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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기 있어요 - 봄처럼 찾아온 마법 같은 사랑 이야기
클레리 아비 지음, 이세진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흐트러지게 핀 벚꽃길에 사람들이 복작거리는걸 보니, 봄이 오긴 왔나 봅니다. 오랜만에 벚꽃나무를 보며 세상 달달한 로맨스 소설을 읽었습니다. 주인공 티보와 엘자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남녀의 사랑이야기라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 했는데요. 엘자는 빙벽 사고로 6주씩이나 혼수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는 상태이고, 티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벌인 동생 때문에 같은 병원에 함께 합니다. 병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남녀가 첫 사랑처럼 느닷 없이 찾아옵니다.
"운 좋은 줄 알아. 밖에 비가 오거든. 내가 여기 좀 있어 줄게, 재스민 씨. " 나는 의지를 끌어당여 앉았다. 스르르 잠들기까지 2분도 안 걸렸을 것이다.
P20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럴수가'라며 동생을 혐오하게 된 티보는 병실을 떠돌다 들어간 어느 병실에서 뜻밖의 평온함을 느낍니다. 병원 특유의 냄새를 피해 찾은 낯선 병실, 낯선 환자 앞에서 스르르 잠이 드는 대담함까지. 사실 병실에서는 은은한 자스민 향기가 베어 있었거든요. 평안한 끌림은 오랜만에 티보에서 안식을 가져다 줍니다.
자스민 꽃의 꽃말은 '당신은 나의 것'으로 엘자와 티보가 운명적으로 끌릴 수 밖에 없는 모티브가 됩니다.
이때부터 '이 소설 뭔가 독특하구나!'직감하게 되었습니다. 잘못 찾은 곳에서 잠이 들어버리다니, 이보다도 특이한 소재가 있을까요? 병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혼수상태의 여자 아이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설정이 달아버릴 대로 달아버린 메마른 마음에 순순한 단비를 내려주었습니다.
이미 6주 전에 깬 엘자에게 티보는 달콤쌉사름한 각성제입니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일상이 티보를 기다리는 즐거운 일상으로 바뀌었거든요. 티보는 엘자를 찾아오는 사람들과는 달라요. 엘자를 가망 없는 한낯 식물인간으로 보지 않고 매일 말을 걸어주며 살아있는 생명체로 대해주거든요. 식물에게도 귀가 있어 좋은 음악과 좋은 말을 걸어줄때 무럭무럭 자란다는 연구결과가 생각났습니다. 어떤 생물체도 존재자체의 이유가 있고 생명의 귀천은 없음을 고민해봅니다.
티보는 누가봐도 멋진 갈색눈의 훈남으로 전 여친 신디와 헤어진 이후 마음에 문을 닫았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동생이 용서할 수 없을 사고를 치는 바람에 심신이 지친 상태. 게다가 늘 선망의 대상이던 친구부부의 대부 노릇까지 해야 하는 바쁜 상황. 삶은 초콜릿 상자와도 같아서 무엇이 들어있을지 알수 없다는 말, 일비일희하는 상황들이 티보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피하고 싶은 현실, 어디하나 마음 둘 곳 없는 세상에서 단 한곳, 엘자의 병실은 유일한 안식처. 마음대로 쉬고, 떠들다 가면 한결 나아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아 안정적이었던 엘자 병실이 순간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유인즉슨, 회복불가능한 상태의 환자에게 얼음장 같았던 빗장이 풀려졌다는 것! 그리고 엘자는 곧 연명치료를 중단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게 됬거든요.
《나 여기 있어요》는 가제본으로 미리 만나봤다.
지각의 수단이 청각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놀랍고 경이롭다. 소리과 관련된 모든 것이 독특한 풍미를 띠기 때문이다. 나는 7주 동안 사람들이 하는 말에서 색감과 질감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다. 내 동생의 연애 이야기는 구역질나는 붉은 벨벳 같다. 그만큼 호르몬이 차고 넘치는 느낌이다. 엄마는 보라색 가죽 같다. 낡은 핸드백처럼 뻣뻣해 보이지만 이미 군데군데 갈라졌다. (중략)
이 와중에도 다행히 나에겐 열흘 전부터 떠오른 무지개가 있다. 티보는 온갖 미묘한 감정들, 나에게 새로운 그 모든 것과 함께 등장 했다. 나는 특정한 한 가지 색깔을 떠올릴 수 없다. 반짝반짝하면서도 당혹스러운 색이다. 그러나 무지개가 생각났다. 시적이지 않은가. 자칫 침통하게 변해버리는 그 무엇보다 이 무지개가 낫다.
P157
사랑에 빠진 사람은 환화게 필터링된 세상을 봅니다. 엘자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며 살고 싶고, 티보와 함께 하고 싶다는 감정을 갖게 된거죠. 때론 티보의 거침 없는 돌발행동이 엘자의 얼어붙었던 심장을 뛰게 만들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빨라지는 맥박을 만듭니다.
나는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다.
지금 당장은, 내가 가장 제정신으로 저지른 일인 것 같다.
P186
사랑은 위대함을 가졌습니다. 의학적으로 회복불능하다고 판단되는 환자를 깨우는 화학적인 생리 반응. 죽음의 문턱에서 격정적으로 살고 싶다는 감정을 간절히 원하게 되는 절박함이 생깁니다. 사랑을 통해 이 세상은 유지되고 살아갈 의미를 갖하는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따스한 바람이 살랑살랑, 겨우내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고 있는 봄날!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로맨스 소설 한권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나 여기 있다고, 이렇게 존재감을 뿜고 있다고 소리치는 듯한 길가의 작은 민들레처럼 사랑은 우리 곁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 사랑이란, '요동치는 심장, 과다분비되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이 뒤섞여 통제불능의 미친 짓'이란 것을요. 사랑에 빠져본 사람들은 엘자의 속마음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될 것입니다.
"너...... 여기 있지?"
"나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