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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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위해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는 방법! 나름대로의 피서법이 있겠지만, 시원한(곧 추워지지만) 카페에서 읽는 스릴러 한편이 영양제이고, 피로 회복제가 되는 저만의 피서법입니다. 말복이 지났고 이제 폭염으로 고생했던 8월의 끝자락이지만 좀처럼 더위가 가시지 않고 있어요. 이럴 땐 또 책 한 권 들고 근처 카페를 전전하게 되는데요. 뒤늦게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을 읽고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7년의 밤》의 오영제, 《28》의 박동해를 뛰어넘는 악의 천재 김유진! 서슬 퍼런 면도칼을 마주할 때면 이제 《종의 기원》이 생각날 것 같아서 무섭기까지 합니다.


주인공 김유진은 곧 있을 로스쿨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평범해 보이는 26세 청년입니다. 유진과 동거하고 있는 한 살 위의 (친구같은)의형제 해진과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엄마와 이렇게 셋이 살고 있습니다. 해진은 10년 전 유진의 집에 입양된 절친한 친구이자 소울메이트입니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도 자기 자식은 끔찍하게 사랑했다고 하죠. 해진은 유진에게 그런 존재입니다. 좋아하고 사랑하고,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그런 존재.

《종의 기원》의 무대가 되고 있는 가상의 동네는 유진의 숨어있던 본능을 일깨워주는데 안성맞춤입니다. 주민 입주와 개발이 멈춰버린 한적한 소도시에서 유진은 밤마다 약을 핑계로 활보하게 되죠. 어릴 때부터 유진은 엄마와 이모의 통제하에 '간질'에 효과가 있는 약을 처방받아왔습니다. 누군가에게 조정, 통제 당하면서 제 삶을 잠식당한다는 불쾌감이 살인은 더욱 부추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남들은 약을 먹음으로써 환각을 경험하지만 유진은 약을 끊음으로 인해 환각을 보는 특이한 케이스죠. 차츰 시기와 횟수를 늘리며 약의 족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유진은 비가 많이 내리는 어느 날 내면의 악과 대면하게 됩니다. 고요한 태풍의 눈과도 같은 성정으로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유진을 걱정했습니다. 7살 때 그린 그림이 모친 살해의 암시로 여겨진다고 호들갑 떨던 이모. 그 유려가 현실이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어머니를 살해하고 또 다른 범행들도  도미노처럼 저지를 수 있었던 건 유진이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가장 최고 레벨의 '프레데터'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태연하게 누군가를 맞이할 수 있고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감정이 없기 때문이죠. 게다가 이 모든 상황을 유진은 '어쩔 수 없었다'라는 단 한 줄로 요약해 버립니다.


​역시 정유정!이라고 엄지를 치켜주고 싶은 마음이 앞섭니다. 어떻게 하면 독자를 세상 끝까지 몰아붙이는 필력의 속도감을 책 속에 들여놓았을까요. 부럽고도 섬뜩합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피비린내를 맡으며 깨어나는 유진. 독자로 하여금 유진이 처한 상황에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1인칭 화법이 《종의 기원》 속 피의 숙청을 정당화하게 만듭니다. 참 영리한 구조입니다.

전반부는 유진을 피해자로 설정 충분히 독자에게 동정의 구실을 만든 후 어머니의 일기장을 넘겨보면서 밝혀지는 유진의 정체를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숨겨놓았습니다. 독자인 저도 깜박하면 주인공인 유진에게  옴짝달싹 못하게 죄를 뒤집어쓴 게 아닐까 깜빡 속아넘어갈 뻔했지 뭐예요. 정유정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사이코패스가 1인칭 시점으로 써 내려간 소설은 없다는 점, 그리고 살인자가 계속해서 살인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라고 했던 기억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더라고요.

한 여름 더위에도 닭살이 돋아날 정도로 인간 내면의 공포를 맛보게 하는 소설이네요. 인간은 살인을 통해 진화해왔고, 실인을 정당화한 여러 구실을 만들어왔습니다. 인류가 전쟁과 살육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문명을 발전해 온 것을 보면 정유정이 말하는 '종의 기원'은 다윈이 말하는 '종의 기원'의 변이(變異)처럼 느껴집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악의 유전자'를 후대에 대물림할 수 있는 전제적인 범죄자가 모든 인류일 수 있다는 발상! 오싹하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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