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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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독특한 소설입니다. 뚜렷하지 않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느낄 수 있는 소설입니다. 상황 설명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문체는 불친절하고 삭막하지만 그 은유를 두 번, 세 번 곱씹다 보면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세상을 설계하는 스파이들과 세상을 움직이는 소설가가  톱니바퀴처럼 엉켜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그리고 있는데요. 시간을 알 수 없는 깜깜한 사위, 나를 지켜보는 눈이 보이는 듯 섬뜩한 일렁임이 감돕니다.

이 세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 준비도 없이 버튼 하나로 죽을 수도 있다. 프랜차이즈 매장이 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없는 곳이 없는 줄 아나? 그곳에는 음성 탐지기, CCTV가 있으며 얼굴 인식과 단어 감식을 한다. 불평분자로 찍히면 언제든 죽을 수 있다. 아무도 그 죽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사람들이 그렇게 죽으니까.

....... 그들은 사방에 있다. 늘 존재하면서도 아무도 아니다.

P184

해마다  《혼불》 작가 최명희의 문학정신을 기리며 전주문화방송이 제정한 '혼불문학상'이  여섯 번째 작가를 맞이했습니다. 4회 수상작 《비밀정원》과 5회 수상작 《나라 없는 나라》를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올해는 어떤 책이 수상의 영광을 얻었을지 궁금했는데요. 갈수록 사회 현안을 반영하는 작품들이 각광받는 모양새네요. 금년 수상작 《고요한 밤의 눈》은 조지 오웰의 《1Q84》가 겹쳐지며 감시사회 속 인간의 정체성을 다뤄 흥미로웠습니다.

이 세상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기억과 양심, 진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사람도.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얘기를 한 사람은 언니였다. 나는 언니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도 한 귀로 흘렸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늘 사라진다.

내가 언니의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 건 그 이야기를 했던 바로 그 사람, 언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P13

첫 장, 쌍둥이 자매 한쪽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언니가 사라진 이후 언니 행세를 하고 있는 동생은 조심스럽게 언니의 행방을 찾고자 합니다. 그 뒤는 15년간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 어느 한 남자의 사연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남자와 인연이 있는 미스터리 한 한 여자의 이야기가, 거대한 권력과 자본의 힘을 자랑하는 한 남자의 회의적인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뚜렷한 미래도 없이 그냥 글을 쓰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모두 D, X, Y, B, Z라는 연관성 없는 이니셜로 불리는데, 다섯 명의 등장인물은 '스파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조직은 세상의 흐름에 대한 막대한 정보를 분석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세상을 설계한다. 디렉터들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만한 사람들을 고르고 지원한다. 그들은 잘 만들어진 자원을 관리한다. 그리고 나 같은 이들이 위기를 관리한다. 잘못되면 다 우리 같은 아랫것들 탓이고 잘되면 다 윗분들이 잘해서이다. 그러니 치프는 이 위기를 나처럼 절박하게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P208

 

작가는 '스파이'를 직업을 삶고 있는 그들의 삶을 쫓으며 모든 것이 조작되고, 설계된 거대한 음모(陰模) 사회를 만들어 놓습니다. 독자는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마지막까지 숨 가쁘게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 소설 속 상황은 실제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으며, 정확한 때와 시를 알려주지 않아 혼란스럽습니다.

주체를 알 수 없는 점조직은 스파이라는 이름으로 정확하지 않은 무언가를 움직입니다. 언젠가 살게 될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꿈같은 신기루를 좇아가기 바쁜 인간 군상을 캐릭터로 담고 있는데요. 우리의 인생이 처음부터 중요하지도 살아갈 가치도 없는 상위 1%의 사람들을 위한 들러리라면 과연 계속 살아갈 용기가 생길까 반문하게 합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문학'이 소설 속 세상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줄 마스터 키라는 상황입니다. 감시 대상에는 '소설가 Z'가 있었는데요. 화려하게 문학계에 등단한 후 지금은 잊혀진 그저 그런 소설가 Z. 일정한 소득 없이 궁핍하고, 외로우며, 똑같은 매일을 보내고 있던 그의 소설은  균열을 만들 '혁명'으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책은 위험하지. 책을 대신할 유희는 많지만 책보다 생각을 깊이 전달하는 것은 없지. 책은 만드는 데 돈이 덜 들고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떠돌면서 불어나니까. 한때 작가는 시대의 양심으로 일종의 혁명가였어. 그리고 혁명가는 거의 모두 작가야. 그들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이야기를 남기지. 지배자들은 그래서 늘 책을 없애려고 해. 언제 죽을지 모를 세상에 책은 육체가 사라져도 살아남는, 영혼 같은 거거든.

P275

 

책은 망각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읽는 지루한 게임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거대한 음모 앞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치가 '글'일 수도 있음을 잊고 있었네요. 어쩌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저항 따위는 잊어버린 이들에게  한 편의 글이 큰 반향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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