P53


중의적인 한 글자 한 글자가 매우 강렬합니다. 여덟 가지 이야기 모두 쉽게 잊히지 않았지만 특히 집안의 유일한 여자, 어미를 떠올리게 하는 누이를  '종'부리듯 하는 남자들 때문에 수치심과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 <섬>와 <나쁜 남자>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거든요. '종' 속 화자는 누이 때문에 따돌림당하는 '나'. 부끄러운 누이가 죽을 만큼 싫지만 경멸해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라는 고리는 한 배속에서 나온 동기간이기에 가능했죠. 아버지의 학대에 순종하던 누이의 눈빛이 달라진 어느 날, 남매는 그토록 원했던 적막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의 종(노예)에서 인자한 성모마리아의 목소리처럼 울리는 종(bell)으로 해방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어쩌면 십일 등이나 십 등이 학교에서 죽는 것은 당연할 일인지도 모른다. 이곳은 둥지나 다름없다.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서 집에 돌아가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등교하는 수험생들은, 집 안의 가구 배치가 바뀌어도 단번에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집보다 학교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P80


홈은 중반부를 읽었을 때야 그 의미를 알아챘는데요. 고3 수험생이 가득한 냄새나는 교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집에 가고 싶은 아이들을 상징하는 '홈(home)'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첫 문장'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교실 안에서는 시체 냄새가 났다.'를 다시 들추며 한낱 점이 되길 원하는 아이들의 무덤이 떠올랐습니다.

함부로 볼펜 하나 떨어지는 소리조차 없는 적막한 교실, 모든 추락과 관련된 행동은 미신을 넘어 종교로 치부되는 절대 고독의 교실에서 풍기는 기분 나쁜 냄새. 숫자와 등수에 혈안이 되어 있는 학생과 선생들은 으레 있는 일이라며 듯 무신경한 하루를 보냅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는 어느 날, 전교 11등과 10등의 연이은 자살로 학교는 술렁이게 되고, 입시 스트레스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이라 치부되며 금세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그렇게 사라진 아이들은 세상에서 쉽게 잊힙니다.

 

일호의 머릿속에는 그 구멍에 대한 생각뿐이 없었다. 내일은 어떤 물건을 넣어볼까. 지금의 넓이에는 무엇을 넣어야 알맞을까. 나날이 빠르게 커져가는 암흑 같은 구덩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속은 한쪽 눈을 감고 신중하게 들여다보아도 시꺼먼 어둠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블랙홀의 입구와 같은 사차원적 공간이 아닐까.

P92

하지만  11 등 책상 한가운데  자그마한 '홈'이 파여 있는 것을 알아챈 '일호'.  점점 형태를 달리하는 홈을 관찰하게 되고, 마치 교실에는 보이지 않는 블랙홀이 존재하는 듯 아이들을 집어 삼키는 '홈(구멍)'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습니다.  일호는 과연 홈 안에서 행복함과 안도감을 느꼈을까요?


그 밖에도 새카만 개지만 백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개가 화자가 되어 주인과의 묘한 교함을 다룬 '개', 중국인 아내가 있는 한국 남자와 은밀하게 사귀고 있는 사귀고 있는 여자의 하얀 거짓말 '못' 등 모두 소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인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이 가라앉고 있는지를. 불 꺼진 암흑 같은 마음속에서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도 우리는 배운 적이 없었다. 더 이상 뉴스에서 기대하는 소식을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람들은 불처럼 번지는 마음속 분노와 설움을 잊기 위해서 불에 탄 부분을 싹둑 잘라냈다. 평소처럼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연명하는 데에 쓸데가 없고 타기 쉬운 말랑한 부분부터 잘라내야 했다. 그중 하나가 희망이었다. 

P238 


처음 한 글자의 뜻을 유추할 때의 호기심과 읽으면서 드러나는 속내가 일치하지는 않았습니다. 의뭉스럽고 기괴하며, 뜨뜻미지근한 느낌은 책장을 덮었을 때도 계속 이어지는데요. 책 속의 캐릭터들의 뒷이야기가 잔상처럼 스며들며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사회고발 다큐멘터리를 문학적으로 풀어낸 듯, 읽고 나면 입안이 깔끄러워 모래를 씹은 듯 선명하게 각인됩니다. 마지막 장의 '초'는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위한 작가만의 진혼곡. 찰나의 순간인 초(second)와 죽음의 어둑한 바다에 필요한 '초(candle)'란 의미가 오버랩 됩니다. 책장은 덮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듯한 여운. 미스터리 한 느낌이 잔인한 4월이란 이중적인 의미에 딱 맞아떨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