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발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쉽지 않은 선택,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고 써 내려간  날선 칼날 같은 소설 《고발》은 탈북자, 브로커 등의 통해 남한으로 반출시킨 원고를 바탕으로 한  소설집입니다.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 고립된 국가에서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때에 삶을 글로 전한다는 일은 대단한 고통일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 가족과 이웃의 처참함을 떠올리며 살을 깎아내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는 일이니까요.


 

북한에 살고 있는 무명(無銘) 작가는 '반딧불이'를 뜻하는 '반디'라는 필명으로  《고발》을 발표합니다. 살벌한 용기는 '북한의 솔체니친'이란 별명의 찬사가 꼬리표처럼 쫓아다닙니다. '솔체니친'은 옛 소련의 인권탄압을 기록한 책  《수용소 군도》을 통해 반역죄로 추방, 20년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한 '러시아의 양심'으로 불리는 작가입니다. 또한 얼마 전 맨 부커 상의 주역,  《채식주의자》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영국판 번역을 맡아 또 한번 화제가 되었죠. 우리에게도 낯선 북한어를 번역하는 작업은 어땠을지 궁금해집니다.


 

면상이 온통 털 속에 묻힌 마르크스와 매섭게 입을 다문 김일성의 초상화였다. 그 두 붉은 '유령'은 지금 한경히에게 분명 이렇게 호령하고 있었다.

"나가라믄 찍소리 말구 나갈 거지 무슨 허튼 생각이야. 이게 내 도시지 네 도신 줄 아니?"

알고 보니 바로 유령들의 서슬 퍼른 그 독설이, 가차없는 그 주먹이 이 시각 가슴에서 터지려는 한경희의 설움마저도 여지없이 틀어막고 있는 것이었다.

P76 

 

커튼은 젖히면 보이는 두 초상화. 김일성과 마르크스를 보고 경기를 일으키는 아이와 어스르는 모성의 충돌인 '유령의 도시'는 개인의 사생활까지도 당국에 의해 결정되는 극단성을 고발합니다. 초상화를 무서워하는 아이를 위해 커튼을 닫아야 하는 사연이 이상한 행동으로 오해받고, 결국 위기에 몰려 나락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풍자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나는 사본을 쥔 손으로 나도 모르게 내 아랫배를 더듬었다. 거기서는 지금 결혼 후 뒤늦게이긴 하지만 새 생명이 움터 자라고 있었다. 부끄러워 아직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 다행 중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 생명을 낳을 때 그 생명이 복되기를 바라서이지 한뉘를 가시밭을 헤쳐야 할 생명임을 안다면 그런 생명을 낳을 어머니가 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P40

 

불륜을 의심할 만큼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던 이상한 아내를 발견한 주인공. 온갖 상상을 해보지만 결국 아내의 일기장을 통해 오해를 풉니다. 헬조선 보다도 절망적인 북한의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아내는 피임약을 먹었던 걸까요. 조카 민혁이와 남편에게 찍힌 낙인이  처절하고 억울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절망 속에서도 어떻게든 조금 더 낳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지 않았을지 이런저런 상상을 해봅니다.

 

탈북자들이 말하는 북한의 삶은 그 자체가 고난이자  살아남기 위한 생존입니다. 극단적인 사회상, 가난과 배고픔의 이야기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조차 사치처럼 느껴집니다.  상상으로 만들어가는 소설의 근본을 보기 좋게 비껴가든 생생한 삶은  허구(소설)가 아닌 실화(다큐멘터리)로 나가옵니다.

 

 

활어처럼 살아움직이는 《고발》의 캐릭터들, 투박하지만 한글의 맛을 살린 북한 언어, 풍자와 해학,  언어유의, 책장을 덮어도 가시지 않는 여운, 독특함과 신선함, 비밀스러운 모든 것 등 새로움에 목말랐던 독자들에게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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