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들여다보는 사람 - 한국화 그리는 전수민의 베니스 일기
전수민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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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응 직장인으로 근근이 살아가다 돌연 직장을 그만두고 미대를 간 후  지금은 한지에 우리 정서를 표현하는 한국화 작작가 전수민 씨. 끝없는 자유와 창작의 욕구를 터트린 베니스에서의 한 달을 담은 에세이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면 불편해하던 사람들을 뒤로하고 생소한 나를 발견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여정입니다.

 

물을 무서워 했음에도 세 번이나 (죽음을 불사하고) 보트를 타본 일생일대의 용기,  한국말로 물건을 사보거나 종점을 이용한 길치의 영리한 집 찾기, 오랫동안 도시를 관찰하다 마음대로 그려보는  감성이 이채롭습니다. 이상 시인의 시를 글로 옮겨 놓은 듯 작가만의  문체로 써 내려간 에세이를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내 베니스의 풍광과 정서와 잘 어울리는 전수민 작가의 화법에 매료되어 갔습니다. 글은 특정인에게 쓰는 글이 아닌, 나에게 쓰는 일기처럼 느껴집니다. 독자는 그 내밀한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만 같고요.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자신을 다듬고 지켜나가요.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아껴야 다른 사람들도 건드리지 못하는 겁니다. 힘들었던 지난 과거는 이미 일어난 일이지 바뀌는 게 없어요. 하지만 미래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바뀌잖아요?

p.173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하지만 나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는 것도 재미도 쏠쏠한 것 같습니다. 삼시 세끼 한국식 밥을 고집하고,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하며 전전긍긍하는 대신, 한국말로 소통하는 무모함이  짜릿한 일탈이 되는 행위 같은데요. 이탈리에서 한국화를 그린다는 자체가 이색적인 작업인 만큼 , 여행도 반복되는 일상을 떠나 낯섬을 통해 사람과 삶의 소중함과 만족감을 확인하는 일 같습니다.

유리 세공으로 유명한 베니스의 주변 섬 '부라노'의 집들은 총천연색입니다. 집도 배도 알록달록 '날 좀 봐줘요'하고 손짓하는 것만 같은데요. 이유는 짙은 안개 때문.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는 어부들이 안개로 집을 찾지 못할까 봐, 알록달록한 색으로 집을 칠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참 진중한 이유가 만들어 낸 귀엽고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사람들도 푸근하고 넉살이 좋아요. 점심시간이 길어 때를 잘못 맞추면 뭐 하나 사기 힘들지만, 삶을 즐기면서 사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장수의 비결이기도 하고요.

 작가의 독특한 문체를 읽다가 빵 터졌습니다. 무라노 섬으로 들어가는 수상버스 안에서 칠면조를 닮은 여인(자세히는 칠면조에서 급하게 인간으로 환생한 듯한 외모)을 묘사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적나라한 묘사에 그 모습이 상상되어서 혼났네요. 예술가라는 직업은 어떠한 것도 쉽게 지나치는 법이 없나 봅니다.

 

작가는 전시회장에서 한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을 보면 오래도록 지켜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얼마나 오래 들여다보고 있는지 자신을 누군가 보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죠.  이럴 때면 예술가의 사명 같은 게 느껴지며 오랫동안 보존되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고 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작년 가을, 베니스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아직도 그곳의 바람, 하늘, 물 위의 도시들, 사람들의 웃음과 아름다움이 눈에 선합니다. 작가도 인정한 이탈리아스러움은 과연 무엇일까, 책을 보며 곱씹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작가는 어느덧 한 달이 흐른 뒤 못내 아쉬움을 드러냅니다. 여행이란 이렇듯 새로움을 통해 익숙함을 되돌아보는 삶의 예행 연습입니다.

 자, 이제 당신은 어디로 연습을 떠나볼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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